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7월30일 경향신문, 9월6일 한겨레, 7일 연합통신

정희진 여성학자
[정희진의 낯선 사이] 1997년 7월30일 경향신문, 9월6일 한겨레, 7일 연합통신

이 글의 목적은 어떤 사실관계를 명확히 하기 위해서이다. 20년 전 나는 처음 일본을 방문했다. 동아시아 지역 제노사이드 주제의 학술대회 일정이었다. 가장 크게 놀란 장면은 교토 거리 곳곳에 붙은 공산당 선전 포스터였다. 共産黨. 박정희 시대에 초등학교를 다닌 내게, 세 글자는 충격이었지만 곧바로 이성을 찾았다. 일본 좌파는 천황제를 의식, 대중노선을 채택하고 국가사회주의를 주도했다. 국가는 소수자 배제를 통해 자랑스럽게 대표되어야 하므로 일본 공산당이 자이니치, 오키나와 사람을 차별하는 ‘단체’로 타락한 것은 예정된 수순이었다.

정희진 여성학자

정희진 여성학자

진보는 특정한 집단이 아니므로 내부도 다양하고 주류 사회의 서열이 그대로 반영되기도 한다. 주요 모순이 실재하고 자신이 사회운동의 주류라고 생각하는 이들은 ‘나머지 사람’(여성, 지방 사람, 장애인, 성소수자…)의 목소리가 불편하다. 이들이 인권을 주장하면 “나중에”를 외친다. 이런 인식에 인성까지 나쁘면 약자를 함부로 대하는 ‘걸어다니는 재앙’(운동가)이 등장한다. 사회운동도 회사 생활과 마찬가지다. 신념만으로 할 수 없다. 동료이든 동지이든 상처받으면 분노하고 좌절한다.

사회운동이나 혁명이 약자, 소수자를 탄압하는 경우는 드물지 않다. 동서고금 마찬가지다. 무엇이 중요한가를 누가 정하는가를 묻고 싶지만, 자신이 중심이라고 생각하는 이들과의 대화는 쉽지 않을뿐더러 매장당할 수도 있다.

사회운동과 피해 당사자의 이해관계가 일치하지 않는 경우도 흔하다. 목소리 큰 이들이 개인의 상황을 대의에 종속시킨다. 2002년 중학생 두 명이 미군 장갑차에 의해 압살당한 사건에서 ‘반미 민족주의 명망가’들이 가난하고 목소리 없는 유가족을 억압한 사례는 지금도 나를 괴롭힌다. 미군 범죄로 인한 피해 보상은 당연한데, 운동가들은 이를 “순결한 피해, 자존심 운운”하며 반대했다.

군 ‘위안부’(이후 작음 따옴표 생략)를 전쟁의 부산물로 보면 과거 청산의 일환으로 간주되겠지만, 위안부 역사는 성별화된 국가, 일상의 젠더 폭력, 한·일관계, 한국사회의 식민지 남성성을 보여주는 역사의 중요한 프레임이다.

듣기는 책임이다

지난 8월11일, 일본군 위안부 기림의날을 맞아 서울시가 주최하고 이화여자대학교 한국여성연구원(원장 김은실)이 주관한 국제학술대회가 온라인으로 열렸다. ‘분쟁과 여성인권 : 이행기 정의와 책임의 정치’를 주제로 한 이번 포럼은 3개 세션으로 ‘기조연설’ ‘발표와 토론’ ‘대담’으로 진행되었다. 김은실 원장은 기조연설에서 그간 군 위안부 운동을 둘러싼 각종 논란과 피해자들의 고령화 등 ‘증언 이후’의 상황에 대해 “책임의 정치”를 제안했다.

삶은 대화이다. 우리는 타인의 이야기를 들을 때 어떤 식으로든 반응(response)해야 한다는 다양한 강도의 의무감을 느낀다. 특히 역사적·구조적 피해자들의 이야기는 사회적 책임(responsibility)이며, 그렇게 되도록 만들어야 한다. 하지만 듣기, 반응, 책임… 이 모든 과정은 간단치 않다. 사랑이 왜 어렵겠는가. 내 이야기를 조건 없이 들어주고 수용해주는 이들이 드물기 때문이다.

30여년 동안 군 위안부 운동의 성과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논란이 커져가고 있는 이유는 ‘피해자-운동가-연구자’가 분업화된 데다 피해자의 목소리가 한국사회가 원하는 방향(반일 피해의식)으로 ‘모아졌기’ 때문이다(국가의 무능과 방관은 아예 논외다). 이때 피해자의 개별성은 사라지고 여성은 사람이 아니라 상징물로 통일(물화)된다. 이용수님의 문제제기는 이러한 상황에 대한 고뇌의 결단이었을 것이다. 한국사회는 피해자들의 목소리를 ‘걸러서’ 들었다. 보고 싶은 것만 보이듯이, 듣고 싶은 것만 들었고 심지어 듣고 싶은 말을 강요했다. 여기에 피해자 지원과 복지, 돈 문제가 얽혀 있다. 분명한 현실이지만 밝히기 어려운 판도라의 상자다.

