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 대통령은 ‘성군의 꿈’ 접었나

이기수 논설위원
더불어민주당 소속 의원들이 25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2023년 예산안 및 기금운용계획 시정연설에 나서는 윤석열 대통령에게 사과를 촉구하며 ‘침묵 항의’하고 있다. | 국회사진기자단

더불어민주당 소속 의원들이 25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2023년 예산안 및 기금운용계획 시정연설에 나서는 윤석열 대통령에게 사과를 촉구하며 ‘침묵 항의’하고 있다. | 국회사진기자단

2022년 3월10일 새벽, 윤석열 대통령은 대선 승리 직후 “모두 하나가 되자”고 했다. 5월10일 대통령 취임사에선 “자유는 결코 승자독식이 아니다” 했고, 6일 뒤 국회 추경 시정연설에서는 “국정운영 중심은 의회”라며 거야와의 많은 대화를 약속했다. 모두 식언이 됐지만, 대통령이 ‘희망의 나라’와 ‘협치’를 입에 달고 산 봄이었다.

이기수 논설위원

이기수 논설위원

10월25일, 윤 대통령이 예산 시정연설을 하러 다시 찾은 가을 국회는 싸움터였다. 더불어민주당은 본회의장 밖에서, 정의당은 안에서 “이×× 사과하라”고 팻말을 들었다. 여당만 박수치는 휑한 연설에 이목이 쏠릴 리 만무했다. 파국이었다. ‘대장동 특검’은 국회에 넘기더라도, 대화 물꼬를 트기 위해서라도, 적어도 욕설엔 대통령이 야당과 국민에게 사과했어야 하지 않을까. 대통령은 “사과할 일 하지 않았다”고 버텼다. 용산으로 돌아가는 길, 5월과 10월의 대통령은 너무 멀고 다르게 백미러에 비쳤을 게다.

누구 탓할 것도 없다. 대선 치른 해, 이렇게 빨리 정치를 황폐화시킨 대통령은 없다. 유례없이 빠른 친윤·비윤 싸움은 그의 ‘내부총질’ ‘체리따봉’ 문자로 촉발됐다. 내분하는 여당과 수사받는 야당이 국정을 마주한 기억이 언제였던가. 이재명 민주당 대표가 제안한 영수회담은 검찰의 소환 통보로 묻혔고, “적당한 시기” 보자던 대통령 말은 함흥차사가 됐다. 대통령은 “문재인은 김일성주의자”라는 김문수 경사노위 위원장 발언을 눈감았고, 직접 “종북 주사파들과는 협치할 수 없다”고 야당을 자극했다. 사정정국(노무현 전 대통령 수사)과 색깔 공세(촛불 배후 종북론)로 보수를 결집시키고 지지율 추락을 버티려 한 MB(이명박)의 복사판이다. 모호한 ‘자유 스피치’를 빼면, 대통령이 만들려는 나라는 뭔지 아직도 보이지 않는다. 대선 때 ‘보수 대통령’을 외치고, 집권 후 ‘국민 모두의 대통령’을 내걸고, 다시 ‘보수 대통령’으로 회귀한 꼴이다.

이 난세의 정곡을 홍준표 대구시장이 찔렀다. “검사 곤조(근성)를 빼야 제대로 된 정치인으로 대성할 수 있다.” 한번 물면 놓지 않고 당하면 잊지 않고 반드시 되갚아주는 검사처럼, 정치를 선악의 눈으로만 바라보지 말라는 뜻이다. 초·재선 때 ‘DJ(김대중) 저격수’로 불린 홍 시장은 그 곤조를 빼는 데 8년이 걸렸다고 했다. 선봉에 선 ‘야당 공격수’ 한동훈 법무장관을 겨눈 듯한 이 말은 ‘검사 윤석열’과 ‘정치인 윤석열’과 ‘대통령 윤석열’이 달라야 한다는 말로도 확장된다. “정치에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제자 자공의 물음에 ‘민신’(民信·백성의 신뢰), ‘족식’(足食·충분히 먹는 것), ‘족병’(足兵·충분한 군대) 순서로 답한 공자의 성군론보다도 윤 대통령에겐 맞춤형 쓴소리일 수 있다.

닷새 전에도, 대통령 국정지지율은 한국갤럽 조사에서 27%로 찍혔다. 2주째 1%포인트씩 뒷걸음쳤고, 5주째 24~29%를 오가고 있다. 2040은 14~17%, 중도층은 18%까지 빠졌다. 안보위기나 사정정국 때 지지율이 반등하던 전례도 윤 대통령에겐 일어나지 않았다. 대통령이 못한다는 이유 1위가 집권 초 ‘인사’에서 ‘외교’로 바뀌었을 뿐, 2~3위는 줄곧 ‘경험·자질 부족과 무능’ ‘경제·민생 살피지 않음’이다. 비속어 참사 후 대통령에 등돌린 민심이 한 달째 요지부동인 셈이다. 숫자는 말한다. 대통령이 사과하고, 대통령이 바뀌라고….

볼수록 날카롭다. 고등학생이 그린 카툰 ‘윤석열차’는 기관차에 김건희 여사, 객차엔 검사들만 타고 있다. 국정원·감사원·경찰·공정위·국세청이 넘긴 사건까지 다 좌지우지하는 검찰 위세는 하늘 향해 치켜든 칼로 묘사됐다. 한동훈 법무장관도 법복 입은 한 명이 자신과 닮았다고 웃어버린 검사들이다. 컬러는 열차에만 입혀졌고, 혼비백산해 피하는 노인·여성·청년·군인은 흑백으로 터치됐다. 네 사람은 흔들리는 민생과 여권(女權)과 평화로도 보인다. 홀로 기세등등한 저 열차는 언제까지 질주할까. 윤 대통령은 다가올 총선에서도 집권당의 얼굴이 될 수 있을까. 여당에선 벌써 한 장관을 출마시키고 선대위 얼굴로 삼자는 말도 나온다. 모든 게 검찰공화국의 지지율에 달렸다.

척박하게 갈라진 정치에 다시 봄이 올까. 그 봄은 민생이고, 내년 봄 재·보선과 내후년 봄 총선의 기울기도 민생이 가를 것이다. 예산과 법의 방향을 정하고 세상의 목마름을 더는 ‘민생의 시간’이 열려야 한다. 그 마스터키를 쥔 국정의 최고·무한 책임자, 대통령이 움직이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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