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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의 사상
소설가 정찬의 작품집 <완전한 영혼>에 실린 중편 ‘얼음의 집’의 주인공은 고문 가해자다. 그것도 일본 제국주의가 배출한 최고 ‘전문가’다. ‘얼음의 집’은 고문자의 시선에서 권력과 인간의 몸, 고통에 대해 탐구한다. 문학평론가 정과리가 “독자의 몸을 진저리치게 만드는 악을 드높이는 문학의 곡예”라고 평한 바 있듯, 이 작품은 행간마다 사유의 밀림으로 가득 차 있는 단순한 걸작을 넘은 명작(銘作)이다.고문 기술자는 고문 대상자의 몸을 소유하고 있다. 완벽한 권력이다. 내 생각에 작품의 요지는 그런 권력에도 사상이 있다는 것, 아니 ‘있어야 한다’는 주장이다.독자를 진저리치게 만드는 소설가의 문장을 보자. “문득문득 쾌락에 몸을 맡기고 있는 나를 발견하고 소스라치게 놀라곤 했다. 파도처럼 밀려오는 권력의 쾌락을 끊임없이 지워야 하는 그 혹독한 인내. 물론 나는 훌륭히 견뎌내었다.”고문 기술자에게 고도의 사상이 필요한 이유는 ‘직업윤리’만의 문제가 아니라... -
‘우리’ 자신에게로
이승만 전 대통령을 다룬 김덕영 감독의 <건국전쟁>에는 이런 대사가 나온다. “4·19 혁명은 이승만 대통령이 국민 교육에 헌신해서 국민을 자각하게 한 덕분에 가능했다.” 자기도취자들의 계보일까. 나는 윤석열 ‘대통령’이 12월3일 이후 한 말 중에서 “(내가) 국회를 봉쇄하지 않아서 계엄 해제가 가능했다”는 말이 가장 인상 깊었다. 4·19도 계엄 해제도 자신들의 치적이라는 논리다.세상 모든 힘이 자신에게만 있고, 따라서 우주가 자신을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다는 이러한 확신은 어떻게 해체될 수 있을까. 인간은 어떤 조건에서 변화가 가능한가 아니면 절대로 변하지 않는 인간도 있는가라는 ‘교정학적(矯正學的)’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윤석열의 계엄 선포와 이후 12·12 담화문, 탄핵소추안 가결 후에도 “결코 포기하지 않겠다”는 일련의 행동을 보고 많은 이들이 처음에는 “도대체 왜? 왜? 왜?”를 질문하다가 “취했나 봄”을 거쳐, 심리학자와 정신과 의사의 ‘... -
기민과 탄핵
2016년부터 시작된 ‘촛불시위’에 연인원 1700만명이 참여했다. 이듬해 박근혜 대통령은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퇴진했다. ‘촛불’은 전국 각지에서 장기간 대규모로 이루어진 자발적 힘이었다. 당시 ‘여론 주도층’은 이 집회의 동력과 원인에 대해 많은 토론과 분석을 시도했다. 구한말 만민공동회가 역사적 기원이라는 이야기도 나왔다.1980년대 ‘변혁 이론’ 중 하나였던 제헌의회 그룹(CA)의 이론적 전제는, 일반 대중은 강력한 지배 이데올로기에 포섭되어 있으므로 해방의 주체가 되기 위해서는 직업 혁명가의 지도가 필수적이라는 것이었다. 이들이 가장 경계한 것은 대중 추수(追隨)주의였다. ‘촛불’은 이들의 입장을 정면으로 반박한 역사다. 8년 전 집회에 참가한 이들은 귀가하지 않고 콘서트를 즐겼으며 도로를 점거하고 삼겹살을 구워 먹으며 자체 토론을 벌였다(물론 성추행과 절도도 있었다). 사회운동 세력은 대중을 동원하거나 조직하기는커녕, 사람들이 왜 이렇게 행동하는지조차 몰랐다... -
체념의 힘