한국은 인식론으로서 젠더의 지위가 낮아서 성폭력조차 해프닝으로 소모되는 경우가 다반사다. 피해자의 다양한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고 주장한 박유하, 우에노 지즈코의 마음은 소중했다.

그러나 그 다양성이 군 위안부 문제의 근본적 성격을 인지하지 못한 무지의 산물이어서, 문제는 엉뚱한 방향으로 튀었다. 획일적 목소리나 다양한 목소리나 모두 문제가 된 것이다. 전자는 남성 민족주의가 원하는 역사였고, 다양한 목소리는 이 문제의 본질인 “일본이 조직적으로 제도화한 전시 성폭력”이라는 인식 부재로, 이들의 의도와 무관하게 국내외 보수세력의 지지를 받았다.

피해자와 대의를 대립시키는 운동

게다가 나눔의집은 80억원대의 횡령을 감추기 위해 박유하씨를 고소했으니, 박씨의 입장에서는 자신이 위안부 운동의 피해자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2020년 9월22일 방영, MBC <PD 수첩> 참고). 윤미향 의원은 운동에 헌신해 왔는데, 보수 언론이 공격하니 피해자라고 주장한다. 정작 군 위안부 피해자의 말은 흩어지고 다른 이들이 피해자가 되었다. 고통의 역사에 개입하는 일이 어려운 이유다.

앞에 말한 포럼에서, 군 위안부 영화의 걸작이라고 평가받는 <침묵>의 박수남 감독과의 대담 세션이 있었다. 세계 최대 규모의 여성영화제인 서울국제여성영화제(이사장 김은실)에서도 올해 그의 영화 <아리랑의 노래-오키나와의 증언>이 상영되었다. 1991년 제작된 이 작품은 군 위안부 운동 재현을 촉발시킨 매우 소중한 작품이다. 자이니치인 그는 일본과 오키나와에서 귀국하지 못한 위안부들을 찾아다니며 평생 일본 우익에 맞서 살아왔으나 김대중 정권 당시 여성단체의 의사를 존중한 정부에 의해 입국을 금지당했다(경향신문 8월10일자, ‘정희진의 낯선 사이’ 참조).

그날 대담에서 고령(1935년생)의 박 감독은 줌 회의에다 순차 통역의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최선을 다해 인터뷰에 응했다. 그런 상황에서 그는 김대중, 김영삼 정부를 착각했다. 그러자 바로 유튜브 댓글 창에 그의 말에 신빙성이 없다는 글이 올라왔다.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고, 간단한 말실수인데 그의 착오를 굳이 지적하는 심리는 무엇일까. 이미 남한 정부와 여성주의 세력으로부터 깊이 상처받은 고령의 운동가에게 보인 이 적대감의 정체는 무엇일까. 그는 군 위안부 운동의 중심을 자처하는 정의연(이사장 이나영)에 불편을 넘어 ‘불안한’ 존재다. 일본 좌파가 국가사회주의를 위해 불가촉천민에 가까웠던 자이니치를 짓밟았던 심리와 비슷한 현상이다.

가슴 아픈 현실은, 행사 이후 당시 통역자인 이유미씨에게 박수남 감독이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는 자료를 보내왔다는 사실이다. 나를 포함, 항상 자기 의견을 의심받고 부정당하는 사회에서 살아가는 이들은 사소한 실수에도 ‘증명 강박’에 시달린다. 박수남 감독의 입국 금지 사실은 1997년 7월30일 경향신문, 9월6일 한겨레, 9월7일 일본판 연합통신, 같은 일자 한국판 연합통신에 보도되었다. 언론에 보도된 사실을 밝히기 위해, 나는 지금 이 글을 쓴다.

소위 국민기금 수령에 대해 과거 정대협과 다른 입장을 가진 다양한 세력이 있다. 일단 기금의 성격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고, 수령은 곧 매춘 여성임을 인정하는 것이라는 인식이 막강했다. 정대협은 수령을 적극적으로 막았고, 생계가 곤란한 군 위안부 피해자들은 낙인과 경제적 어려움이라는 이중의 고통을 겪었다. 기금의 성격도 오해가 있었지만, 나는 수령 여부 자체는 피해자 개인의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운동은 국민기금을 계기로 초심을 잃었다. 사회운동이 피해자를 배척한 것이다.

예전에는 사회운동을 하면 감옥에 갔지만, 지금은 출세가 목적이거나 자신의 다른 문제(횡령, 논문 부정)를 감추기 위해 진보를 자처하는 이들이 등장했다. 진보 타이틀이 일부 인사에게 돈과 정계 진출의 기회가 되면서 ‘이 판’도 경쟁 시대다. 결국 위선과 불법의 진보는 윤석열 정부를 탄생시켰다.

운동이든 학문이든 자신이 독점해야 한다는 사고는 필연적으로 부패와 패권주의, 권력화를 낳는다. 그때 제대로 지급되지 못한 돈과 한·일 정부와의 자존심 싸움으로 만들어진 돈은, 지금 대학을 매개로 한 연구자들의 소위 프로젝트로 사용되고 있다. 대학 교원이 아니면 수주가 어렵고, 대학은 연구비의 일정액을 교비로 환수한다. 30년간 국내외 개인들이 기부한 성금은? <PD 수첩>을 다시 보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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