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의 사법화를 막으려면

유정훈 변호사

인권과 차별 문제의 최전선에 있는 성소수자에 관해 의미있는 법원의 결정들이 최근에 나왔다. 서울서부지방법원은 2월15일 성전환 수술을 하지 않은 트랜스젠더 여성의 성별정정을 허용했다. 대법원이 2020년 ‘성전환자의 성별정정허가신청사건 등 사무처리지침’을 개정하며 수술 여부를 조사사항에서 참고사항으로 변경했음에도 실제 사건에서는 수술 여부를 들어 성별정정 신청을 기각한 사례가 적지 않았는데, 한 걸음 나아간 결정이다.

유정훈 변호사

유정훈 변호사

서울고등법원은 2월21일 동성부부가 배우자의 건강보험 피부양자 자격을 인정해 달라며 국민건강보험공단을 상대로 제기한 소송에서 승소 판결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이성 간의 사실혼 배우자 집단에 대해서는 피부양자 자격을 인정하고 동성부부 집단에 대해 그 자격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성적 지향을 이유로 하는 차별이라 판단했다. 동성부부 건강보험 판결 중 “다수결의 원칙이 지배하는 사회일수록 소수자의 권리에 대한 인식과 이를 보호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이는 인권의 최후의 보루인 법원의 가장 큰 책무”라는 부분이 한참이나 마음에 남았다. 소수자 보호의 책무를 명시한 판결문은 물론 좋았지만, 그보다는 소수자들이 최후의 보루까지 찾아가도록 만든 현실에 대한 짙은 아쉬움 때문이다.

사회적으로 아무리 큰 영향을 미치는 사건이라도, 법원의 판결은 결국 개별 사건에 대한 해결이다. 다른 동성부부는 별도로 소송을 해야 하고, 승소한 동성부부 당사자 역시 “혼인의 천 가지 권리 중 하나”를 인정받았을 뿐이라고 했다. 소수자가 그 수많은 권리들을 인정받기 위해 일일이 소송을 할 수도 없고, 법원에 그런 부담을 전부 지울 수도 없다. 이는 정치의 몫이다. 법원은 “성적 지향을 이유로 한 차별은 국제사회에서 사라져 가고 있고 언젠가 폐지될 것”이라고 판시했는데, 이를 실현하는 것이 바로 정치다. 국회와 행정부가 기본권 보호의 책무를 다하면, 당사자들이 최후의 보루가 되어 주길 기대하며 법원의 문을 두드릴 이유가 없다.

요즘의 정치는 이 역할을 제대로 하지 않는다. 정치의 본질은 이해관계 조정인데, 정치인들은 첨예하게 의견이 갈리는 이슈, 복잡한 이해관계가 얽힌 문제일수록 해결을 회피한다. 권리 구제를 원하는 소수자나 사회 변화를 이끌려는 시민운동은, 노력도 많이 들고 언제 해결에 나설지 기약이 없는 국회가 아니라, 법원을 찾을 수밖에 없다. 정치권 스스로 사건을 들고 법원으로 달려가지 않아도, 국가의 중요한 정책적 결정을 사법부가 판단하는 ‘정치의 사법화’가 시대를 지배하게 된다.

예컨대 한참 전에 폐지되었어야 할 간통죄, 낙태죄는 헌법재판소의 위헌 결정을 받고 나서야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아직도 차별금지법이 제정되지 않고 있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성소수자 인권에 관해 국회에서 이룬 성과는 거의 없다. 성별정정 이슈도 법원의 사무처리지침이 아니라 입법으로 해결을 했으면 당사자들이나 재판부가 엇갈리는 결정으로 혼란을 겪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고 국회가 사법부의 판단을 존중해서 근본적 해결에 나서는 것도 아니다. 낙태죄의 사례를 보면, 헌법재판소가 헌법불합치 결정을 하며 입법부에 법을 개정하라고 제시한 기한 내에 국회가 대체입법을 하지 않아 그 효력을 상실했다. 낙태에 대한 형사처벌 조항이 없어진 것은 문제의 끝이 아니다. 임신중지 수술에 대한 건강보험 적용 대상 여부 및 범위는 대체 어떻게 할 것인가.

법치국가에서 국가의 공권력 행사는 헌법과 법률에 근거하기 때문에, 법적 판단과 무관한 영역은 거의 없다. 이른바 ‘사법자제’가 정치의 사법화에 대한 해결책이 될 수 없는 이유다. 법원은 인용 혹은 기각, 무죄 아니면 유죄로 일도양단의 판단을 하기 때문에, 법원이 엄청난 권한을 행사하며 때로 선을 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런데 법원은 누군가 소송을 제기한 쟁점에 대해서만 판단할 수 있다는 점을 잊지 않아야 한다. 정치의 사법화는 정치가 문제 해결을 하지 않을 때 나타나는 현상이지, 사법부가 남의 영역을 넘보아서 그렇게 된 일이 아니다.

사회의 여러 과제, 특히 정치나 정책의 문제를 소송으로 해결할 수는 없다. 옳음과 옳지 않음, 우리가 나아갈 방향과 그렇지 않은 방향을 위헌 혹은 합헌, 불법 또는 합법 여부에 대한 판단으로 납작하게 만들지 말아야 한다. 법적 판단에 의존하면 정작 필요한 해결 능력을 상실하게 되고, 이미 우리는 그 함정에 빠져 있는지 모르겠다. 사법 엘리트가 매사를 결정하는 것이 싫으면 정치가 할 일을 하면 된다. 사람들이 소송을 들고 법원에 가지 않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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