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을 더 이상 ‘식민지’로 묶어 두지 말라

[강준만의 화이부동] 지방을 더 이상 ‘식민지’로 묶어 두지 말라

“원정대의 지휘권을 평범한 능력을 가진 한 사람에게 맡기는 것이 가장 출중한 두 사람에게 반씩 나누어 맡기는 것보다 더 낫다.”

강준만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명예교수

강준만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명예교수

500년 전 마키아벨리가 한 말이다. 이후 상식처럼 통용된 이 원칙이 새만금에서 와르르 무너지고 말았다. ‘5인 공동위원장’ 체제와 이에 따른 ‘컨트롤타워 부재’가 새만금 잼버리 대회 파행 및 부실 운영의 최대 이유가 되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환경감시’를 제1의 존재 근거로 삼는 언론은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잼버리 대회의 실패 조짐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단 말인가? 시인 김택근은 8월12일 경향신문 칼럼에서 새만금 지역 인근에 사는 친구가 전화로 쏟아낸 말을 다음과 같이 전했다.

“이상한 것은 수만명이 온다는 국제행사가 코앞인데 언론들이 조용하더라고. 다른 국제행사는 얼마나 호들갑을 떨었는가. 시시콜콜 들춰내고 부풀리고. 그런데 새만금은 달랐어. 결국 이 지경이 된 거야. 아무도 챙기지 않았지. 그 누구도 와보지 않은 거야. 동네잔치도 이렇게는 안 해. 다들 마음은 다른 데 있었어.”

이어 그날 밤 경인일보 인천본사 기획취재팀장 김명래가 “‘동네 축제’ 취급받은 잼버리 그리고 언론의 책임”이라는 제목의 미디어오늘 칼럼에서 언론의 책임에 대해 자세한 소식을 전했다. 모든 언론이 새만금을 외면한 건 아니었다. 전북 지역의 신문·방송은 지난해부터 여러 문제점을 자세히 지적했다.

JTV 전주방송은 대회를 석 달가량 앞둔 5월 “잼버리 코앞인데… 사흘 비에 현장은 ‘물바다’”란 제목의 현장 취재 보도를 내보낸 이후 지속적으로 이 문제를 다뤘다. 전주MBC는 지난해부터 “배수 부적합” “의료진 태부족” “컨트롤타워 실종” 등을 현장 고발 기사와 후속 보도로 10여차례 내보냈다. 이들 매체뿐 아니라 지역의 여러 신문·방송이 잼버리 문제를 지속적으로 다루면서 개선을 촉구했다.

문제는 중앙 언론이었다. 김명래는 “잼버리 초기 언론 보도 양상만 보면 지금의 ‘과몰입’과는 달리 ‘무관심’에 가까웠다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알게 됐다”며 “전국 단위 언론에게 잼버리는, 조금 과장해서 말하면, 그저 ‘동네 축제’였을 뿐이었다”고 지적했다. 그는 “새만금 잼버리 실패가 국격을 떨어뜨렸다고 한탄하기 전에, 그 현장을 미리 찾아가 취재하지 않은 책임이 언론에게도 있다”며 이런 결론을 내렸다. “이 대회의 성공적 개최를 위한 비판 보도를 지속한 지역 언론이 있었다는 사실도 기억하면 좋겠다. 이런 비판 보도에 이른바 ‘중앙 언론’이 힘을 실어줬다면 새만금 잼버리는 실패로 끝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지방 ‘학습된 무력감’에 빠져

사회학자 조형근이 쓴 ‘새만금에 돌을 던져라, 하지만’이라는 제목의 한겨레 칼럼(8월9일자)은 잼버리 대회의 파행과 관련해 쏟아져 나온 ‘지방 폄하’ 시각에 대해 강한 이의를 제기했다는 점에서 매우 인상적인 글이다. 그는 20년 전 부안군민들의 핵폐기장 반대 운동에 동참하면서 “갯벌을 지키자는 주장이 주민들에게는 아쉬울 것 없는 서울 중산층의 배부른 낭만처럼 들린다는 것”을 알고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조형근은 “좋은 것은 서울, 수도권이 독점하면서 지방은 자연과 함께 가난하게 살라고 하면 화가 치미는 것이 인지상정이다”라며 “무엇보다 수도권 사는 이익은 다 누리면서, 지방에 대해 남 일 보듯이 이야기해서는 안 된다. 새만금에 돌을 던지기는 쉽다. 나도 던졌다. 자기도 맞을 각오를 해야 한다”고 했다. 그렇다. 문제의 핵심은 바로 이런 역지사지(易地思之)의 부재다.

환경을 지키자며 새만금에 돌을 던진 의로운 지식인들에겐 왜 그런 의롭지 못한 토건사업에 전북도민들의 절대다수가 지지를 보냈는지 그 이유에 대한 고민은 없었다. 일부나마 기껏 제시한 이유는 전북도민들이 지역 토호를 비롯한 토건 카르텔 세력의 농간에 놀아난 탓이라는 것이었다. 사실상 어리석은 바보라는 이야긴데, 뭘 몰라도 한참 모르는 진단이었다. 차라리 탐욕에 눈이 멀었다고 비난하는 게 낫지, ‘어리석은 바보’가 그것보다는 좀 나은 대접이라는 건가?

