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닥에 등을 대고 잠드는 동물은 아마 인간밖에 없을 것이다. 뭔가 믿는 구석이 있어서다. 지붕처럼 가림막이 있어 이슬을 가리고 옆에 같이 누운 부모가 있지 않고서야 함부로 배를 내놓고 잠들 수는 없는 일이다. 코끼리처럼 대형 동물일지라도 주변을 살펴 서서 잠이 들고 가끔 누워 잔다. 그렇다 해도 오래 자는 일은 드물다.
바다에서 태어나 죽을 때까지 그곳을 벗어나지 않는 고래는 어떨까? 2008년 ‘최신 생물학’에는 향유고래 대여섯 마리가 약 15m 깊이의 바다에서 마치 몇 개의 선돌처럼 서서 자는 모습의 사진이 실렸다. 야생에서 대형 동물의 행동을 관찰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특히 똥이나 오줌을 누는 모습은 더욱 그렇다.
2019년 호주 서해안에서 세 시간 떨어진 관측소에서 이언 위스와 로드니 피터슨은 드론을 띄워 대왕고래가 똥을 누는 모습을 포착했다. 고래 몸길이보다 더 길고 아기똥보다 더 샛노란 똥 무더기가 제트기 비행운처럼 퍼져나가는 모습은 그 자체로 장관이었다. 피터슨은 탁구공 크기의 빵부스러기 같은 물체에서 개똥 냄새가 났다고 느낌을 털어놓았다. 지구에서 가장 큰 동물인 고래의 똥은 그저 그런 구경거리에 그치지는 않는다. 똥무더기가 바닷물에 풀어지면서 커다란 생태계를 이루기 때문이다. 대왕고래의 대장이 한번 수축하는 동안 내놓는 200ℓ의 대변은 고래의 움직임과 파도를 따라 주변으로 널리 깊이 퍼진다. 여기에는 철과 질소, 인이 풍부해서 크릴새우와 작은 물고기들이 맛난 성찬을 즐긴다. 한몫 차지한 식물성 플랑크톤도 대기의 이산화탄소를 탄수화물로 바꾼다.
이들을 먹잇감 삼아 몸집을 키운 연어는 강으로 돌아와 알을 낳고 죽어 육상에 몸을 의탁한다. 새들은 바위섬에 똥을 싸고 영양소 순환에 기꺼이 참여한다. 다 큰 코끼리는 하루 약 100㎏의 똥을 싼다. 일 년이면 거의 40t에 이른다. 어마어마한 양이다. 이들 똥은 말똥구리의 영양소이지만 한편 똥에 섞인 식물의 열매는 코끼리의 이동 거리만큼 멀리 퍼져나가 싹을 틔워 한 해에 반경 200리 넘어서까지 영역을 넓힌다. 대형 동물은 큰 데다 움직이는 폭이 넓으므로 그 중요성이 한층 배가된다. 차가운 극지방에서 몸집을 키운 고래는 새끼를 낳으려 적도 지방까지 먼 거리를 여행한다. 이동 중에도 똥 싸는 일을 멈추지 않는다. 고래의 동선을 따라 북극의 탄소가 남쪽으로 이동하는 셈이다. 생태학자들은 이런 현상을 두고 탄소를 ‘펌프’질한다고 표현하면서 코끼리나 고래 같은 대형 동물을 생태계 공학자라고 칭하기도 했다.
이스라엘 와이즈만 연구소 론 밀로는 지구에 사는 동물의 총무게를 탄소로 따지면 2기가톤(Gt)에 이른다고 계산했다. 2018년 데이터다. 그중 고래가 차지하는 비율은 1%가 채 되지 않는 듯싶다. 고래를 마구 잡아들여 한창때보다 고래 개체 수가 80% 이상 줄어든 결과다. 개체 수가 65% 넘게 줄어든 코끼리도 현재 멸종 위기에 직면해 있다. 이처럼 생태계를 꾸미는 대형 동물의 숫자는 점점 줄어드는 상태다.
고래가 죽으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아마 해저 바닥으로 수㎞ 가라앉을 것이다. 가라앉는 동안 살점이 뜯겨나가 다른 어패류의 탄소로 저장되거나 아니면 고스란히 해저 미생물 차지가 될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고래가 오래 간직했던 탄소가 이산화탄소 온실가스로 바뀌어 대기 중으로 합류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동물은 살아 있는 동안은 탄소를 저장하는 매개체다. 100년을 살면 그 시간만큼 동물의 몸에 저장된 탄소는 이산화탄소로 바뀌지 않는다. 평균 수명이 80년인 인간은 80년짜리 ‘태우지 않은 석탄’이다. 코끼리는 2t, 대왕고래는 약 100t의 탄소를 몸에 두른 채 살아간다. 문제는 죽어서다. 바다 밑으로 가라앉은 고래 몸뚱어리는 오래도록 공기 중으로 되돌아오지 못한다. 코끼리의 사체도 자연의 순환에 고스란히 온몸을 맡긴다. 살아서는 탄소의 저장소로, 죽어서는 동식물과 세균의 몸속을 돌면서 윤회를 거듭한다.
인간은 어떤가? 옛날에는 바람에 시신을 맡겨 독수리의 살점이 되든 칠성판에서 소나무 뿌리를 타고 오르는 영양분 신세가 되든 했을 것이다. 요즘은 대개 태운다. 용광로에서 몸을 태워 대기 중에 빠르게 이산화탄소를 보태는 일이 화장(火葬)의 본질이다. 최근 미국의 다섯 개 주에서는 인간의 시신을 나무 조각이나 짚과 섞어 퇴비로 만드는 일을 허용했다. 인간의 어떤 행위든 이제는 ‘느림’을 생각할 때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