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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가부장제, 영화 ‘장손’
지금 상영되고 있는 영화, 오정민 감독의 <장손>은 생각할 거리가 많은 작품이다. 1인 가구 시대, 장손(長孫)은 실재하는가. 모든 남성은 생계부양자인가. 가부장제는 누구에 의해 유지되는가. 쇠락하는 가부장제는 왜 여성의 지위 향상으로 이어지지 않는가….<장손>은 전통적인 유교적 가부장제를 상징하는 아름다운 고택, 계절의 풍광을 넘치도록 담아낸 화면, 매직 아워(빛이 충분하면서도 인상적인 효과를 낼 수 있는 해 뜰 무렵이나 해 질 무렵) 촬영이 많은 영상미, 빈틈없는 시나리오, 연기와 연출 모든 면에서 많은 칭찬을 받은 역작이다.게다가 감독의 ‘주장대로’ <베테랑 2>의 경쟁작이 될 만큼 흥행성도 갖췄다. 대자본이 투입된 시리즈 상업영화와 영화진흥위원회에서 다섯 번 시도한 끝에 지원받은 독립영화가 시장에서 당당히 겨눌 만큼 재미있는 작품이다. 이 영화는 독립영화의 예산상 한계, 촬영 회차, 계절 촬영 등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감독... -
‘위안부’, 더 많은 논쟁을 할 책임
‘위안부’ 운동은 일본의 역사 부정 속에서 피해자의 증언에 의존하여 진행되어온 사회운동이다. 피해자의 말하기와 듣기의 전 과정은 투명하지 않다. 그러나 한국 사회는 그간 피해자의 말을 각자가 필요한 방식으로 전유했다. 이 글의 제목은 평소 나의 생각이자 최근 출간된 책의 제목이기도 하다. <‘위안부’, 더 많은 논쟁을 할 책임>(휴머니스트, 2024)의 편저자 김은실은 ‘위안부’에 대한 새로운 논의 방식을 제안한다. 이미 알고 있는 지식을 확인하는 도구적인 말하기와 듣기가 아니라 새로운 앎의 형식을 만날 수 있는 개방적인 태도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때 듣기는 답을 찾는 과정이 아니라 다른 질문을 어떻게 만들 것인가라는 또 다른 질문이 시작되는 출발점이 된다. 1991년 고 김학순의 일본군 ‘위안부’ 피해 증언 이후 33년이 지났다. 그간 많은 성과가 있었지만 여전히 한국 사회는 이 문제의 정확한 이름을 찾지 못하고 있다. 여성의 성으로 남성을 위안(... -
흑인 문학과 민족 문학
인종선(人種線) - 흑인 쫀슨에게밖에선세차게 씽씽 눈발이 휘몰아치는 밤조고마한 온돌에 발을 녹이며두터운 입술에서굵다란 눈물방울 떨치는쫀슨 너의 이야기쇠사슬 늘이어흑노(黑奴)의 아들로서 시장에 팔려온이제는 고이 쉬는 할아버지는시아고에 활발한 인종선에무지한 백인이 던지는 벽돌에집앞에서 쓰러졌으며이리하여원수를 갚겠다는 미친 아버지마저식칼에 찔리어길바닥에 자빠져버렸다원통함이여색(色) 있는 슬픔이여웃집에선 여인마저 까귀에 찍혔다탄환은 사정없이 가슴패기를 뚫으는구나하수도에 떠가는 검은 송장들멀리 흑노가 닦아논오구라하마에 가모라이나 테기사쓰에지주는 이들의 몸뚱아리에 못을 치고는나무에 불을 지피는……며칠이 지난 뒤 살육은 끄쳤다그러나또다시 뒤끓는 백인의 폭도들언제나 인종선은 끝맺는 것이냐쫀슨이여홀어머니의 자식이여, 그렇다인종선은 늬 곳에만 있는 줄 아느냐동... -
K방산이 위협하는 것
