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이스라엘 빼고 하마스만 규탄한 윤 정부, 이게 가치외교인가

박진 외교부 장관이 팔레스타인 무장정파 하마스의 이스라엘에 대한 공격은 “규탄”하면서 1만명 이상 민간인을 살상한 이스라엘에 대해서는 비판하지 않았다. 박 장관은 지난 9일 한·미 외교장관 공동기자회견에서 “우리는 중동 정세와 관련해 이스라엘에 가해진 무차별적인 공격을 규탄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스라엘과 하마스의 충돌로 민간인 사망자가 급증하는 것도 우려를 표한다. 당사자들이 국제 인도법을 포함해 민간인 보호 조치를 할 것을 촉구한다”고 했다. 급증하는 민간인 사망자가 누구인지, 누구 손에 죽어가는지 분명히 하지 않은 채 많은 사람들이 죽어서 걱정스럽다는 입장만 표한 것이다.

하마스의 이스라엘 공격을 규탄해야 한다. 하마스가 지난 10월7일 민간인과 군인 1400여 명을 잔혹하게 죽이고 인질로 잡은 것은 그 자체로 인도에 반하는 범죄이다. 동시에 그 뒤에 한 달 이상 벌어진 이스라엘의 보복 공격도 정당방위 수준을 넘어서 전쟁 범죄에 이른 지 오래다. 학교, 병원, 난민촌, 구급차를 예고 없이 무차별 폭격하며 어린이 4000여명을 포함, 1만명 이상을 죽였다. 전기·물·구호품이 바닥난 가자지구의 참상은 형언하기 어렵다. 이스라엘군은 얼마나 더 많은 피를 봐야 만족할지 알기 어렵다.

이런 상황에서 자유와 인권, 연대라는 가치를 중시하는 국가가 취해야 할 태도는 분명하다. 하마스의 살상과 이스라엘의 살상을 함께 규탄하며 즉각 휴전을 압박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스라엘에 가장 영향력이 큰 미국은 이스라엘의 살상을 방조하고 있다. 미국이 더 적극적으로 움직였다면 구할 수 있었던 수많은 생명들이 지금도 죽어가고 있다. 미국은 이스라엘군의 가자지구 공격을 중단하라고 촉구하는 유엔 안보리 결의를 막았고, 이어진 휴전 촉구 유엔 총회 결의마저 반대했다. 한국은 이 결의안에 찬성 대신 기권표를 던졌다. 유엔 총회 결의는 찬성 120 대 반대 12로 압도적 표차로 통과됐지만, 유감스럽게도 아무런 구속력이 없다.

윤석열 정부가 표방한 가치외교는 무엇인가. 지금 자유와 인권, 연대라는 가치는 어떤 의미를 갖는가. 혹시 가치외교를 미국 입장을 거의 그대로 따라가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은 아닌가. 물론 정부는 가치 외에도 국익을 종합 고려해 입장을 정할 것이다. 그렇다면 정권 초기부터 가치외교를 그렇게 부르짖지 말았어야 했다. 가장 기본적인 가치에 대한 판단마저 미국에 일임한다면 독자적 판단능력을 가진 국가라고 하기 어렵다.

박진 외교부 장관과 토니 블링컨 미국 국무장관이 9일 외교부에서 공동기자회견을 갖고 있다. 연합뉴스

박진 외교부 장관과 토니 블링컨 미국 국무장관이 9일 외교부에서 공동기자회견을 갖고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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