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노동시간을 줄여가는가

김만권 경희대 학술연구교수·정치철학자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이라도
생명까지도 위협할 선택이라면
정부는 이를 방지할 의무가 있다

진정한 노동개혁은
얼마나가 아닌 어떻게에 달렸다

덴마크의 인류학자 데니스 뇌르마르크와 철학자 아네르스 포그 옌센은 <가짜 노동>에서 우리가 의미 없이 일하는 시간을 줄인다면 주당 15시간 노동을 이룰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인류학자 데이비드 그레이버 역시 <불쉿 잡>에서 기술의 발전 측면을 고려한다면 충분히 15시간 노동을 실현할 수 있다고 본다.

김만권 경희대 학술연구교수·정치철학자

김만권 경희대 학술연구교수·정치철학자

누군가는 이런 말들을 두고 꿈같은 이야기라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에 근접한 노동을 하는 사례도 있다. 독일의 금속노조가 그렇다. 독일 금속노조는 1990년대에 이미 주당 35시간만 일했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2018년엔 주당 28시간 노동을 달성했다. 만약 노동자들 자신이 원한다면 주당 40시간까지 일할 수 있다.

우리 대다수에게 꿈만 같은 28시간 노동시간을 달성할 때, 노동자들이 제기한 문제 제기도 놀랍다. 노동자들은 물었다. ‘노동자들이 만든 이윤은 누가 가져가는가?’ 노동자들은 알고 있었다. ‘명백히 기업이 막대한 이윤을 남기고 있다. 기업 주가는 상승하고 관리하는 사람들의 임금도 올랐다. 그런데 왜 우리의 임금은 정체되고 왜 더 일하고 있는가?’ 실제 노동자들은 노동시간 단축뿐만 아니라 임금 인상까지 요구했다.

이런 독일 금속노조의 노동시간 사례는 예외적인 것에 해당할지도 모른다. 현재의 예외적 사례를 지향해야 할 목표로 삼을 수는 있어도 일반화시키는 오류를 범해서도 안 된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따르면 2021년 기준으로 한국의 노동시간은 연간 1915시간이다. OECD 평균 근로시간은 1716시간으로, 우리 노동자들이 한 해 평균 199시간 더 일하고 있다. 하루 8시간 노동기준으로 거의 25일을 더 일하는 셈이다. 순위로 보면 한국은 38개 회원국 중 다섯 번째로 길게 일하는 국가다.

하지만 OECD가 내놓은 통계에 따르면, 2021년 시간당 노동생산성은 시간당 42.7달러로 29위에 불과하다. OECD 평균인 55.8달러에 미치지 못했다.

노동시간은 긴 데 반해 생산성은 높지 않은 것이다. 가톨릭대와 서울대 연구팀이 협력해 2021년 2월 국제학술지인 ‘직업건강저널’에 실은 연구결과를 보면 그 이유를 추측해 볼 수 있는데, 주당 근로시간이 증가할수록 근로자의 건강상태를 악화시켜 노동생산성도 저하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장시간 노동이 생산성에 영향을 미친다고 하더라도 이렇게까지 노동시간에 난리를 부리느냐고 할 수도 있겠다. 개인 선택의 문제이니 일하고 싶은 사람들은 더 일하게 하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내버려 두면 되는 것 아니냐고 말이다. 하지만 장시간 노동은 건강뿐 아니라 생명까지 위협한다. 2021년 세계보건기구(WHO)와 국제노동기구(ILO)가 협력해 내놓은 장기간 노동에 따른 전 세계 인구의 인명 피해 연구결과를 보면, 주 55시간 이상 일한 노동자들이 35∼40시간 일한 노동자보다 심장질환 및 뇌졸중으로 사망할 위험이 각각 17%, 35% 높았다.

더하여 인간의 생체리듬과 어긋난 불규칙한 노동도 마찬가지다. 의학계에서는 이전과 비교해 갑자기 늘어난 근무시간뿐 아니라 교대근무와 야간근무도 인간의 생체리듬과 어긋나 건강을 해한다고 보고 있다. 사망률이 높아질 뿐 아니라 불안장애까지 급격히 상승한다는 연구들이 한국에서도 이미 나와 해외의 공신력 있는 저널에 실려 있다.

만약 장시간 노동과 불규칙한 노동이 합쳐져 정부가 주장하는 대로 69시간까지 ‘불규칙한 장시간 노동’이 이루어진다면 어떻게 될까? ‘일할 때 몰아서 일하고 놀 때 몰아서 놀자’는 말은 듣기엔 좋다. 하지만 의학적으로 볼 땐 건강과 생명을 해하는 결과를 낳는다.

2018년 노동부가 정한 뇌·심혈관계 질병으로 산업재해 인정을 받을 수 있는 기준은 52시간이다. 지금 정부가 주장하는 69시간은 제도 그 자체로도 모순이다. 정부는 아무리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생명까지도 위협할 수 있는 것이라면 이를 방지할 의무가 있다. 국제적으로 노동시간에 제한을 거는 중요한 이유다.

정부 주장과 달리 장시간 노동을 원치 않는 건 노동자도 마찬가지다. 지난 3월19일 국책기관인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내놓은 ‘2022년 전국 일·생활 균형 실태조사’를 보면 우리 노동자들이 원하는 평균 노동시간은 주 36.7시간이었다. 그중 20대(19∼29세)는 34.97시간을, 30대는 36.32시간을 원했다.

이런 사실에 근거해 생각해보면, 진정한 노동개혁은 얼마나 더 일하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더 의미 있게 일하느냐에 달린 것이 아닐까?


Today`s HOT
UCLA 캠퍼스 쓰레기 치우는 인부들 호주 시드니 대학교 이-팔 맞불 시위 갱단 무법천지 아이티, 집 떠나는 주민들 폭우로 주민 대피령 내려진 텍사스주
불타는 해리포터 성 해리슨 튤립 축제
체감 50도, 필리핀 덮친 폭염 올림픽 앞둔 프랑스 노동절 시위
인도 카사라, 마른땅 위 우물 마드리드에서 열린 국제 노동자의 날 집회 경찰과 충돌한 이스탄불 노동절 집회 시위대 케냐 유명 사파리 관광지 폭우로 침수
경향신문 회원을 위한 서비스입니다

경향신문 회원이 되시면 다양하고 풍부한 콘텐츠를 즐기실 수 있습니다.

  • 퀴즈
    풀기
  • 뉴스플리
  • 기사
    응원하기
  • 인스피아
    전문읽기
  • 회원
    혜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