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지공약 파기와 ‘국민불행시대’

이상이 | 복지국가소사이어티 공동대표·제주대 교수

기초노령연금 공약 파기와 관련해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 27일 노인 단체 관계자들에게 사과했다. 26일 국무회의에 이은 거듭된 사과다. 그러면서도 박 대통령과 정부·여당은 이번 일을 세수부족 때문에 벌어진 불가피한 조치로 공약의 후퇴나 파기는 아니라고 주장한다. 심지어 상황 변화에 따른 공약의 일시적인 조정일 뿐이라고 항변한다. 그런데 이번 사안은 거듭된 사과나 정치적 수사로 무마될 성격의 일이 아니다. 게다가 보육과 의료보장 등 다른 복지공약들도 동시에 후퇴 또는 파기되고 있다. 이는 복지공약의 명백한 파기 흐름으로 국민불행시대를 예고하는 중차대한 사안이다.

기초노령연금 공약 파기의 핵심 내용은 두 가지다. 첫째, 수급대상을 소득하위 70% 노인으로 제한한 것이다. 둘째, 소득하위 70% 노인에 대해서도 국민연금 가입기간과 연계하여 10만원부터 20만원까지 차등 지급하는 것이다. 박 대통령과 정부·여당의 주장대로 이번 일이 정부재정 여건에 따른 일시적인 조정일 뿐이라면, 위의 두 가지 내용 중 ‘지급대상을 소득하위 70% 노인으로 제한’하는 데 머물렀어야 했다. 그런데 국민연금과의 연계로까지 나아갔다. 후자는 일시적인 조정이 아니라 새로운 틀의 구조화에 속한다. 하루 만에 지지율이 급락하고 정치적 곤경에 처하자 청와대와 여당이 다시 국민을 속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시론]복지공약 파기와 ‘국민불행시대’

기초노령연금을 국민연금과 연계함으로써 국민연금에 대한 신뢰를 훼손하는 일을 해서는 안 된다. 이는 국민연금에 대한 국민적 불신을 조장함으로써 국민연금 중심의 노후소득 보장이라는 보편적 복지의 기본 틀을 와해시킬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물론 정부재정 여건과 복지의 우선순위를 고려해서 공약을 일부 수정하고 속도를 조절할 수는 있다. 가령 정치사회적 공론을 통해 소득상위 10~20% 노인에 대해서는 기초노령연금을 지급하지 않는 쪽으로 합의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소득하위 70~80%의 어르신들에 대해서는 약속한 대로 국민연금과의 어떠한 연계 없이 월 20만원씩 지급해야 한다.

우리나라는 ‘GDP 대비 공공사회복지비 지출’ 비중이 10%로 OECD 국가들 평균인 21%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저부담-저복지’의 복지후진국이다. 외환위기 이후 지난 15년 동안 시장만능의 양극화 성장체제와 선별적 복지 중심의 잔여주의 복지체제로 인해 경제성장은 발목을 잡혔고 분배구조도 악화되면서 민생불안이 심해졌다. 그래서 상대빈곤율 16.5%, 중산층 가구 비율 55.5%로 최악의 상태다. 지난 10년 동안 자살률은 2.3배, 강력범죄율은 87%나 늘었다. 세계 최저의 출산율과 꼴찌 수준의 국민행복지수는 양극화 사회의 자연스러운 귀결이다. 그리고 이제 보편적 복지를 통한 인적 자본과 사회적 자본의 획기적 확충 없이는 혁신적 경제성장도 창조경제도 불가능하다는 사회적 공감대가 널리 확산되고 있다.

지난 대선은 신자유주의 양극화 체제를 역동적 복지국가로 바꾸자는 국민적 열망과 기대를 여야 후보가 적극 수용하여 복지국가 공약으로 구체화한 ‘패러다임 전환의 변곡점’이었다. 특히 박 대통령은 경제민주화를 통한 공정한 경제와 보편적 복지를 포함한 맞춤형 복지를 실천함으로써 “국민행복시대”를 열겠다고 약속했다. 박 대통령은 복지국가로의 패러다임 전환이라는 시대적 과제를 실천해야 하는 시기에 정권을 맡았으므로 이전 정권과는 달라야 한다. 만약 과거 정부와 다를 바 없는 정책노선에 머물러 패러다임 전환을 시도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5년 세월을 또 허공에 날려버리는 안타까운 상황에 처하게 된다.

복지국가 건설의 여정은 결코 미룰 수 없기에 박근혜 정부는 복지공약을 반드시 실천하고 성공해야 한다. 이것이 여야와 정쟁을 넘어 우리사회가 박근혜 정부의 복지공약 후퇴나 파기를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진짜 이유이다. 후손들에게 역동적 복지국가라는 진짜 ‘국민행복시대’를 물려주고 싶다면, 우리 모두 박 대통령의 복지공약 파기를 반대하고 한목소리로 시대적 과제의 실천을 요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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