나는 지방을 무조건 옹호할 생각은 없다. 중앙 언론의 지방 비판에 다 동의하지 않는 것도 아니며, 지방, 즉 전북의 모든 항변과 반론에 다 동의하는 것도 아니다. 누구에게 유리하건 불리하건 법적 책임 중심의 논변에도 별 관심이 없다. 새만금 잼버리 대회가 실패로 돌아갈 경우, 그 책임을 누가 다 뒤집어쓸 것이며, 누가 가장 큰 타격을 받을 것인가? 나는 이 물음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이 물음에 대한 답은 오래전부터 충분히 예견할 수 있었던 것이고, 그 예견대로 현실화되었다.

전북 언론은 오래전부터 문제점을 잘 알고 있었으며, 그걸 잘 지적했다. 그러나 달라진 건 없었다. 왜 그랬을까? 단지 중앙 언론이 외면했기 때문에? 문제는 그것보다 훨씬 더 심각하다. 지방에서 개최되는 국제행사의 치명적인 문제들을 미리 알고서도 중앙 언론이 나서지 않으면 그걸 개선할 수 없다는 게 기이하지 않은가? 지방자치 회의론까지 나올 정도로 비난의 대상이 된 지방자치의 현 수준에 가장 큰 책임을 져야 할 주범은 누구일까? 돌을 들기 전에 눈을 크게 뜨고 전체 모습을 살펴보자.

전국 대부분의 지역들이 앞다투어 중앙을 향해 더 많은 예산 지원을 해달라며 자기 지역의 어려움을 하소연하고 있는 게 우리의 현실이다. ‘예산결정론’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예산 문제가 한국 정치와 지방자치의 내용을 결정하고 있다. 국회의원과 지방자치단체장들이 유권자들에게 내미는 연말 실적 보고를 보면 거의 대부분 자신이 무슨 예산을 따왔다는 자랑 일색이다. 즉 정치와 행정이 ‘예산 따오기’로 환원되고 있는 것이다.

예산분배 투명한 공론장 끌어내야

그런 세월이 반세기 넘게 지속되면서 지방은 어느덧 중앙의 지원을 받는 것 이외에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은 없다고 생각하는 ‘학습된 무력감’에 빠져들었다. 학습된 무력감은 좌절이 반복되면 나중엔 어떤 시도도 필요없음을 배운 나머지 자신들의 운명을 통제하는 데 무력해진다는 사회심리학적 개념이다. 그 덕분에 중앙 권력은 지방의 이렇다 할 저항 없이 지금과 같은 ‘서울 1극 체제’를 완성시켰다.

그 결과 벌어진 비극이 바로 ‘지방 소멸’과 ‘서울 멸종’이다. 지난해 한국의 합계출산율은 세계 최저인 0.78명, 그중에서도 서울시는 0.59명을 기록했다. 이를 두고 서울대 보건대학원 교수 조영태는 “서울을 생물학 종에 비유한다면 이미 멸종의 길에 들어섰다”고 진단했다. 그는 “한국의 출산율이 유독 떨어지는 근본적인 원인은 서울과 수도권으로의 엄청난 집중”이라며 “지금 청년들, 아이를 안 낳는 30대 초·중반은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경쟁이 심한 삶을 살아왔다”고 했다.

전국의 모든 지방 청년들이 서울로 가기 위한 경쟁을 하게끔 역대 정권이 권력·부·교육·일자리의 서울 집중을 강화하는 정책을 펴왔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5년짜리 정권의 입장에서는 기존 수도권 집중의 경로를 따라가는 게 유리하다.

개별 정권이 지지율에 신경 쓰지 않은 채 반세기 이상 누적된 경로를 바꾸기는 어려우며, 그런 수정을 위한 시도와 노력이 지방민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역대 정권이 한국형 계급투쟁의 1차 관문인 이른바 ‘명문대학’을 서울에 집중시켜 키움으로써 지방·서울의 경계를 흐리게 만드는 도구로 활용해왔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중앙 권력자들은 지방 이슈에 대해 시늉 또는 ‘쇼’를 하는 재주만 늘었다. 대선 후보들은 수도권에선 구체적인 정책을 역설하지만, 지방 유세에선 자신이 지방을 생각한다는 추상적인 말만 늘어놓는 게 무슨 공식처럼 되고 말았다. 뭘 제대로 해보겠다는 의욕은 없이 신경 쓰고 있다는 정도의 시늉을 낼 때 써먹는 수법이 바로 새만금 잼버리 대회에 도입된 공동위원장 체제라는 것도 지적해둘 필요가 있겠다.

우리는 매년 연례행사처럼 여의도에서 벌어지는 지역별 예산 분배의 타락하고 오염된 실상을 목격해 왔음에도 그걸 바로잡아 보겠다는 그 어떤 시도도 해본 적이 없다. 예산으로 지방을 ‘식민지’로 묶어 두겠다는 집단적 음모가 아니고선 달리 생각하기 어려운 일이다.

지방을 더 이상 식민지로 묶어두지 말라. 그 줄을 끊기 위해 우선 예산 분배를 투명한 공론장으로 끌어내 ‘국가 균형발전’의 의지를 예산의 규모로 표현하는 일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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