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력주의가 도덕주의가 될 때

김만권 경희대 학술연구교수·정치철학자

시험 잘 보는 아이가 성실한 아이니
착한 아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면
그 착각에서 깨어나야 한다

우리가 칭찬한 능력 있는 아이들이
세상을 망치는 주범일 수도 있다

우리 모두 안다. ‘능력이 뛰어나다는 것’과 ‘인성이 좋다는 것’이 전혀 다른 문제라는 것을. 하지만 대다수 우리는 이 평범한 사실을 종종 잊어먹는다. 왜 우리는 이 평범한 사실을 잊어버리는 걸까? 능력주의에 대한 숭배는 종종 그 원인이 되기도 한다.

김만권 경희대 학술연구교수·정치철학자

김만권 경희대 학술연구교수·정치철학자

능력주의라는 용어를 만든 이는 영국의 사회학자 마이클 영이다. 2034년이란 미래사회를 배경으로 한 소설 <능력주의의 부상>(1958)에서 처음 이 용어를 썼다. 영은 능력(merit)이 지능(IQ)과 노력(effort)으로 이루어진다고 말한다. 이 둘 중 노력은 능력주의 사회에서 성공하는 대다수에게 필수적인 ‘기본값’이다.

노력이 기본값이기에 성공의 여부를 가르는 실질적 요인은 ‘지능’이다. 이런 이유로 영이 그리고 있는 미래사회에선 5년마다 ‘지능’을 측정하는 시험을 누구나 볼 수 있다. 쉽게 말해, ‘노력’과 ‘재능’ 중 제한된 기회로 진입해 성공을 거두는 데 더 중요한 요인은 ‘재능’이다.

하지만 현실에서 능력주의는 전혀 다르게 드러난다. 능력주의 사회에서 성공한 대다수는 그 이유를 댈 때 ‘재능’ 대신 자신이 열심히 ‘노력’했다고 말한다. 실제 성공한 대다수는 자신의 성공이 노력 때문이었다고 말하고 싶어한다. 이런 이유로 소수자 우대정책으로 성공한 이들이 이 정책의 폐지에 가장 적극적 세력이 되기도 한다. 미국의 정치인 워드 코널리가 대표적 사례다.

이런 인간의 성향과 조응하는 능력주의는 현실에서 ‘노력주의’로 변모하는 경향이 있다. 능력주의 사회에서 누군가 실패했다면 그 이유는 충분히 노력하지 않았거나 게으름이란 악덕의 늪에 빠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능력주의는 ‘노력한 자들만이 자격이 있다’는 일종의 도덕주의로 변신한다. 특히 우리나라처럼 공부를 잘하는 것이 부모의 자랑이 되는 사회라면 능력주의는 도덕주의로 변모하기 더욱 쉽다. 부모의 자랑이 되는 자식만큼 ‘착한’ 자식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 이처럼 공부 잘하는 아이는 성실한 아이고, 그 성실한 아이가 착한 자식으로 성공하는 가장 전형적인 방식이 ‘고시’ 합격이다. 문제는 이 공부 잘하는 성실하고 착한 자식들이, 고시에 합격했다는 이유로 자신이 누리는 권력을 당연한 것으로 여길 뿐만 아니라 때로는 남용하는 존재가 된다는 것이다.

박권일은 <한국의 능력주의>에서 한국형 능력주의의 특징을 ‘시험을 통한 지대추구’로 정의한다. 난도 높은 시험을 한 번 통과하면 평생 특권을 누린다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특히 사법) 고시 합격자들에 주목한다. 1956년에 창간된 ‘고시계’라는 잡지에 실린 방대한 합격기를 탐구한 박권일은, 고시 합격자 대다수가 학교 외에 다른 사회적 경험이 전혀 없이 고시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인간을 우열화하는 관점과 선민의식을 자연스럽게 내면화”한다고 지적한다.

이에 더해 이들 대다수가 “내가 열심히 해서 고시에 합격했으니 마음대로 그 권력을 행사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경향을 갖고 있어 “거의 필연적으로, 평범한 국민들을 무시하고 민주주의를 냉소하는 엘리트가 양산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박권일의 표현을 그대로 옮기자면, 우리나라에서 고시란 “과소한 민주주의 교육이 과도한 능력주의 신화와 결합할 때 어떤 ‘괴물’이 만들어지는지를 보여준 거대한 사회실험”이다. 지금 (특히 사법) 고시 출신의 권력 엘리트들의 대다수가 권위주의 시대에 청소년기를 보냈다는 점에서 이런 주장은 더욱 설득력이 있다.

아들의 학폭 사태로 취임 하루 전 국가수사본부장에서 물러난 정순신은 박권일의 주장과 일치하는 전형적 사례다. “검사라는 직업은 다 뇌물받고 하는 직업이다” “판사랑 친하면 재판에서 무조건 승소한다”는 아들의 발언은 ‘검사’ 출신 아버지를 통해 배운 한국형 능력주의 세상의 단면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이뿐만 아니다. 능력주의자 아버지는 아들에게 반성하는 마음과 태도 대신, 1년여에 걸친 소송전을 통해 피해자를 어떻게 법으로 마지막까지 몰아붙일 수 있는지 가르쳤다. 그사이 가해자인 아들은 서울대에 진학하고 피해자는 졸업 이듬해까지 대학에 진학하지 못하거나 자퇴 후 해외로 나간 것으로 알려졌다.

아주 잠시라도 시험 잘 보는 아이가 성실한 아이니까 착한 아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면, 그 착각에서 깨어나야 한다. 능력주의를 불신하라는 말이 아니다. 능력주의를 도덕주의로 착각하지 말란 말이다. 현실에선 우리가 착하다고 칭찬해 왔던 그 능력 있는 아이들이 세상을 망치는 주범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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