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짜리 진보정치’ 한 사이클이 끝났다

최병천 <좋은 불평등> 저자·신성장경제연구소 소장

2022년 3·9 대선은 1987년 민주화 이후, 역대를 통틀어서도 ‘가장 어젠다가 약한’ 대선이 될 것이라 보았다. 실제로 지난 대선은 탈모약, 쩍벌남, 어퍼컷이 지배했다. 나는 왜 그렇게 예견할 수 있었을까? 그 이유는 ‘20년짜리 한국정치’의 한 사이클이 끝났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최병천 <좋은 불평등> 저자·신성장경제연구소 소장

최병천 <좋은 불평등> 저자·신성장경제연구소 소장

유럽의 정치사도 하나의 사이클이 작동했다. 19세기는 자유방임주의 시대였다. 1929년 대공황과 양차 세계대전을 겪는다. 이후 자유방임주의의 폐해 때문에 복지국가가 만들어진다. 이후 복지국가의 폐해 때문에 신자유주의가 만들어졌다. 신자유주의의 폐해 때문에 제3의 길이 만들어졌다.

한국 진보세력의 이념적·정서적 원형은 1980년대에 만들어졌다. 특히 ‘1980년 광주’가 중요했다. 박정희가 죽으면 군사독재가 끝날 줄 알았다. 그런데 더 극악무도한 놈이 등장했다. 저놈의 정체는 뭘까? 저놈을 어떻게 몰아내야 할까? 민주화운동 세력이 ‘구조적 모순’과 대면하게 되고, ‘사회과학’을 공부하게 되는 계기다. 이념적으로는 급진화된다. 민족주의와 결합된 사회주의를 수용한다. 마침내 1987년 6월 항쟁을 통해 직선제를 쟁취한다. 국내적으로 승리의 기운이 확산될 때, 국제적으로는 사회주의가 붕괴한다. 김영삼 문민정부가 출범한다. 만들어야 할 세상이 사라졌는데, 싸울 대상도 사라진다.

한국 진보세력의 전열 정비는 두 가지 사건을 계기로 이뤄진다. 1997년 외환위기와 2000년 민주노동당 창당이다. 1997년 외환위기를 계기로 ‘신자유주의 반대’라는 이념으로 재무장한다. 신자유주의 반대는 ‘도깨비 방망이’였다. 자본주의 반대도, 정리해고 반대도, 등록금 인상 반대도 ‘신자유주의 반대’ 한 방이면 다 해결됐다.

전열 정비의 다른 축은 민주노동당 창당이다. 1987년 이후 지속된 ‘민중의 독자적 정치세력화’의 산물이었다. 2002년 12월 대선에서 민주노동당 권영길 후보는 “살림살이 좀 나아지셨습니까?”라는 유행어를 남긴다. 노무현과 이회창의 초박빙 선거였음에도 약 100만표를 득표한다. 부유세, 무상의료, 무상교육이라는 정치적 히트상품을 만들어낸다.

현재 한국 정치를 지배하는 ‘무상 시리즈’의 탄생이다. 2004년 총선에서는 “부자에게 세금을, 서민에게 복지를~”이라는 아주 근사한 캐치프레이즈를 내걸고 13.1%의 정당득표율을 기록한다. 10명의 국회의원을 배출하고 원내 3당이 된다. 국민들은 왜 2004년 총선에서 민주노동당에 13.1%(650만표)의 높은 지지율을 보여줬을까? 그것은 한마디로 “유럽식 복지국가에 대한 갈망”이었다.

이후 한국 정치사는 ‘민주노동당 노선의 점진적 수용사(史)’에 다름 아니었다. 노무현 대통령은 ‘종합부동산세는 부동산 버전의 부유세’라는 취지로 발언했다. 2008년에는 글로벌 금융위기가 터졌다. 2009년에는 노무현 대통령이 서거했다. 이를 계기로, 민주당 쪽에서도 ‘유러피안 드림’에 대한 모색이 본격화됐다.

민주노동당 노선(=유럽식 복지국가 노선)은 지속적으로 확대됐다. 2010년 지방선거는 중요한 분기점이었다. 국민의힘(당시 한나라당)에 유리할 수 있는 안보이슈가 터졌다. 천안함 사건이었다. 민주당 계열은 처음해보는 복지이슈로 붙었다. 천안함 이슈와 무상급식(복지이슈)가 정면으로 붙었다. 결과는, 복지이슈(무상급식)의 완승이었다. 민주당은 경남도지사(김두관), 충남도지사(안희정), 강원도지사(이광재) 등을 당선시켰다.

이제, 박근혜 전 대표도 ‘민주노동당 노선’을 수용한다. 2012년 총선과 대선을 앞두고 당 색깔을 빨간색으로 바꿨다. ‘경제민주화’와 ‘복지국가’를 전면에 내걸었다.

실제로 영국 노동당이 내걸었던 “요람에서 무덤까지”를 연상시키는 생애주기별 복지국가를 표방한다. 무상보육과 기초연금을 공약으로 내건다.

문재인 정부 역시 ‘민주노동당 노선’을 공약한다. 소득주도성장론, 최저임금 1만원,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주 52시간제, 탈원전 등이다. 박근혜 정부는 ‘민주노동당 노선의 1기 정부’였고, 문재인 정부는 ‘민주노동당 노선의 2기 정부’였다. 양당이 경쟁적으로 민주노동당 노선을 채택했기에, 정의당은 ‘정치적 차별화’에 실패하게 된다. 오늘날 정의당이 어려워진 근본 이유다.

‘실언의 왕’ 윤석열 대통령의 탄생은 역설적으로 현재 진보 노선이 ‘과도함’을 말해준다. 좋은 것도 과하면 되돌아봐야 한다. ‘20년짜리 진보정치’의 공과(功過)를 평가하고, 우리는 이제 ‘역사의 다음 페이지’로 넘어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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