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폭’에 대해서

이정철 경북대 영남문화연구원 전임연구원

우연이겠지만, ‘학교폭력’ 문제를 다룬 넷플릭스 드라마와 한 유력한 변호사와 그 아들의 과거 학폭 문제가 연일 화제이다. ‘학폭’ 문제가 드라마와 현실에서 동시에 사람들 주목을 받고 있는 것이다. 사회 현상으로서의 학폭이 주는 메시지는 무엇일까? 필자가 중·고등학교를 다니던 한 세대 전에는 오늘날 말하는 학폭이라고 할 만한 것이 거의 없었거나, 극히 적었다. 학폭은 한국에서는 비교적 새로운 사회 현상이다.

이정철 경북대 영남문화연구원 전임연구원

이정철 경북대 영남문화연구원 전임연구원

고대 그리스에서는 세상이 ‘원자’나 ‘수’로 이루어졌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조선 시대 사람들은 전혀 다른 답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세상이 ‘인간관계’로 이루어졌다고 믿었다. 세상을 구성하는 것은 3강5륜이라고 생각했다. 5륜의 인간관계는 부모와 자식, 임금과 신하, 남편과 아내, 어른과 아이, 친구 사이를 말한다. 3강은 5륜 중에서 임금과 신하, 부모와 자식, 남편과 부인의 관계를 더 강조한다. 3강(綱)의 ‘강’은 ‘벼리’를 뜻하는데, 국어사전에 “그물코를 꿴 굵은 줄” “일이나 글의 뼈대가 되는 줄거리”라고 나온다. 세상이 원자로 이루어졌다고 믿은 것과 인간관계로 이루어졌다고 믿은 것 중 어느 한쪽만 맞고 틀린 게 아니다. 다만 그렇게 말했던 사람들의 삶과 그들이 살았던 사회의 차이를 반영한다.

조선 시대 전체를 통틀어 가장 많이 그리고 지속적으로 간행하고 배포된 책은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와 그것의 수정증보판이다. <삼강행실도>란 3강에 모범이 될 만한 일화를 요약 소개하고 그림을 덧붙여 펴낸 책이다. 서양 중세시대에 사람들의 신앙심을 높이려고 성당 그림이 발달한 것과 다르지 않다. <삼강행실도>가 처음 간행된 것은 1433년(세종 15년)이다. 이런 책의 필요성을 처음 말하고, 그 간행을 지시하고, 그 이름까지 지은 이가 바로 세종이다. 세종은 무슨 생각으로 이런 책을 펴냈고, 또 조선의 왕들은 무슨 생각으로 이 책을 수정증보하여 반복적으로 간행했을까? 세종은 이 책을 펴내며 말했다. “이것은 비록 폐단을 구제하는 데 급선무는 아니지만, (백성을) 교화하는 데에는 실로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이다.” 후일 정조는 <오륜행실도>를 펴내며 세종의 말을 해설이라도 하듯 말했다. “정치는 조정을 보아야 하고 풍속은 민간을 보아야 한다. 정치가 미치는 것은 얕지만 풍속에서 얻는 바는 깊다. 이 때문에 나라를 잘 살필 줄 아는 자는 반드시 민간을 먼저 보고 난 다음에 조정을 보는 것이다. (중략) <삼강행실도>와 <이륜행실도> 같은 책은 정치를 돕고 세상을 격려하는 도구로서 <소학>과 함께 버릴 수 없는 책이므로, 하나로 정리하여 <오륜행실도>라고 이름 지었다.” 조선의 왕들은 자신이 정치 권력의 중심이었지만 사회에 더 근본적인 영향을 주는 것은 사람들의 윤리적 태도임을 이해했다.

조선 시대의 윤리를 지금 되살리자고 주장한다면 시대착오적이다. 하지만 그 시대가 우리에게 무엇을 남겼는지 살펴보는 것은 무익하지 않다. 유학이 내세운 목표는 지식과 기술을 쌓아서 ‘자리’나 직업을 얻는 것이 아니라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이었다. 좋은 사람이란 인간관계에서 자기 역할에 충실한 사람을 뜻했다. 그 역할에 친구 관계가 포함되었다. 물론 어느 시대나 공교육이 개인의 욕망을 모두 통제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교육은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미친다. 한 세대 전 어린아이들의 장래 희망에 대한 모범 답안은 ‘훌륭한 사람’이 되는 것이었다. 되돌아보면 그것은 조선이 남긴 희미한 영향이다.

이제 아이들은 ‘훌륭한 사람’이 되는 것을 장래 목표로 더는 말하지 않는다. 조선이 오랜 시간 열심히 채웠던 공동체의 윤리적 잔고가 거의 소진된 느낌이다. 어찌해야 할까? 분명한 것은 그 잔고가 사회적 신뢰(Trust)의 연료라는 점이다. 신뢰나 신용(Credit)은 경제 용어이기도 하며, 그것 없는 사회에서는 살기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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