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의 망령은 꺼져라

얼마 전 30세 전에 아이 셋을 낳으면 군을 면제해주겠다는 논의 때문에 세상이 시끌시끌했다. “이제 남자도 아이를 낳을 수 있게 된 줄 몰랐다”는 재치 있는 비꼼부터 “돈 많은 집이나 가능할 것”이라거나 “군 면제 받겠다고 아이를 입양했다가 파양하는 사건이 생길 것”이라는 전망까지 나왔다. 이미 부모의 경제력이 자녀의 결혼에 유의미하게 영향을 미친다는 연구도 나오고, 아파트 한 채 분양받아보겠다고 아이를 입양했다가 파양하는 사건도 있는 나라에서 모두 생길 법한 일이다. 그런데 그런 비관적 전망을 떠나 나는 이 아이디어가 섬뜩했다. 20세기 전반 군국주의와 전체주의의 망령이 휩쓸던 때의 사고방식을 연상시켰기 때문이다.

장지연 대전대 혜화리버럴아츠칼리지 역사문화학전공 교수

장지연 대전대 혜화리버럴아츠칼리지 역사문화학전공 교수

20세기 전반, 젊은 남성은 전쟁터에 나가는 군인으로 규정되었다. 여성은 어머니로서 아들이 전장에서 ‘멸사봉공’하더라도 담대하게 행동할 것이 요구되었고, 아내로서는 “낳아라 불려라, 국가를 위하여!”라는 슬로건 아래 최대한 많이 아이 낳기를 장려 ‘당했다’. 그리고 미혼의 여성은 전쟁터의 군인을 ‘위안’하기 위해 보내졌다. 인권은 아랑곳하지 않고 국가를 위해 복무하는 존재로 사람을 규정하는 전체주의 사회에서 남성은 군인으로, 여성은 성과 출산으로 묶어 임무를 부여한 것이다. ‘서른 이하 아이 셋=군 면제’라는 발상 역시 이 틀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는 것, 이것이 바로 내가 섬뜩함을 느낀 지점이었다.

일하는 시간 논란도 마찬가지 맥락에서 섬뜩했다. 처음엔 일주일 120시간씩 일할 자유를 운운하더니 진지하게 검토하고 나서는 69시간이라는 방안이 나왔다. 그러다 법정 과로사 기준 시간을 넘긴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는지 슬쩍 9시간을 깎았다. 이만큼 깎아도 6일 동안 하루 10시간씩 근무해야 하는데, 이렇게 일할 “자유”도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가 들렸다. 1시간 점심시간까지 더하면 11시간을 일터에 붙잡혀 있어야 하는데 말이다. 일하는 사람들 대부분은 다르게 일할 수 있는 자유가 없다는 점, ‘이렇게 일 시킬 자유와 권력’이 누군가에게 너무 과도했기에 이를 규제해온 것이 산업혁명 이후 지금에 이르는 흐름이라는 점 등은 무시당했다.

‘오래 일할 자유’를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강제’의 범위를 매우 협소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질질 끌고 와 족쇄라도 채워 가둬놓고 일하는 정도가 되어야 ‘강제적인 상황’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강제징용에 대해서도 ‘강제’도 아니고 ‘징용’도 아니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다. 강제의 범위를 이렇게 협소하게 생각하니, 다른 사람을 착취하는 데 거침이 없어진다. 월급 100만원에 값싼 외국인 가사도우미를 쓰자는 발상은 그러한 착취적 태도의 연장이다. 그 외국인은 (자국의 어려운 경제 형편 때문에) 싼값에라도 ‘기꺼이’ 노동을 제공할 것이니 우리가 그렇게 써도 된다고 생각한다. 한발 더 나아가 그렇게라도 써주는 우리 덕분에 그들이 이익을 보고 있다는 시혜적 태도까지 갖게 되기도 한다. 이런 발상에는 50년, 100년 전에 우리가 바로 그 외국인 처지였다는 역사적 통찰도, 보편적 인권에 대한 감수성도 존재하지 않는다.

작금의 논란은 참담하다. 이 발상은 백년은 족히 된 전체주의적 사고요, 지극히 착취적이며 퇴행적인 사고다. 우리가 역사의식을 이야기하는 것은 이러한 퇴행성을 눈치채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사람들이 누구에게 공감하며 연대하는지를 묻는 것이기도 하다. 아픈 과거 속에 큰 피해를 입은 이들에게 공감하며 연대의식을 느끼는 것은 그들이 단지 ‘우리’ 민족의 과거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이들은 현재와 미래의 우리거나 다른 민족이기도 하며, 인간 보편이 누려야 할 삶의 모습을 일깨워주는 존재기도 하다. 그러기에 ‘역사의식’을 지닌 우리는 질문한다. “모든 인간은 행복할 권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에 동의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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