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지될 때까진 폐지된 게 아니다

정병기 영남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지난 26일 여성가족부가 제3차 양성평등정책 기본계획을 발표했다. 향후 5년 동안 추진할 정책의 방향과 과제를 제시한 것이다. 3대 목표는 ‘함께 일하고 돌보는 환경 조성’ ‘안전과 건강권 증진’ ‘양성평등 기반 확산’으로 노동과 건강을 아우르는 양성평등의 기반을 조성하겠다는 뜻을 담았다. 이를 구체화한 5대 과제도 노동환경과 돌봄 안전망, 성인지적 건강권을 규정했다. 공공부문 여성 대표성 강화와 성별근로공시제 도입 등 주목할 만한 부분도 적지 않다. 공공부문의 여성 관리자 비율이 30%에도 미치지 못하고, 민간부문 상장법인 등기임원 중 여성 비율은 4%대에 불과한 현실을 반영한 것이다.

정병기 영남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정병기 영남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그러나 ‘여성’ 지우기를 우려하는 목소리도 높다. 법률 용어(여성폭력방지기본법)로 확립되어 있는 ‘여성폭력’이란 단어를 찾기 어렵기 때문이다. ‘여성폭력’ 용어가 사용된 경우는 총 62개 대·중·소 과제 중에서 ‘여성폭력에 대한 단속·수사 강화’가 유일하다. 게다가 기존의 유사 명칭에서 사용된 경우에도 ‘여성폭력’을 ‘폭력’으로 바꾸어 ‘여성’을 지웠다.

서민 여성과 노동자 여성에 대한 고려도 부족하다. 성별근로공시제도 기업에 자율적으로 맡기고 있어 실효성에 의문이 제기되지만, 공공부문 대표성 강화와 마찬가지로 고위직이나 상층 여성에 한정된 조치다. 경력단절 예방도 중요한 한 걸음이지만, 성별 임금격차 해소방안에 대한 로드맵은 보이지 않는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다. 2021년 우리나라 성별 임금격차는 약 31%로 OECD 국가 중 가장 크다. ‘임금 격차 원인을 여성 경력단절로만 볼 것이 아니라, 여성 전반의 경제활동 촉진과 성별 임금 격차 해소를 위한 세부 방안이 더 필요하다’는 조언을 귀담아들어야 할 것이다.

‘비동의 간음죄’ 도입의 해프닝은 현 정부의 민낯이다. 비동의 간음죄는 영국, 독일 등에서 도입해 이미 국제표준으로 자리 잡았으며, 20대 국회에서 보수 정당 의원들도 입법을 추진했던 사안이다. 여성가족부가 이를 반영해 도입을 검토하겠다고 발표했다. 그런데 당일 오후 법무부가 “비동의 간음죄 개정 계획이 없다”고 하자, 여성가족부는 곧바로 철회하고 말았다. 이날 저녁 국민의힘 의원들도 이 법안이 오히려 남녀 갈등과 사회 갈등을 조장한다고 법무부의 역성을 들고 나섰다.

‘정부조직법’ 제32조 1항에 따르면 “법무부 장관은 검찰·행형·인권옹호·출입국관리 그 밖에 법무에 관한 사무를 관장한다.” 그리고 대통령령 ‘법무부와 그 소속기관 직제’ 제3조(직무)에 따르면, “법무부는 검찰, 보호처분 및 보안관찰처분의 관리와 집행, 행형, 소년의 보호와 보호 관찰, 갱생 보호, 국가보안사범의 보도, 사면, 인권 옹호, 북한인권기록 관련 자료의 보존·관리, 공증, 송무, 국적의 이탈과 회복, 귀화, 사법시험 및 군법무관임용시험, 법조인양성제도에 관한 연구·개선, 법무에 관한 자료 조사, 대통령·행정 각 부처의 법령에 관한 자문과 민사·상사·형사·행정소송 및 국가배상관계법령의 해석에 관한 사항, 출입국·외국인정책에 관한 사무와 그 밖의 일반 법무 행정에 관한 사무를 관장한다.” 어디를 보아도 법무부가 법안의 내용을 판단해 제·개정 여부를 결정한다는 규정은 없다.

법안의 내용과 제·개정은 의회가 국민의 의사에 따라 판단해 결정한다. 물론 현대사회가 복잡해짐에 따라 정부 부서가 법안을 제출하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정부 각 부처가 전문성을 토대로 필요한 법안을 제시하는 것일 뿐, 최종적 판단과 결정은 의회의 소관이다. 노동부가 노동 관련 법안을 제안하고 문화체육관광부가 문화 관련 법안을 제안하듯이 여성가족부는 여성과 가족에 관한 법안을 제출할 수 있다. 법무부는 각 부처가 필요로 하는 법안의 제·개정이나 집행에 관해 협의하고 지원하는 등의 사무를 관장할 뿐이다. 각 부처의 법안 내용을 자의대로 판단해 제·개정 여부를 결정한다면, 그것은 꼬리가 개를 흔드는 격이다. 법무부가 정치를 좌지우지하는 법무치(法務治) 국가가 아니면, 법이 있어도 정치에서 작동하지 않는 법무치(法無治) 국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윤석열 정부에서 여성가족부는 태생적으로 데드덕이다. 짐을 꾸리는 마당에 계획을 추진할 힘이 생기기 어렵다. 기본계획의 많은 부분이 ‘추진하겠다’가 아니라 ‘검토하겠다’라고 발표된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짐을 꾸리더라도 남은 임기 중에는 책임을 다해야 한다. 필요한 업무라고 판단하면, ‘법무부와 협의해 추진하도록 노력하겠다’라고 말하는 것이 상식 아닌가. 성평등은 이루어지기 전에는 이루어진 게 아니다. 여성가족부도 폐지되기 전에는 폐지된 게 아니다.


Today`s HOT
갱단 무법천지 아이티, 집 떠나는 주민들 폭우로 주민 대피령 내려진 텍사스주 해리슨 튤립 축제 올림픽 앞둔 프랑스 노동절 시위
토네이도로 쑥대밭된 오클라호마 마을 케냐 유명 사파리 관광지 폭우로 침수
페루 버스 계곡 아래로 추락 경찰과 충돌한 이스탄불 노동절 집회 시위대
불타는 해리포터 성 체감 50도, 필리핀 덮친 폭염 인도 카사라, 마른땅 위 우물 마드리드에서 열린 국제 노동자의 날 집회
경향신문 회원을 위한 서비스입니다

경향신문 회원이 되시면 다양하고 풍부한 콘텐츠를 즐기실 수 있습니다.

  • 퀴즈
    풀기
  • 뉴스플리
  • 기사
    응원하기
  • 인스피아
    전문읽기
  • 회원
    혜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