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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유 유감
옛날에 내 친구가 초등학교 때 축구선수를 했는데 한번은 감독이 선수들을 끌고 라이벌 학교 뒷산으로 데려가더란다. 그 산에서 가리킨 것은 학교 구석에 젖소가 풀을 뜯는 작은 울타리였다. “너희들도 우승을 하면 우유를 마실 수 있다!”당시 지방 대회의 우승 상품이 젖소였고, 선수들에게 경각심을 높이려 일부러 보여준 장면이라는 얘기였다. 운동장에서 그 학교 선수들이 꿀꺽꿀꺽 우유를 한 병씩 독차지하고 먹는 모습을 묘사할 때는 나도 모르게 침이 넘어갔다. 친구네 학교는 우승을 못했고 젖소도 타지 못했다. 어릴 때 읽은 한 프랑스 소년소설의 백미도 도시에 나가 개고생을 한 주인공이 젖소를 사서 고향에 개선하는 것이었다. 젖소는 달걀-병아리-암탉으로 이어지는, 자본주의 이전 근검정신의 정점이기도 했다. 젖소 다음은 없었다. 젖소 마릿수가 달라질 뿐이었다. 물론 그 이후에는 아마 젖소 대신 토지가 그 자리를 차지했을 것이다. 땅을 사라!서울 교외에 젖소를 보러가는 유... -
빵지순례
인스타그램 시대다. ‘인스타그래머블하다’라는 말도 흔하게 쓸 정도다. 이 앱은 보여주는 데 최적화되어 있다. 자신의 삶을 다른 이에게 중계하도록 한다. 내일 인스타그램에 올릴 이벤트를 기획하는 게 삶의 일부인 사람도 있다. 삶의 여러 방식을 바꾸고 있다. 블로그가 한창일 때도 그런 면이 있었지만 ‘모바일한’ 스마트폰과는 물리적으로 다른 토대였다. 컴퓨터는 앉아서 켜고, 해당 블로그에 들어가야 볼 수 있었다. 일종의 동시성이 떨어지고 접속 시간도 적었다. 이제는 다르다. 마치 신체의 일부처럼 늘 켜져 있는 스마트폰으로 접속하고 본다. 성지순례라는 말이 흔하게 쓰이는 것도 보여주기를 좋아하는 시대의 일부다. 인기 있는 장소를 탐방하고 ‘올리는’ 행위를 말한다. 요즘은 더 세분화되는데, 그중 하나가 ‘빵지순례’다. 유명한 빵집을 다니고, 줄 서고, 먹고, 찍어 올린다. 빵은 성지순례에 아주 적합하다. 우선 싸서 비용이 적게 든다. 설사 먹어보니 맛이 없어 실패하더라도 큰 손해가 아... -
추억을 구워 먹는 연탄불
내가 어렸을 때인 1970년대에는 대도시에서도 여전히 연탄을 땠다. 액화석유가스, 즉 LPG는 이미 도입된 시기였지만 비싸고 시설이 부족해서 일부 아파트 등에만 공급되었다. 1960년대에도 이른바 ‘가스통’이라고 부르는 안전용기 LPG가 있었는데 이는 특이하게도 일본 수입품이었다. 대개의 가정은 연탄-석유-LPG로 연료가 바뀌었다. 우리 집은 오랫동안 연탄과 석유풍로를 같이 쓰다가 80년대 들어 LPG를 쓰기 시작했다.연탄은 아궁이에 넣어 때므로 난방을 겸해서 요리를 할 수 있기 때문에 아주 효율적이었다. 물론 연탄가스 위험이 있어서 날씨가 추워지면 신문 사회면에는 언제나 중독사고 소식이 실렸다. 동회(주민센터)에서는 통반장을 통해서 각 가정의 장판을 열고 금이 간 곳은 없는지 살피는 게 중요한 일이었다. 연탄가스 중독을 치료할 수 있는 고압산소기가 설치된 병원을 소개하는 것도 그때 공무원들의 업무였다.연탄은 냄새가 고통스러웠지만 열효율이 좋았다. 값이 비싸지는 않았지... -
치킨과 짜바기
