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택근 언론인·시인

김대중 대통령의 생가를 둘러본 사람들은 알 것이다. 간척지에 있는 생가는 한눈에도 배산임수의 명당과는 거리가 멀다. 그래서 그의 삶이 바다를 메워 길을 낼 만큼 험했을까. 2006년 가을 하의도 생가를 다녀왔다. 김대중은 필자에게 둘러본 소감을 물었다. “대통령께서는 혼자만의 힘으로, 혼신의 노력으로 오늘에 이른 것 같습니다.” 김대중은 희미하게 웃었다. 그 미소엔 자부심이 아닌 다른 것이 서려있었다. 자신의 삶을 연민하고 있었다. 파란만장한 삶에 슬픔이 고여 있었다.

피가 맺혀있는 얘기 하나를 해본다. 1980년 권력을 찬탈한 신군부는 장남 김홍일을 잡아가 모질게 고문했다. 살고 싶으면 아버지가 빨갱이라고 털어놓으라며 짓이겼다. 홍일은 죽기로 했다. 의자 위로 올라가 감방바닥에 머리를 박았다. 찧고 또 찧었다. 피범벅이 되었는데도 죽지 못했다. 그 후유증으로 파킨슨병에 걸렸다. 아버지는 사형수에서 대통령이 되었지만 아들은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말도 할 수 없었다. 김대중은 장남을 찾아가 입가를 닦아주고 단추를 채워주었다. 병든 아들 앞에서 아버지는 죄인이었다.

다섯 번의 죽을 고비가 있었고, 6년 넘게 옥살이를 했다. 두 차례 망명길에 올랐고, 55번이나 가택연금을 당했으며, 숱한 협박과 회유에 시달렸다. 빨갱이, 과격분자, 거짓말쟁이라는 비방이 따라다녔다. 김대중이 출마하면 상대 측 선거 전략이 뻔했다. 김대중을 전라도에 가두고 지역감정에 불을 지피면 그만이었다. 민주화 동지 김영삼도 대통령 선거전이 치열해지자 김대중을 빨갱이로 몰았다. 지역감정을 선동한다고 할까봐 고향에도 갈 수 없었다. 이처럼 기구한 운명의 정치인이 있었던가.

지지자들도 슬픔에 감염되었다. 조마조마하게 김대중을 바라보았다. 김대중을 부르면 목이 메었다. 제발 살아 있어달라고, 부디 꺾이지 말라고 기도했다. “대흥사 아래 여관 동네/ 술 파는 할머니/ 막걸리와 도토리묵 차려주고/ 앞치마에 눈물 찍는다// 우리 선생님/ 고생도 징허게 많이 허신 양반/ 떨어져도 눈물 나고…/ 되야도 눈물 나고…’(심호택 시 ‘1997년 겨울 해남’) 이렇듯 눈물 젖은 사람들을 두고 환히 웃을 수 있겠는가. 대통령 취임식장에서도, 노벨 평화상 수상식장에서도 김대중은 활짝 웃지 못했다. 그가 남긴 사진들 중 파안대소하는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다.

김대중은 마지막까지 역사와 국민을 믿었다. “국민은 나를 버려도 나는 국민을 버릴 수 없다. 국민은 나의 근원이요, 삶의 이유이기 때문이다.” “내게 가장 두려운 것은 역사의 심판이다. 바르게 산 자에게는 영원한 패배가 없다.” 그렇기에 빛을 받을수록, 높이 오를수록 자신에게 엄격해야 했다. 세속의 재미와는 멀어져야 했다. 따르는 무리를 놔두고 홀로 영광을 독차지할 수 없었다. 변함없는 지지자들이 있어 행복했지만, 그들을 웃게 할 수 없어서 쓸쓸했다. 어쩌면 가장 고독한 사람이었는지 모른다.

지난 6일은 김대중 탄생 100년이 되는 날이었다. 김대중은 청년사업가, 국회의원, 사형수, 야당총재, 대통령으로 살았다. 한국을 인권과 민주주의가 숨 쉬는 곳으로 옮겨놓고 그가 믿고 의지했던 역사 속으로 들어갔다. 주어진 생을 남김없이 태워 척박한 현대사를 갈아엎었다. 하지만 시국이 엄중해졌다. 그가 생애 마지막까지 마음을 졸이며 조심하라 일렀던 3대 위기(남북관계, 서민경제, 민주주의)가 도적처럼 닥쳐왔다. ‘김대중의 평화’ 위로 포탄이 날고 있다. 이에 많은 이들이 김대중을 떠올린다. 진보도 보수도 길을 묻고 있다.

총선을 앞두고 정치인들이 김대중을 부르고 있다. 하지만 그는 이제 특정 지역의 맹주가 아니다. 어느 세력에도 속해 있지 않다. 따라서 역사 속의 김대중을 초대할 때는 예의를 갖추시라. 아무 때나, 또 함부로 그의 이름을 부르지 마시라. 개인의 영달을 꾀하려, 또는 특정 세력의 진영 논리를 위해서 그를 부른다면 김대중을 파는 행위이다. 인연을 내세워 본질을 흐리거나 작은 일화를 부풀려 전체인 양 포장하지 말았으면 한다.

김대중의 길은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지금 우리 국민들을 제대로 섬기고, 역사에서 답을 찾으면 그것이 김대중의 길이다. 이 땅에서 많이 슬펐거늘 더는 그를 슬프게 하지 마라. 김대중이 있어 행복했던 사람들을 슬프게 하지 마라. 김대중을 지역이나 이념의 사슬로 묶지 마라. 작은 것에 그를 매달지 마라. 김대중 100년, 그의 생은 그 위에서 빛나고 있다.

김택근 언론인·시인

김택근 언론인·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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