의사이자 문화인류학자인 김관욱은 최근작 <몸, 살아내고 말하고 저항하는 몸들의 인류학>에서 인간의 몸이 발명해낸 질환으로 체념증후군(resignation syndrome)을 소개한다. 이 증상은 몸이 너무나 고통스러운 일에 대해서는 극복하려 하기보다 고통을 감수하려는 현상을 말한다.증상 중 하나가 수면인데, 무려 5년 동안 잠을 자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들은 언제 깨어날까. 죽지 않고 영원히 잠든다면? 아니, 수면이 유일한 자기 보호 조치라면 깨어나는 것이 과연 ‘바람직할까’. 한 무리의 소녀들이 어느 날부터인가 잠에서 깨어나지 않았다. 흔들고 꼬집는 등 어떤 힘을 가해도 움직임이 없다. 찬 얼음을 몸에 대도 소용이 없고 그 어떤 통증에도 심장 박동 수가 올라가지 않는다. 꾀를 쓴다고 해도 자율신경계의 반응까지 통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식물인간’ 상태인가? 그것도 아니었다. 뇌파 검사 등 모든 정밀 검사에서 소녀들은 완벽하게 ... -
요즘 가부장제, 영화 ‘장손’
지금 상영되고 있는 영화, 오정민 감독의 <장손>은 생각할 거리가 많은 작품이다. 1인 가구 시대, 장손(長孫)은 실재하는가. 모든 남성은 생계부양자인가. 가부장제는 누구에 의해 유지되는가. 쇠락하는 가부장제는 왜 여성의 지위 향상으로 이어지지 않는가….<장손>은 전통적인 유교적 가부장제를 상징하는 아름다운 고택, 계절의 풍광을 넘치도록 담아낸 화면, 매직 아워(빛이 충분하면서도 인상적인 효과를 낼 수 있는 해 뜰 무렵이나 해 질 무렵) 촬영이 많은 영상미, 빈틈없는 시나리오, 연기와 연출 모든 면에서 많은 칭찬을 받은 역작이다.게다가 감독의 ‘주장대로’ <베테랑 2>의 경쟁작이 될 만큼 흥행성도 갖췄다. 대자본이 투입된 시리즈 상업영화와 영화진흥위원회에서 다섯 번 시도한 끝에 지원받은 독립영화가 시장에서 당당히 겨눌 만큼 재미있는 작품이다. 이 영화는 독립영화의 예산상 한계, 촬영 회차, 계절 촬영 등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감독... -
‘위안부’, 더 많은 논쟁을 할 책임
‘위안부’ 운동은 일본의 역사 부정 속에서 피해자의 증언에 의존하여 진행되어온 사회운동이다. 피해자의 말하기와 듣기의 전 과정은 투명하지 않다. 그러나 한국 사회는 그간 피해자의 말을 각자가 필요한 방식으로 전유했다. 이 글의 제목은 평소 나의 생각이자 최근 출간된 책의 제목이기도 하다. <‘위안부’, 더 많은 논쟁을 할 책임>(휴머니스트, 2024)의 편저자 김은실은 ‘위안부’에 대한 새로운 논의 방식을 제안한다. 이미 알고 있는 지식을 확인하는 도구적인 말하기와 듣기가 아니라 새로운 앎의 형식을 만날 수 있는 개방적인 태도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때 듣기는 답을 찾는 과정이 아니라 다른 질문을 어떻게 만들 것인가라는 또 다른 질문이 시작되는 출발점이 된다. 1991년 고 김학순의 일본군 ‘위안부’ 피해 증언 이후 33년이 지났다. 그간 많은 성과가 있었지만 여전히 한국 사회는 이 문제의 정확한 이름을 찾지 못하고 있다. 여성의 성으로 남성을 위안(... -
흑인 문학과 민족 문학
인종선(人種線) - 흑인 쫀슨에게밖에선세차게 씽씽 눈발이 휘몰아치는 밤조고마한 온돌에 발을 녹이며두터운 입술에서굵다란 눈물방울 떨치는쫀슨 너의 이야기쇠사슬 늘이어흑노(黑奴)의 아들로서 시장에 팔려온이제는 고이 쉬는 할아버지는시아고에 활발한 인종선에무지한 백인이 던지는 벽돌에집앞에서 쓰러졌으며이리하여원수를 갚겠다는 미친 아버지마저식칼에 찔리어길바닥에 자빠져버렸다원통함이여색(色) 있는 슬픔이여웃집에선 여인마저 까귀에 찍혔다탄환은 사정없이 가슴패기를 뚫으는구나하수도에 떠가는 검은 송장들멀리 흑노가 닦아논오구라하마에 가모라이나 테기사쓰에지주는 이들의 몸뚱아리에 못을 치고는나무에 불을 지피는……며칠이 지난 뒤 살육은 끄쳤다그러나또다시 뒤끓는 백인의 폭도들언제나 인종선은 끝맺는 것이냐쫀슨이여홀어머니의 자식이여, 그렇다인종선은 늬 곳에만 있는 줄 아느냐동... -