치킨은 치느님이다. 닭요리도 진급한다. 제사상, 잔칫상 제일 좋은 자리에 올라가더니 기어이 그 자체가 ‘느님’이 됐다. 그 명명 배경에는 아픔도 있다. 치킨 말고 우리를 위로하는 값싸고 맛있는 요리가 없다는 뜻이다. 튀겼지, 단백질이지, 통으로 한 마리를 다 먹을 수 있지, 더구나 시키면 온다! 닭은 생명이고 고기라 언제나 귀한 것이었다. 사위가 오면 씨암탉이라는 말이 상징한다. 닭은 크기부터 잡기 좋은 육류다. 놓아 기르는 닭 중에 접대할 손님 수에 맞게 크기를 정하면 된다. 도살도 비교적 간편하며, 손질도 쉽다. 돼지는 기르는 데 오래 걸리며 집 농사 규모가 크고 좋아야 줄 먹이도 충분히 생긴다. 키우고 싶다고 아무나 기르는 가축이 아니었다. 소는 말해 무엇하랴. 경운기를 누가 함부로 잡겠는가. 닭은 키우는 데 돈도 거의 안 든다. 풀씨며 지렁이며 무엇이든 먹었다. 봄에는 올챙이, 여름에는 개구리를 회초리로 잡아서 사료로 썼다. 과거에는 보건당국이 현장 도축... -
겨울밤 노란 귤처럼
겨울은 추워야 제맛이라는데 그런 말을 들으면 팔자 좋은 소리라는 생각이 든다. 어렸을 때는 초겨울이 되어 아침 세수에 피부가 뻣뻣해지면 우울증이 올 지경이었다. 당도할 겨울이 무서웠기 때문이다. 없는 사람에게 겨울처럼 두려운 것이 있던가. 경제를 일구는 일은 부모님 몫이었지만 없는 집 아이들은 일찍이 마음부터 힘겨운 살림을 살았다. 아버지가 연탄 살 돈이 있는지, 김장은 충분한지, 마지막 학기 등록금은 제때 낼 수 있는지 가늠을 하고도 남았다. 그때 몇년은 중동에서 전쟁이 나서 기름값이 올랐다. 박정희의 경제 드라이브로 오르던 총생산도 고개를 처박았고 어른들은 나라가 사네 마네 걱정을 했다. 수학이나 열심히 풀고 영어 단어 외워야 할 때 왜 그런 어른들 고민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을까. 고약한 등유 타는 냄새가 외려 반갑던 시절이었다. 이제는 쓰지도 않는 말인 고학생은 왜 그리도 많았는지. 신문을 팔고, 군고구마 깡통을 지켰으며, 늦은 밤에는 메밀묵 상자를 멨다. 몇년씩 같은 ... -
양고기 어떠세요
“경성도수장에서 도살되어 부민이 먹은 고기는 소가 2466두, 도야지 1393두, 양이 1두….”1935년 2월의 신문 기사다. 도수장은 도축장이다. 부민이란 서울시민이다. 소가 돼지보다 많은 게 눈에 띈다. 양이 한 마리 포함되었다. 도축량을 알리는 당시 신문 기사에는 양이 몇마리나마 빠지지 않고 있었다. 아마도 서울의 외국공관이나 호텔에 공급하는 목적이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한국인은 오랫동안 양고기를 더러 먹었다. 그러다 점차 안 먹는 육종이 되었다. 1978년 경향신문 기사에는 “별미 양고기”라는 제목의 칼럼이 실렸다. 당시 고기 공급 부족으로 파동이 일어났는데 양고기도 맛있으니 먹어보면 어떻겠느냐는 제안이다. 양은 보통 고기보다는 옷감을 얻으려고 길렀다. 모직물이 고급 섬유로 한국에도 전해졌기 때문이다. 옷감도 얻고 고기도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양고기는 점차 한국인의 기호에서 사라졌다. 양과 비슷한 염소, 특히 흑염소가 육용종으로 널리 보급되었다. 기... -
순대가 비싸진다
떡볶이 파는 평범한 동네 노점이랄까, 시장 좌판 가게가 점점 줄어든다. 입맛이 바뀐 것인지, 먹을 게 많아서인지 모르겠지만 오랫동안 불후의 일등 간식이 왕좌를 내놓는 것 같아 슬프다. 불후라고 썼지만, 이건 어폐다. 영원해야 불후인데, 영원하지 않을 예감이니까. 얼마 전 한 초등학교에 갈 일이 있었는데 아이들에게 제일 즐기는 간식을 물어보았다. 첫째가 마라탕, 둘째가 탕후루였다. 한때의 인기 정도로 생각했던 마라탕은 자리를 굳힌 느낌이다. 떡볶이를 밀어냈다. 매운 음식은 중독이 되고, 스트레스를 풀어주는데 마라탕이 이제 그들 말대로 ‘원톱’이다. “엄마랑 같이 갈 때나 떡볶이 먹어요. 우리끼리 갈 때는 마라탕이죠.” 학생의 대답이었다. 그렇다. 떡볶이는 중년의 간식이 되었다. 국떡(초등학교 앞 떡볶이)은 지난 세대의 추억의 음식이 되고 있는 중이다. 실제 주 고객도 그들이라 한다. 떡볶이와 함께 투톱을 이루었던 순대도 달라지고 있다. 한 청년사업가를 알고 있다. 순대 ... -
