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림마저 잃었을 때에도 너는 온다.
어디 뻘밭 구석이거나
썩은 물웅덩이 같은 데를 기웃거리다가
한눈 좀 팔고 싸움도 한판하고,
지쳐 나자빠져 있다가
다급한 사연 들고 달려간 바람이
흔들어 깨우면
눈 부비며 너는 더디게 온다.
더디게 더디게 마침내 올 것이 온다.
너를 보면 눈부셔
일어나 맞이할 수가 없다.
입을 열어 외치지만 소리는 굳어
나는 아무것도 미리 알릴 수가 없다.
가까스로 두 팔을 벌려 껴안아 보는
너, 먼 데서 이기고 돌아온 사람아.
이성부(1942~2012)
문득 봄이 문 앞에 와 있다. “기다리지 않아도” 봄의 전령들이 도착했다. 봄이 오려면 폭설을 이겨 낸 바람이 필요하다. 눈과 입이 틀어막힌 채 “썩은 물웅덩이”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봄을, 바람이 달려가 “흔들어 깨”운다. 그리하여 “눈 부비며” 기어이 봄은 온다. 풀들을 일으키며 온다. 강물을 깨우며 온다. 지쳐 쓰러진 그림자들을 업고 얼어붙은 문들을 하나씩 열어젖히며 온다.
이성부의 시집 <우리들의 양식>에 수록된 이 시는 1974년에 나왔지만, 지금 우리들의 염원을 대신 노래한다. 이 시를 읽다 보면, 벨라루스의 시인 얀카 쿠팔라의 시 ‘그래도 봄은 온다’가 떠오른다. 두 편의 시가 서로에게 말을 건다. 당신 나라도 우리의 슬픔과 다르지 않군요. 슬픔이 봄을 만들었군요. 그러니까 눈부신 봄은 “먼 데서 이기고 돌아온 사람”이군요.
봄이 곧 만개할 꽃들을 데리고 와서 문을 두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