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시간, 나홀로 역주행

송지원 영국 에든버러대 교수

최근 정부가 발표한 ‘주 69시간 노동 유연화’는 단단히 꼬인 실타래 같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알기 어렵고, 다른 국가들이 추진해온 노동시간 유연화 정책 방향과는 사뭇 달라 정부의 해명을 들을수록 혼란스럽기만 하다.

송지원 영국 에든버러대 교수

송지원 영국 에든버러대 교수

유럽에서 노동시간 유연화는 오래전부터 논의되어왔고 대부분 노동시간을 늘리는 것이 아닌 단축시키는 데 방점을 두고 도입되었다. 특히 20세기 후반을 지나면서 대량생산체제 기반 산업구조가 서비스화, 디지털화 등으로 재편되었고, 이는 장시간 노동과 높은 노동생산성이라는 오랜 신화를 무너뜨리는 출발점이 되었다. 뒤이어 장시간 노동이 노동자의 건강 상태를 악화시키고, 산재 발생 확률을 높이며, 직업 만족도, 직무 몰입, 일·생활 균형에도 악영향을 끼친다는 연구가 다수 발표되었다.

2021년 세계보건기구(WHO)와 국제노동기구(ILO)가 발표한 연구는 주 55시간 이상의 장시간 노동이 약 74만5000명의 노동자를 뇌졸중과 심장질환으로 사망하게 만들었다고 주장하며 장시간 노동의 위험성을 경고한 바 있다. 이러한 문제의식 아래 유럽 국가들은 노동시간을 유연화해 노동시간 단축을 도모하는 정책을 도입해왔다. 독일·네덜란드·스웨덴 등에서는 일찍이 단축근로제가 도입되었으며, 단축근로제는 일·생활 균형 향상, 여성의 노동시장 참여율 증대, 일자리 창출 등 긍정적인 효과를 가져왔다. 최근 아이슬란드·영국·벨기에·스페인 등 다수 국가가 시행한 주 4일제 실험도 노동시간 유연화 정책의 연장선에서 이해할 수 있다.

최근 영국 레딩대학에서 발표한 주 4일제의 영향에 대한 연구에 따르면, 기업과 노동자 모두 주 4일제로 인한 노동시간 감소에 높은 만족도를 보였다. 노동자들은 전반적인 삶의 질 향상(64%)과 직장 내 스트레스 감소(78%)를 긍정적인 영향으로 꼽았고, 기업들은 인재 유지와 채용에 도움(68%)이 되었다고 밝혔다. 영국에서는 실험에 참여한 61개 기업 중 56곳이 주 4일제에 만족하며, 현 제도를 연장하기로 결정했다. 이처럼 유럽 국가들의 노동시간 유연화는 노동시간 단축과 이로 인한 사회적 비용 절감이 주목적이었다.

정부의 ‘주 69시간 노동시간 유연화’는 이런 추세에 역행하는 정책이다. 정부는 노동시간과 관련한 나쁜 관행을 없애고, 노동시간을 줄이려는 노력 없이 숫자로만 노동시간 유연화를 설명했다. 애초부터 정부가 앞장서 ‘주 69시간’이란 숫자나 연장 압축 노동 후 장기 휴가 같은 꿈같은 이야기를 내세울 것이 아니라 노동시간을 노사 자율에 따라 유연하게 변경하고 활용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연구자들 사이에선 한국 노동시장 정책을 누더기 정책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당시의 상황 또는 정부의 정책 방향에 따라 해외 우수 사례를 참고해 누더기와 같이 덧댄 흔적이 보이기 때문이다. 노동시간 정책도 마찬가지였다.

오랜 기간 형성된 한국 고유의 제도적 토양으로 인해 노동시간 새판 짜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이번 논란으로 정부가 사회적 파트너들의 이야기를 듣겠다는 입장을 드러냈으니, 정부는 말로만 노사에 노동시간 결정권을 맡긴다고 할 것이 아니라, 한발 물러서 노사가 자유롭게 대화할 수 있는 공간을 제공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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