K방산이 위협하는 것
자주국방은 대한민국 국방부의 건군(建軍) 이념이다. 자주국방은 분단과 한·미 동맹이 상수였던 한국 현대사를 상징한다. 남한 사회의 성장에 따라 “~로부터의 자주”가 바뀌었을 뿐이다. 북한에 비해 경제적·군사적으로 열세였던 1970년대의 자주국방은 ‘북한으로부터’ 자주국방(self-reliance defense)을 의미했고, 2000년대에는 전시작전통제권 환수 등 ‘미국으로부터’ 자주국방을 추구했다. 전자는 박정희 전 대통령, 후자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주요 정책이었다. 이처럼 그간 자주국방론은 주로 북한과 미국이라는 외부를 상정한 담론이었다. 다시 말해 외부에 의존하지 않고 침략에 대비하는 ‘방어용’이라는 이미지가 강했다. 그러나 지구상 어느 국가도 자국의 국방 정책을 ‘침략용’이라고 하지 않는다. 한 해 1000조원의 국방비를 사용하는 미국 국방부 명칭도 ‘DOO(Department of Offence)’가 아니라 DOD(Department of Defence)이다.... -
채 상병 사건과 오키나와 전투
최근 출간된 한겨레 고경태 기자의 저서 <본 헌터(Bone Hunter) - 어느 인류학자의 한국전쟁 유골 추적기>를 읽고 그 여진에서 자유롭지 않은 시간을 보내고 있다. 지은이와 책의 주인공 박선주 충북대 명예교수의 노동과 지적 호기심, 인간에 대한 예의야말로 ‘진정한’ 역사의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전쟁은 전 세계 26개국이 참전한 ‘3차’ 세계대전이자 100만명의 민간인 사상자를 낳은 내전이었다. 그렇다면 그 유해들은 어디에 있을까. 미국은 한국전쟁 당시 전사한 자국군의 시신을 즉시 수습해 본국으로 보냈다. 반면 지난 70여년간 한국 정부는 발굴 개념조차 없거나 색깔론을 운운해왔다. 우리는 전쟁 희생자의 유해 위에 세워진 건물, 도로, 각종 인프라에서 살고 있다. 충남 아산 인근 지역을 주로 다룬 책의 첫 발굴 에피소드 제목은 “여긴 땅 파면 다 시체야”다.‘참전 용사(勇士)’라는 단어는 군인만 전쟁을 치르는 듯한 인상을 준다. 많은 ... -
의정부시의 ‘기지촌’에 대한 인식
2022년 대통령 직속 국가균형발전위원회(위원장 김사열)는 취약지역 개조사업 신규 대상지 68개소를 선정했다. 이른바 ‘새뜰마을’ 사업이다. 새뜰마을 사업의 취지는 빈집·노후주택 정비, 슬레이트 지붕 개량, 상·하수도 정비 등을 통해 생활여건을 개선하고 주민 공동체 활성화를 지원하는 데 있다고 한다. 노인 돌봄과 건강관리 프로그램 등 휴먼 케어(human care)와 주민 역량 강화사업도 포함되어 있다.뜻은 좋아 보인다. 그러나 이 사업이 1970년대 ‘새마을운동의 재현’인지 돌봄 사회가 추구하는 ‘마을 만들기’인지 여부는, 사업 자체가 아니라 추진 과정에서 드러날 것이다. 마을 만들기라면, 국가가 그 대상을 지정하고 지원 내용이 건설사업 위주여서는 안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마을 만들기가 아니라 마을 파괴다. 또한 문화유산이 생활여건 개조사업이라는 명분으로 검토의 여지도 없이 사라질 가능성이 크다.선정 지역 중, 우려를 넘어 문화유산 삭제가 목적으로 보이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