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수궁 옆 정동길에는 큰 회화나무가 있다. 560살 노거수(老巨樹)에 시간이 켜켜이 쌓여 높이가 17m, 둘레가 5m나 된다. 조선초 세조가 태어나기 이전에 뿌리를 내린 나무는 줄곧 한자리에서 임진왜란과 아관파천, 한일합병과 한국전쟁을 견뎌냈다. 곁을 지날 때면, 먼저 나무와 함께했고 먼저 세상을 뜬 많은 사람들을 생각하게 된다. 봄이면 어김없이 부활하는 큰 나무 앞에 찰나적이고도 왜소한 인간은 겸허해진다.
한민족은 나무 숭배의 전통이 깊었다. ‘당나무’로 불리는 마을 어귀 큰 나무를 숭배하는 수목신앙은 가장 오래되고 광범위한 토속신앙이다. 단군설화는 천제의 아들 환웅이 태백산 신단수로 내려오면서 시작된다. 큰 나무 앞에서 느끼는 외경심은 인류의 보편적 정서다. 붓다는 보리수 아래에서 득도해 불교를 창시했다. 유럽 성당 기둥의 나무 문양은 나무를 숭배한 토속신앙을 흡수한 것이라고 한다.
노거수는 생태적으로도 중요하다. 일부 생태계에서는 날짐승·들짐승의 30%가 큰 나무를 집으로 삼는다. 사람들도 나무를 중심으로 모인다. 정자나무는 마을의 공동 사랑방으로 공동체의 구심점과 해를 가리는 그늘 역할을 해왔다. 마을잔치 때면 큰 나무 아래가 떠들썩했다.
오래된 나무는 급감 중이다. 제주도의 수령 100년 이상 ‘어미나무’는 한 세기 만에 90% 가까이 난개발로 사라졌다. 인간이 외경심을 잃은 나무는 도로 건설과 재개발의 장애물일 뿐이었다. 일부만 천연기념물과 보호수로 지정돼 있지만 예산 부족으로 제대로 관리되지 못하는 나무가 허다하다고 한다.
지자체들이 노거수에 주목하는 움직임은 그래서 반갑다. 경남 사천·경기도를 비롯한 여러 곳이 실태조사 보고서를 냈거나 준비 중이고, 전남 영암군은 지난가을 800살 느티나무 아래에서 음악회를 열어 사람들을 다시 모았다. 생태관광 자원으로서 오래된 팽나무·느티나무·소나무 등이 재발견되고 있는 것이다. 교감신경을 진정시켜 스트레스를 감소시키는 나무의 효과는 이미 알려진 바다. 초 단위로 빠르게 움직이는 세상이다. 그 속에서 지친 현대인들의 무의식이 아득한 시간을 품은 큰 나무를 통해 마음의 균형을 되찾으려 하는 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