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리터러시 규칙 제1조

장지연 대전대 H-LAC대학 역사문화학전공 교수

역사 공부라고 하면 연표나 사건을 열심히 외우는 것을 상상한다. 혹은 그 시대 사람들의 삶에 지금 나의 감정과 상상을 더하며 한껏 몰입하는 것이 역사책을 잘 읽은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냥 외우고 맘껏 상상하기만으로는 역사를 잘못 이해할 위험이 있다. 글자를 읽는다고 글을 이해했다고 할 수 없는 것처럼 역사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이해를 위한 문해력이 필요한데, 나는 그걸 ‘역사 리터러시’라고 지칭해보려고 한다. 오늘은 그 규칙 제1조 “우리는 옛날 사람들의 생각과 행동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를 이야기해보겠다.

장지연 대전대 H-LAC대학 역사문화학전공 교수

장지연 대전대 H-LAC대학 역사문화학전공 교수

<옷소매 붉은 끝동>은 작년에 꽤 인기를 끈 사극이다. 정조와 후궁인 의빈 성씨 이야기를 그려낸 이 드라마는 특히 여성적 시각이 살아 있다고 호평을 받았다. 공식 소개글에서는 의빈 성씨를 “자신이 선택한 삶을 지키고자 한 궁녀”라고 설명하며, 후궁보다 궁녀로 남길 원한 주체적 여성이었다고 강조했다. 여성 시청자들은 후궁이 된 의빈 성씨가 궁녀 시절 동무들과 즐겁게 어울리던 시절을 회상하는 장면에 호응했다. 답답한 후궁의 삶보다 결혼 안 한 ‘전문직’ 궁녀의 삶이 더 자유로웠을 것이니 그녀의 마음이 이해가 간다고 말이다.

이러한 드라마적 상상은 의빈 성씨가 승은을 받들라는 정조의 명을 두 번이나 거부했다는 역사적 사실에 기반한다. 그녀는 정조가 세손이던 시절, 그리고 15년 후에 다시 명했을 때도 한사코 사양하다 하는 수 없이 명을 따랐다. 감히 지엄한 국왕의 명을 거부하다니! 드라마의 원작자는 이를 자유로운 전문직 궁녀의 삶을 살고 싶은 마음에서 비롯한 것으로 해석했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우선 ‘일하는 비혼 여성의 삶’이 긍정적으로 그려진 것이 얼마 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미혼’ 대신 ‘비혼’이란 말이 대세가 된 것도 5년이 되지 않았다. 그전까지 우리 사회는 결혼하지 않은 성인은 진정한 성인으로 인정하지 않는 분위기였다. 조선시대는 더했다. 혼인한 남녀만이 정상으로 여겨진 사회에서 궁녀란 정상적인 자연의 질서에 어긋나는 존재였다. 그랬기에 그 숫자는 최소화해야 했고 혹여 가뭄 같은 재난이 있으면 궁궐에서 내보내 자연의 조화를 되찾아야 했다. 이런 사회에서 자란 의빈 성씨가 과연 궁녀가 후궁보다 더 좋다고 생각했을까?

좀 더 가능성이 있는 시나리오는 이렇다. 의빈 성씨의 선대 후궁, 특히 중전에게 아들이 없는데 왕손을 낳은 후궁은 그 말로가 대부분 좋지 않았다. 정조의 큰할아버지 경종을 낳은 희빈 장씨는 환국의 소용돌이 속에서 죽임을 당했다.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를 낳은 영빈 이씨는 남편에게 아들을 처분하라는 청을 직접 하고 삼년상이 끝나자 그를 뒤따르기라도 하듯 세상을 떠났다. 의빈 성씨가 후궁이 되기 싫었던 이유는 이런 선대의 사례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녀가 처음 승은을 거절할 때 “내전(훗날의 정조비 효의왕후)이 아직 아이를 낳아 기르지 못했다”며 읍소한 사실이나 자신이 낳은 문효세자를 철저히 왕후의 아들로 키우게 한 것은 이러한 추측을 뒷받침한다.

누군가가 묘사한 역사가 너무 요즘 현실과 닮아서 십분 이해가 간다면 바로 의심해야 한다. 그 묘사는 역사에 충실하기보다는 현재적 문제의식에 충실할 가능성이 높다고 말이다. 이게 바로 역사 리터러시 규칙 제1조의 교훈이다. 사람은 자기 시대와 닮은 옛날이야기에 매혹되기에 전혀 닮지 않은 이야기조차도 자기식으로 멋대로 해석하곤 한다. 이는 재밌는 이야기로는 문제가 없으나, 이것을 역사로 착각해서는 안 된다. 쌍둥이 사이에도 세대 차이가 난다고 우스갯소리를 하는 세상이거늘 그 옛날 사람들의 행동과 사고방식이라면 더 이해가 안 가야 정상이지 않을까? 우리는 그들을 이해할 수 없다. 다만 이해해보려고 노력할 뿐이다. 그 노력이 ‘역사하기’의 첫걸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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