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표의 맹수성과 모기의 상상력

임지현 서강대 교수

세상은 이상하게 얽혀진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때문에 폴란드와 한국이 이렇게까지 깊이 얽힐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명색이 폴란드사 전공자인 나도 그랬다.

임지현 서강대 교수

임지현 서강대 교수

2015년 러시아가 크름반도(크림반도)를 점령하고 친러 민병대들이 도네츠크 지역을 장악했을 때의 일이다. 포즈난 등 민족주의 색채가 강한 폴란드 지역의 고등학교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모여 군사훈련을 받는 사진과 기사를 접하고는 1970년대 우리 세대가 받았던 ‘교련’의 추억이 아련하게 떠올랐다. 폴란드는 동유럽 국가 중 러시아의 위협을 가장 피부로 느끼는 나라 중의 하나다. 교련 수업은 에피소드에 불과했다. 올해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자 모든 난관을 무릅쓰고 275만명에 이르는 우크라이나 난민을 받아들이는가 하면, 전쟁이 지속되자 우크라이나 정부에 자신들이 운영하고 있는 구소련제 탱크와 미그기 등 주요 무기들을 무상으로 제공했다. 1795년 이후 120년 넘게 러시아의 속국이었고, 1918년 독립하자마자 볼셰비키 러시아와 국가의 존립을 건 일전을 벌였고, 1939년 2차대전이 발발하자 르부프, 그로드노, 빌니우스 등을 유서 깊은 동부 영토를 다시 러시아군에 점령당했으며, 2차대전 이후에는 다시 러시아의 막강한 영향력 아래 주권을 제한받았던 역사를 보면, 러시아에 대한 폴란드 조야의 위기의식은 충분히 이해된다.

차르의 러시아든, 스탈린의 러시아든, 푸틴의 러시아든, 폴란드인들에게 러시아는 러시아인 것이다. 나토 가입을 서두른 스웨덴, 핀란드와 달리 이미 나토 국가인 폴란드는 나름대로 국방력 강화에 결사적이다. 러시아·우크라이나·폴란드·독일·미국·터키·이란·이스라엘 등이 벌이는 난전에 한국이 중요한 플레이어로 끼어든 것도 이 지점에서이다. 한국 언론의 보도에 따르면 폴란드 정부는 ‘국산’ 전차 K-2 흑표를 2024년까지 180대 구입하고, 2030년까지 400대를 추가 구매하겠다는 의향을 밝혔다고 한다. 급한 대로 우선 우크라이나에 제공한 구소련제 T-72 탱크의 공백을 메꾸기 위한 조치라는데, 한국 언론들은 환영 일색이다. 한국 방위산업의 놀라운 성취를 입증해준다는 논조다. 기술적으로는 맞는 이야기일 것이다. 그러나 터널 비전에 갇혀 있다는 느낌을 지우기 어렵다.

나는 특수장교로 짧은 군대 복무 경험밖에 없고, 또 평화주의를 지향하기 때문에 군수산업에 대해서는 견문이 없다. 그러나 오류의 검증 가능성을 위해 군수산업이 중요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관점에 서서 이 문제를 따라간다고 해도 석연치 않은 점이 적지 않다. 내 불편함을 해명해준 것은 뜻밖에도 폴란드 일간지 ‘가제타 뷔보르차’ 8월3일자에 실린 폴란드군 무기 전문가 파베우 노박 장군의 인터뷰였다. 노박 장군의 평가에 따르면, K-2 흑표전차 구매가 완료되면 폴란드군은 영국·독일·프랑스군의 전차를 전부 합친 것보다 더 많은 전차를 보유하게 된다. 그러나 폴란드군이 영국·독일·프랑스 3국을 다 합친 것보다 더 막강한 군 전력을 갖게 될 것이라고 믿는 사람은 없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주력인 T-72 전차는 물론 괴수처럼 강력한 최신 T-90 전차조차 몇 푼 안 되는 휴대용 대전차 미사일에 속수무책임을 잘 보여주었다. 고가의 초음속 전투기들이 맥없이 스팅어 대공미사일에 격추되는 장면들도 낯익다. 우크라이나에서 ‘모기’라고 부르는 민수용 드론의 혁혁한 전과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우크라이나는 터키에서 수입한 군수용 드론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서 보낸 민수용 드론을 가내 공장에서 군수용으로 바꾸어 놀라운 성과를 보이고 있다. 뜨거운 여름밤 잠을 설치게 만드는 모기처럼 언제 날아올지 모르는 우크라이나의 아마추어 드론들 때문에 러시아군은 밥도 마음대로 못 먹고 제대로 쉬지도 못한다고 전장에 대한 최근 보도들은 전하고 있다. 한마디로 모기의 상상력이 흑표의 맹수성을 진압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강력한 전차군단에 대한 폴란드군의 집착은 극단적 민족주의 세력인 집권당 ‘법과 정의당’의 과시용 과대망상증이 군사적 합리주의를 압도하고 있는 징후가 아닌지 의심스럽다.

2차대전 발발 당시 빛나는 전통의 막강한 폴란드의 기마병 부대가 독일군 전차부대를 일격에 궤멸시킬 것이라고 믿었던 근거 없는 자신감이 느껴지는 것이다. 흑표전차의 한국 판매자나 폴란드 구매자 모두 동병상련의 민족주의적 과대망상증 환자가 아닌지 걱정이다. 21세기 한국과 폴란드의 K-2 전차 군단이 1939년 폴란드 기마부대의 운명을 반복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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