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표 아주대 약학대학 교수
[김홍표의 과학 한 귀퉁이] 봄은 붉다

괄목상대(刮目相對). 이 나이가 되어도 눈을 부릅뜨고 볼 일이 생긴다. 한 보름 전, 설 즈음이다. 빌딩 옆이라 빛을 조금은 손해 보는 터에 자리한 매화나무 가지가 문득 붉다는 느낌이 들었다. 눈을 크게 뜨고 가까이에서 본 매화나무 삐죽한 우듬지는 과연 자줏빛으로 붉었다. 다른 나무도 그런가 살펴보았다. 아침저녁 나절 오가는 길목에서 부러 들여다본 나뭇가지도 붉은 게 제법 많았다. 이른 봄 전령사인 산수유도, 남천의 가지도 붉었다. 이들에게 공통점이 있다면 붉은 기운이 가지 끝에 집중되었다는 사실이다. 꽃도 잎도 없는 겨울 끝자락 나뭇가지는 왜 그리 붉을까?

소나무 가지에 달린 솔방울을 보면 한 해 세월이 또렷이 보인다. 가지 끝 솔방울은 몽글몽글하고 작지만 한 마디 아래 솔방울은 좀 더 크고 단단하다. 그러나 입을 다물고 있다. 그보다 더 아래 솔방울은 입을 열고 씨를 떨군 상태다. 그러므로 솔방울 씨앗이 익는 데 적어도 2년은 걸리는 셈이다. 지금 활엽수는 어떨까? 잎이나 꽃은 없다 해도 아무것도 없는 것은 아니다. 봄이 찾아와 빛이 들면 활약할 잎과 꽃이 눈(芽) 속에 들어있기 때문이다. 그 눈은 작년에 이미 갈무리해둔 것이다.

잎눈에서 나올 잎은 장차 가지 끝에서 공기와 마주할 나무의 최첨단 기관이 될 것이다. 태양과 대기를 향해 잎을 한껏 펼쳐 널따란 광합성 공간이 전개된다. 그 잎을 떠받치는 가지에는 최소한 세 가지 기능이 있다. 지지, 운반 그리고 저장이다. 나무에는 세월이 살아있다. 가지 끝마디는 작년에 자란 흔적이다. 물관과 체관으로 물과 영양소가 들락거린다. 심부 줄기는 탄소를 저장하는 죽은 기관이다. 그렇기에 나무는 죽어서도 자란다. 그게 다일까?

20세기 초중반 식물학자들이 잎 말고 가지도 광합성을 할 수 있으리라 가정하고 조사한 결과는 놀라웠다. 평균적으로 가지는 나무가 가진 광합성 공간의 약 15%를 차지했다. 심지어 버드나무 엽록체 전체의 45%가 가지에 존재한다는 계산 값까지 나왔다. 2001년 독일 연구팀은 버드나무와 떡갈나무의 어린 가지가 광합성에 참여하여 자신이 호흡하면서 내놓은 이산화탄소를 알뜰히 회수한다는 결과를 발표했다.

과학자들은 가지에서 벌어지는 광합성이 활엽수의 영양분을 보충하는 역할을 하리라 추정한다. 잎을 모두 떨군 겨울에 특히 중요하다는 뜻이다. 뉴질랜드 빅토리아 대학의 케빈 굴드는 가지의 붉은 색소인 안토시아닌이 강한 빛으로부터 광합성 장치를 보호한다는 연구 결과를 실험식물학회지에 발표했다. 계절을 불문하고 강하고 드센 태양 에너지는 식물에 해롭다. 세포막 같은 세포 구성 요소와 광합성 기구를 산화시켜 손상을 입히기 때문이다. 이에 안토시아닌은 강한 빛에너지를 열에너지로 슬쩍 바꿔버린다.

굴드는 말채나무를 실험재료로 썼다. 예전에 말 채찍으로 썼기에 붙은 이름이다. 흔히 관상용으로 심는 관목인 말채나무는 줄기와 가지가 온통 붉다. 어린 것일수록 더 붉다. 이 가지를 가로로 잘라 현미경으로 속을 들여다보면 붉은 색소 안쪽에 푸른 엽록체가 자리한 모습을 볼 수 있다. 아마 매화 1년짜리 가지 속도 그럴 것이다. 알다시피 매화는 잎보다 꽃을 먼저 피우는 식물이다. 이른 봄에는 탄소와 영양소가 모자라기 십상이다. 이럴 때 가지가 선뜻 나서서 광합성에 동참해준다면 더 바랄 것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꽃을 먼저 피우는 식물 가지가 모두 붉다거나 광합성에 참여한다는 연구 논문은 없다.

엽록체를 많이 갖고 있다는 버드나무 가지는 막상 붉지는 않다. 황무지에 맨 먼저 뿌리를 내리는 식물이기에 버드나무는 선구자 식물이라 불린다. 아마 이들은 선구자 식물답게 열린 공간으로 쏟아지는 강한 빛에 대항할 수단을 갖추었을 것이다. 이른 봄에 남보다 먼저 잎을 틔워 공간을 차지하는 일도 좋은 방법이다.

센 빛 외에 다른 스트레스가 닥쳐도 식물은 붉은색을 보강한다. 가물거나 낮은 기온 혹은 병원균 침입에 반응하여 붉은색이 짙어진다는 연구 결과가 있는 걸 보면 안토시아닌은 식물의 적응력을 높이는 것 같다. 잎은 녹색일지라도 가지가 붉은 관다발 식물은 생각보다 많다. 청개구리 다리처럼 얇고 여린 단풍의 어린 가지도 오련히 붉다. 가지는 붉지 않다고 해도 잎눈이 붉은 식물은 많다. 벚나무 꽃눈도 짙은 자줏빛이다. 소나무 어린 열매도 연한 자줏빛이다. 겨울 끝자락과 이른 봄 긴장된 순간을 극복하고 핀 꽃과 어린잎은 자꾸 샘솟는 놀라움이다.

김홍표 아주대 약학대학 교수

김홍표 아주대 약학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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