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적

‘춘래불사춘’ 꽃축제

박재현 논설위원

“엊그제 겨울 지나 새봄이 돌아오니/ 도화행화(桃花杏花)는 석양리(夕陽裏)에 피어 있고/ 녹양방초(綠楊芳草)는 세우중(細雨中)에 푸르도다.” ‘홍진에 묻힌 분네 이내 생애 어떠한고’로 시작되는 가사 문학의 효시 정극인의 ‘상춘곡’ 일부다. 복숭아꽃, 살구꽃, 버드나무꽃이 만발한 산과 들로 오늘 꽃구경 가자고 재촉한다. 조선 풍속화가 신윤복의 그림 ‘연소답청(年少踏靑)’에도 절벽과 젊은 여인의 머리에는 분홍 진달래를 그려 넣었다. 흥겨운 봄나들이나 봄을 노래할 때 빠질 수 없는 것, 바로 꽃이다.

한나라 원제 때 궁녀 왕소군의 봄 이야기도 유명하다. 중국의 4대 절세미녀로 꼽히는 그는 흉노와의 화친을 위해 적국의 왕에게 바쳐졌다. 훗날 당나라 시인 동방규가 소군원(昭君怨)이란 시에서 ‘오랑캐 땅에 풀과 꽃이 없으니 봄이 와도 봄 같지 않다’며 왕소군의 애상을 담았다. 날씨가 추워 꽃이 피지 않은 북쪽 오랑캐 땅에선 춘흥을 못 느낀다는 시구였다. 봄이 왔지만 봄 같지 않음을 뜻하는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은 여기서 유래됐다.

봄꽃축제를 열려는 전국 지자체들이 꽃이 없어 속앓이를 하고 있다. 지난해 4월 축제를 잡았다가 꽃이 3월에 일찍 피어 ‘꽃 없는 꽃축제’를 치르더니, 올핸 축제일을 당겨놓은 3월에 꽃샘추위로 개화 시기가 늦어져 노심초사하고 있다는 것이다. 전국 최대 벚꽃축제인 경남 창원의 진해군항제는 축제 시작 후에도 벚꽃 개화율이 10%대에 그치고 있다고 한다. 제주도에서는 22~24일 전농로 왕벚꽃축제가 열렸지만 벚꽃은 채 만개하지 못한 채 진행됐다. 꽃이 없으니 축제를 미룬 곳도 많다. 강원 영동의 경포벚꽃축제는 계획보다 일주일 늦춘 다음달 5일부터 연다. ‘청개구리 날씨’에 꽃축제가 지체됐으니, 그야말로 춘래불사춘이다.

춘래불사춘은 희망과 기대에 못 미치는 정치·경제·사회적 상황을 표현하던 말이었다. 1980년 서울의 봄, 금융위기 후 맞는 2009년의 봄에 특히 많이 썼던 듯하다. 그러나 기후변화에 가속도가 붙으면서 춘래불사춘 사용법도 점점 왕소군의 시에 나온 그 어원에 가까워지고 있다. 봄이 너무 일찍 와도, 늦게 와도 세상의 혼란은 커질 수밖에 없다. 그걸 곱씹는 또 한번의 봄이다.

국내 최대 봄꽃 축제가 열리는 24일 경남 창원시 진해구 경화역공원에서 방문객이 휴대전화로 벚꽃을 촬영하며 봄 추억을 만들고 있다.

국내 최대 봄꽃 축제가 열리는 24일 경남 창원시 진해구 경화역공원에서 방문객이 휴대전화로 벚꽃을 촬영하며 봄 추억을 만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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