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부인을 버려라

서정일 영화 칼럼니스트
영화 <핵전략사령부>에서 미국 대통령 부인의 뉴욕 방문 기사가 실린 신문.

영화 <핵전략사령부>에서 미국 대통령 부인의 뉴욕 방문 기사가 실린 신문.

냉전시대 미국의 대표적 책사 헨리 키신저가 사망했다. 그는 힘과 국익이 정의라고 믿었던 뛰어난 학자이자 냉철한 외교관이었다. 조지 케넌의 현실주의 외교 정책을 계승했으며 총성 없는 전쟁에서 소련이 해체되고 자본주의 미국이 우위를 지키는 데 큰 공을 세웠다. 100세로 죽기 직전까지 쉬지 않고 대외 정책에 대한 자문과 저술 작업을 했다. 키신저가 한 세기 동안 완전연소하며 남긴 족적에는 국익 우선의 공과가 뚜렷하다.

스탠리 큐브릭 감독이 키신저를 모델로 <닥터 스트레인지러브>를 제작했다는 일화는 잘 알려져 있다. 우발적 사고로 미국 핵폭탄이 모스크바에 투하되고 보복 공격으로 공멸하는 악몽이 플롯이다. <핑크 팬더>로 유명한 팔색조 배우 피터 셀러스가 연기한 스트레인지러브 박사는 수소폭탄 제조에 집착했던 물리학자 에드워드 텔러, 나치의 로켓 전문가 베르너 폰 브라운과 키신저가 혼재된 캐릭터다. 풍자적 원제 <닥터 스트레인지러브 또는 어떻게 나는 걱정을 그치고 폭탄을 사랑하는 법을 배웠는가>가 암시하듯, 키신저를 위시한 핵 선제공격을 주장하는 편집증적 공산주의 혐오와 냉전시대의 광기를 비꼰 블랙코미디다.

냉전의 토대는 상호확증파괴(MAD)의 긴장이다. 핵공격을 한다면 상대의 보복 공격으로 공멸할 수 있다는 공포가 핵전쟁을 억제시킨다는 전략이다. 그러나 상호 핵공격의 의지가 없고 안전에 만전을 기했더라도 무결할 수 없는 것. <닥터 스트레인지러브>의 잭 리퍼 같은 전쟁광의 치명적인 실수로 핵전쟁이 발발할 수 있다는 불안은 1962년 쿠바 미사일 위협으로 민감해진 미국인만의 공포가 아니었다.

핵공격을 암시하며 상대를 압박하는 키신저의 면모가 잘 드러난 또 한 편의 영화가 같은 해, 같은 영화사에서 제작되었다. 시드니 루멧이 연출한 <핵전략사령부>는 제어장치 오류로 모스크바에 핵폭탄을 터뜨리게 된 미국 대통령의 악전고투 속 자기희생을 그린 스릴러다. 플롯이 비슷하다 보니 <닥터 스트레인지러브>보다 늦게 개봉됐고, 그 탓에 평단의 호평과 달리 표절 딱지와 함께 관객이 외면한 비운의 영화다.

<핵전략사령부>에서 미국 대통령(헨리 폰다)은 기계 오작동으로 모스크바에 떨어질 핵폭탄을 막으려 백방으로 노력하지만 가망이 없다. 대통령은 소련의 서기장에게 우발적 실수라 절박하게 해명하고 간곡하게 설득하지만 소련 측이 믿을 리 없다. 최후의 순간 대통령은 실수였음을 증명하기 위해 뉴욕에 핵폭탄을 투하하라고 명령한다. <핵전략사령부>가 큐브릭의 영화와 변별되는 지점이다.

대통령은 침통한 표정으로 참모의 가족이 뉴욕에 거주하냐고 묻는다. 울먹이며 고개를 끄덕이는 참모는 곧 쓰러질 것 같다. 미국의 전멸을 막기 위한 대통령의 용단과 가족의 희생을 받아들이는 각료들. 그로테셸 박사는 건조하게 사망자 수를 예측하며 경제가 중요하니 기업에 필요한 문서 보관을 강조한다. 실리가 애국이라 믿는 키신저의 그림자가 짙다. 이때 신문을 펼친 각료들이 동요한다.

신문에는 대통령 부인의 뉴욕 방문 기사가 실려 있다. 환하게 웃고 있는 그녀의 모습과 대통령이 떨리는 목소리로 뉴욕을 폭파하라는 명령이 겹친다. 한 장의 신문 인서트 컷은 소리로만 전달되는 모스크바의 아비규환보다 더 끔찍한 충격으로 각인된다.

국제 정세를 객관적으로 파악하고 현실적 판단으로 국익을 우선시했던 헨리 키신저. 시드니 루멧 감독은 <핵전략사령부>에서 실리를 권고하는 냉철한 책사와 자기희생을 담보한 애국자를 대비시켰다. <핵전략사령부>의 원제는 ‘이중안전장치’다. 국가 안위는 뛰어난 책사만으로 부족하다. 임박한 위기에 처해 아내를 버리면서까지 국익을 챙기는 대통령은 국민에게 최후의 안전장치로 신망을 얻을 것이다.

서정일 영화 칼럼니스트

서정일 영화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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