자주국방은 대한민국 국방부의 건군(建軍) 이념이다. 자주국방은 분단과 한·미 동맹이 상수였던 한국 현대사를 상징한다. 남한 사회의 성장에 따라 “~로부터의 자주”가 바뀌었을 뿐이다. 북한에 비해 경제적·군사적으로 열세였던 1970년대의 자주국방은 ‘북한으로부터’ 자주국방(self-reliance defense)을 의미했고, 2000년대에는 전시작전통제권 환수 등 ‘미국으로부터’ 자주국방을 추구했다. 전자는 박정희 전 대통령, 후자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주요 정책이었다. 이처럼 그간 자주국방론은 주로 북한과 미국이라는 외부를 상정한 담론이었다. 다시 말해 외부에 의존하지 않고 침략에 대비하는 ‘방어용’이라는 이미지가 강했다. 그러나 지구상 어느 국가도 자국의 국방 정책을 ‘침략용’이라고 하지 않는다. 한 해 1000조원의 국방비를 사용하는 미국 국방부 명칭도 ‘DOO(Department of Offence)’가 아니라 DOD(Department of Defence)이다.... -
채 상병 사건과 오키나와 전투
최근 출간된 한겨레 고경태 기자의 저서 <본 헌터(Bone Hunter) - 어느 인류학자의 한국전쟁 유골 추적기>를 읽고 그 여진에서 자유롭지 않은 시간을 보내고 있다. 지은이와 책의 주인공 박선주 충북대 명예교수의 노동과 지적 호기심, 인간에 대한 예의야말로 ‘진정한’ 역사의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전쟁은 전 세계 26개국이 참전한 ‘3차’ 세계대전이자 100만명의 민간인 사상자를 낳은 내전이었다. 그렇다면 그 유해들은 어디에 있을까. 미국은 한국전쟁 당시 전사한 자국군의 시신을 즉시 수습해 본국으로 보냈다. 반면 지난 70여년간 한국 정부는 발굴 개념조차 없거나 색깔론을 운운해왔다. 우리는 전쟁 희생자의 유해 위에 세워진 건물, 도로, 각종 인프라에서 살고 있다. 충남 아산 인근 지역을 주로 다룬 책의 첫 발굴 에피소드 제목은 “여긴 땅 파면 다 시체야”다.‘참전 용사(勇士)’라는 단어는 군인만 전쟁을 치르는 듯한 인상을 준다. 많은 ... -
의정부시의 ‘기지촌’에 대한 인식
2022년 대통령 직속 국가균형발전위원회(위원장 김사열)는 취약지역 개조사업 신규 대상지 68개소를 선정했다. 이른바 ‘새뜰마을’ 사업이다. 새뜰마을 사업의 취지는 빈집·노후주택 정비, 슬레이트 지붕 개량, 상·하수도 정비 등을 통해 생활여건을 개선하고 주민 공동체 활성화를 지원하는 데 있다고 한다. 노인 돌봄과 건강관리 프로그램 등 휴먼 케어(human care)와 주민 역량 강화사업도 포함되어 있다.뜻은 좋아 보인다. 그러나 이 사업이 1970년대 ‘새마을운동의 재현’인지 돌봄 사회가 추구하는 ‘마을 만들기’인지 여부는, 사업 자체가 아니라 추진 과정에서 드러날 것이다. 마을 만들기라면, 국가가 그 대상을 지정하고 지원 내용이 건설사업 위주여서는 안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마을 만들기가 아니라 마을 파괴다. 또한 문화유산이 생활여건 개조사업이라는 명분으로 검토의 여지도 없이 사라질 가능성이 크다.선정 지역 중, 우려를 넘어 문화유산 삭제가 목적으로 보이는 ... -
여성 공천 할당제를 생각한다
비현실적인 이야기지만 모든 피의자는 공평하게 법률 서비스를 받을 권리가 있다. 전두환씨, 아동 성폭력 가해자, 연쇄살인범도 예외가 아니다. 최종 판결까지는 무죄로 간주한다는 원리 역시 분명한 정의다. 그런 점에서 이번 총선에서 더불어민주당의 서울시 강북을 공천 논란의 주인공인 조수진 변호사 수임 경력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변호사는 무엇으로 사는가. 나는 한국미래변호사회가 밝힌 변호사의 성폭력 피의자 변호에 대한 다음과 같은 입장에 동의한다. 한미변은 “변호사 출신 후보가 특정 사건을 수임했다는 이유로 과도한 사회적 비난을 받는 현실에 강한 우려”와 “변호사 윤리 장전은 사건 내용이 비난받는다는 이유만으로 변호사가 수임을 거절하지 않는다고 명시한다”고 주장했다. 맞는 이야기이지만, 내 질문은 이것이다. 그들이 말하는 “변호사의 수임 여부”는 사건 내용에 따라 달라지는가, 아니면 ‘수임료’에 따라 달라지는가. “사건 내용(여기서는 성폭력)”에 대한 판단은 합... -
