원전 안전을 중시하지 말라뇨

이미경 환경재단 대표

누워서 책 읽다 스르륵 잠드는 맛, 주말의 일과다. 너무 빨리 잠들어 책이 얼굴에 떨어지곤 했는데, 이 책은 읽다가 벌떡 일어나고야 말았다.

이미경 환경재단 대표

이미경 환경재단 대표

2016년 말에 ‘미식가의 성서’라고 불리는 미쉐린 가이드가 한국 식당을 대상으로도 평가를 한다는 소식에 요식업계가 술렁였다. 특급호텔 레스토랑, 정상급 셰프들이 운영하는 고급 식당들이 결과를 기다리던 중, 놀라운 내용이 발표됐다. 총 24곳 중 마포구 서교동, 변변한 상가조차 없던 골목에 자리 잡은 작은 중식당, 게다가 개업한 지 2년도 안 된 신생 가게가 별 다섯개 호텔 중식당과 나란히 별을 받았다. 이곳이 바로 미쉐린으로부터 “합리적인 가격에 다양하고 수준 높은 중식을 제공하는 중식 전문점”이란 평가를 받은 ‘진진’이다.

주말 낮잠을 떨쳐내게 한 책 <진진, 왕육성입니다>는 허름한 동네식당이 중식계의 BTS로 인정받게 되기까지의 이야기다. 장안을 주름잡았던 셰프가 어느 날 호텔 일을 접고 동네에 작은 가게를 냈을 때 실패 운운하며 업계에선 말들이 많았다. 그러나 책을 읽다보면 이건 중식당의 ‘삼국지’ 버전이랄까, 시대와 사람을 읽는 전략과 전술이 촘촘하게 숨어 있다. 가장 감동받은 건 ‘호텔 수준의 요리를 서민 주머니로도 즐길 수 있게 해주고 싶다’는, 어쩌면 양립하기 어려운 그의 꿈이다. 모든 꿈은 그것을 실현하도록 이끄는 힘이 있다. 손에 쥔 것 없는 화교 소년이 밑바닥부터 출발해 ‘요리하는 현자’로 칭송되기까지 그 힘의 팔할은 그 꿈이 아닐까 한다. 훌륭한 장인의 책을 읽으며 짜증이 솟은 이유는 이렇다.

윤석열 대통령은 후보 시절 <집사부일체>라는 예능에 출연해 요리솜씨를 보여준 바 있다. 맛의 베이스가 되는 국물을 미리 준비하고, 재료를 넣는 순서를 중요시하며 불 조절까지 잘해서 끓여낸 김치찌개하며 계란말이도 그렇고, 화면에 안 나오는 스태프까지 챙기는 모습에 누리꾼들의 칭송이 자자했다. 다 사람이 하는 일이고 사람 성격은 어디 가는 것 아니니 섬세하고 배려하는 성품의 리더로 걸기대를 한 것 같다.

그런데 지난 6월22일 창원의 원전업체 방문에 동행한 정부 관료들을 향해 대통령께서는 ‘안전을 중시하는 사고는 버려야 한다’는 말씀을 하셨다. 기후재난이 이념이 아니라 현실이듯 기후 해결을 위한 에너지 정책도 정파나 이념을 떠나 난해한 고차방정식 풀듯 풀어나가야 한다. 정치는 마감시간이 있지만 에너지 문제는 생활과 직결되어 꾸준히 지속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주지하다시피 원전의 아킬레스건은 안전이다. 원전에서 안전 문제를 걷어내도 된다면 유럽연합(EU)의 그린 택소노미에 원전을 넣네 마네 하는 것이 그렇게 큰 뉴스가 되었을까?

오바마 전 대통령은 재임 기간 중 메르켈 총리가 ‘영리한 실용주의와 선량함, 흔들리지 않는 윤리적 나침반’에 따라 어떻게 위기를 헤쳐나가는지 체험하게 해주어, 동시대인으로서 기뻤다고 했다. 이 말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왜 우리에겐 영리한 실용주의 정치인이 없을까. 우리는 모두 정답 없는 삶을 살고 있는데 정책 식당엔 왜 단답형 메뉴만 오르는 걸까. 안전을 중시하는 사고를 버린 자리에 무엇을 채울지, 숙수들끼리 아수라 싸움판을 벌인 식당에서 허기진 국민은 피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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