뜬금없는 블루크랩 소동
요즘 언론을 달구는 기사 가운데 이탈리아 꽃게 얘기가 있다. “당장 수입해서 먹자!”는 주장이 댓글에 돌더니, 정말로 수입하겠다는 회사가 나섰다고 한다. 어떤 커뮤니티에는 구입 예약을 받고 있다는 유통회사 광고문도 나오고 있다. 현지에서는 싸지만 수송비용과 이윤 등을 따지면 별로 쌀 것 같지 않다거나, 우리 꽃게도 요즘 싼데 굳이 종도 다른 게를 수입해서 먹겠는가 하는 의문도 있다. 이 해프닝은 기본적으로 ‘이탈리아는 이 꽃게(정확하게는 푸른 게이고, 학명은 Callinectes sapidus이다)를 먹지 않는다’는 전제를 깔고 있다. 하지만 사실관계는 다르다. 이 게, 즉 현지에서 ‘그란키오 블루’라고 부르는 녀석은 70년 전쯤 지중해로 도래한 종으로 이미 식용하고 있다. 내가 이탈리아에 있었던 24년 전에도 시장에서 파는 걸 본 적이 있다. 다른 바닷게에 비해 껍데기가 딱딱해서 값은 싼 편이었지만 엄연한 식용 게였다. 이 게를 사용하는 스파게티 메뉴도 있고, 살과 ... -
우유는 누구 손으로 만들어지나
현대 한국 식품사에서 ‘남아돈다’고 늘 걱정하는 대표 주자는 우유가 아닌가 싶다. 이미 1970년대에 우유가 남아 당시 농림부가 묘안을 짜내고 있다는 신문 기사가 있다. 내가 그 무렵 초등학교에 다녔는데, 각 반마다 강제로 할당해 우유를 사먹도록 했다. 담임이 아이들을 붙들고 하소연하면서 ‘우유 급식 신청서’를 떠맡기던 기억이 있다. 삼각뿔 모양 우유팩에 빨대를 꼽는 기술을 초등학생들이 유감없이 선보이던 시대였다. 인기 MC 임성훈과 최미나가 광고하던 “이렇게 해서 요렇게 마시는” 우유도 그때 나왔다. 카톤팩이라는 혁신적 포장이었는데, 지금도 여전히 사용되는 놀라운 고안이었다. 우유 소비는 늘 부진을 거듭해 내가 군 복무를 한 1980년대에도 병사들에게 우유를 먹였다. 일주일에 한두 번 주던 것이 나중에는 매일 공짜로 보급됐다. 근대 한국의 젖소 도입은 1902년 프랑스인이 20마리를 들여온 것이 최초라고 기록돼 있다. 하지만 오래전부터 우리 조상들은 우유를 먹을 줄 알았다.... -
오늘은 속이 좋지 않구나
초등학교 6학년을 얼추 마쳤을 때 무슨 일인지 겨울방학도 하기 전에 학교에 가지 않았다. 놀다가 그랬는지, 아니면 무슨 착오가 있었는지 모르겠다. 선생님이 달필로 한자를 섞은 편지를 보내오셨다. 나는 곱은 손이 다 부르트도록 야산으로, 골목으로 쏘다녔을 것이다. “부모님께. 저는 찬일이 담임 봉규석입니다. 동장군이 기승을 부리고…. 비록 어려운 살림에…. 이렇게 편지를 보내니, 졸업식에 꼭 참석하도록 부탁드립니다….” 한 반 80여명 중에 전화 있는 집이 열도 안 될 때였던 것 같다. 개인 간 거래하는 백색 전화기가 집 한 채 값은 될 100만원쯤 할 때였으니까 하루 벌어 하루 사는 우리집엔 당연히 전화가 없었다. 그리하여 선생님이 통지표를 함께 넣어 편지를 보내셨다. 혹시라도 머지않아 열릴 졸업식에 오지 않을까 걱정도 하셨던 거다. 어린 마음에도, ‘아, 선생님이 나를 기억해주시는구나’하는 생각에 작은 감동을 했던 게 생생하다.3학년 때 담임선생님의 한 말씀은 내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