저출산은 해결되지 않는다
작년 한국의 출생아 숫자는 23만명이다. 그중 4분기 합계출산율이 사상 처음으로 0.6명대를 기록했다. 0.5명대도 가능하다고 본다. 언제부터인가 저출산 관련 뉴스를 접하지 않는 날이 없다. 어딜 가도 “저출산, 저출산…”이다. 최근에는 ‘저출산’이 문제의 책임을 여성에게 전가한다는 점에서, 정치적으로 올바른 용어로 ‘저출생’으로 표기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인식에 반대한다. 저출산이 문제라고 생각하지도 않고, 저출산은 여성의 진화생물학적 적응이자 이탈리아 페미니스트 마리아 델라 코스타의 용어대로 “파업”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여성은 시민의 정당한 권리로 파업을 행사한 것이다. 저출산은 정치적 행위자로서 여성들의 한국 사회에 대한 발본적(拔本的) 문제제기다.결론부터 말한다면, 나는 국가와 사회가 아무리 노력해도 저출산은 극복되지 않는다고 단언한다. 그런데 저출산을 해결한답시고 엉뚱한 방향으로 인력과 비용을 쓰고 있으니 안타깝다. 젠더 문해력이 ‘제로’인 ... -
한동훈 위원장의 “동료 시민”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이 사용하는 “동료 시민 여러분”은 일견 의미가 있어 보인다. 여론도 대체로 우호적인데, 탈권위적이라는 의견이 많은 것 같다. 긍정적인 평가에 더해, 그가 말하는 시민의 범주에 사회적 약자도 포함되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내 생각은 다르다. 나는 한동훈 위원장의 이 표현에 두려움을 느낀다. 첫째 한 위원장이 시민을 동료라고 부르는 그 사고방식이 두렵고, 둘째 그의 말에 열광하는 팬덤이 두렵고, 셋째는 그가 탈권위적 인물 이미지를 가지게 될까봐 두렵다. 말할 것도 없이 가장 두려운 것은 세 번째 상황이다.‘동료 시민인 국민들’은 한동훈 위원장에게 동료 의식을 느낄까. 아니, 한동훈 위원장 자신은 정말 스스로를 시민의 동료라고 생각할까. 그는 뭔가 오해하고 있는 듯하다. 비서진과 우산을 같이 쓰고 ‘폴더 인사’를 하고 단체사진을 찍을 때 가장자리에 선다고 해서, 그가 국민의 동료가 되는 것도 아니고 그래서도 안 된다고 생각한다. ... -
비상대책위원회
한동훈 전 법무부 장관은 지난해 12월21일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직을 수락하며 국민의힘에 입당, 상임전국위원회의 의결을 통해 12월26일부터 비대위원장으로서 임기를 시작했다. 한국 정치는 언제나 비상(非常)이다. 그래서 정치권에서 아무리 위기라고 해도 국민의 입장에서는 ‘비상대책위원회’가 낯설지 않고 비상사태라는 느낌도 별로 없다. ‘비대위’가 상시적으로 필요하다면, 비상 상태는 상례(常例)가 된다.문제는 어떤 상황이 비상 상태이고, 누구에게 무슨 문제가 위기인가이다. 지금 여당의 비대위는 당 조직이 안정적으로 작동하지 않아서 만든 기구인가 아니면 단지 ‘권력자 물갈이’를 위한 형식적인 이름인가.어쨌든 “비상사태가 상례가 된 것이다”. 내용은 완전히 다르지만, 익숙한 말 아닌가. 다음은 발터 베냐민의 마지막 저작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역사철학테제) 중 테제 8의 일부이다. “억압받는 자들의 전통은 우리가 살고 있는 비상사태가 상례임을 가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