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머니스트 노회찬의 ‘길동무’ 많아지면, 세상은 좀 더 나아질 것”

이명희 논설위원

노회찬 평전 쓴, 이광호 작가

<노회찬 평전>을 집필한 이광호 작가가 지난 20일 서울 마포구 공덕동 노회찬재단 사무실에서 노회찬 전 의원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이 작가는 노 전 의원이 항상 쉬운 말로 얘기하고, 그 언행이 크게 어긋나지 않았기 때문에 오해를 가장 덜 받은 정치인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서성일 선임기자 centing@kyunghyang.com

<노회찬 평전>을 집필한 이광호 작가가 지난 20일 서울 마포구 공덕동 노회찬재단 사무실에서 노회찬 전 의원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이 작가는 노 전 의원이 항상 쉬운 말로 얘기하고, 그 언행이 크게 어긋나지 않았기 때문에 오해를 가장 덜 받은 정치인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서성일 선임기자 centing@kyunghyang.com

1956년 태어났고, 이태원 클럽에서 밴드 생활을 했다. 음악을 접은 뒤에는 ‘미디어오늘’ ‘노동과 세계’ ‘진보정치’ ‘레디앙’을 창간하고 편집책임자로 일했다. 1992년 전국언론노동조합연맹 정책실장 시절 노회찬 전 의원을 처음 만났고, 국민승리21과 민주노동당에서 함께 일했다. 노 전 의원 5주기에 맞춰 <노회찬 평전>을 최근 출간했다. 진보정당 운동과 노동운동의 두 수레바퀴가 잘 굴러갈 때 정치가 좋아지고 어렵게 사는 사람들이 행복해질 것이라는 믿음을 노회찬과 공유하고 함께할 수 있었던 행운에 감사하고 있다.

노회찬 전 의원이 세상을 떠난 지 5년이 흘렀다. 그의 꿈은 이 나라에 제대로 된 진보정당을 만드는 것이었다. 2000년 민주노동당이 출범했을 때 “인생 목표 절반을 이뤘다”고 했다. 나머지 절반은 진보정당이 집권해 세상을 바꾸는 것이었다. 그 길은 아직 보이지 않는다. 그가 떠난 정의당은 양당 틈에서 당의 진로를 둘러싼 분열로 위기를 맞고 있다.

‘이태원 참사’ ‘전세사기’ ‘오송 지하차도 참사’에 이르기까지, 세상은 늘 같은 자리에서 쓰러지고 있는데 ‘함께 비’를 맞아줄 정치인은 난망해 보이는 이때 더욱 그리운 이름, 노회찬이다. 오늘도 많은 이들이 2012년 진보정의당 대표 수락 연설로 유명해진 ‘6411 버스’를 기억한다. 2018년 7월23일, 그는 ‘드루킹’ 정치자금 수수 의혹으로 수사를 받다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나는 지금 여기서 멈추지만, 당은 당당히 앞으로 나아가길 바란다”는 마지막 말처럼 그는 “멈추었지만”, “앞으로 나아가는” 것은 남은 자들의 몫이 됐다.

작금의 현실을 그라면 어떻게 헤쳐 나갔을까. 그가 세상에 남긴 흔적을 갈무리하기 위해 ‘평등하고 공정한 나라 노회찬재단’이 5주기에 맞춰 기획한 <노회찬 평전>이 최근 출간됐다. 평전을 쓴 이광호 작가는 노 전 의원의 가족·친구·동지 등 221명을 인터뷰하고, 600쪽자리 책을 완성했다. 꼬박 4년이 걸렸다. 위인전을 쓰지 않겠다고 다짐한 작가 덕분에 책에는 ‘인간 노회찬’의 삶이 그저 담담하게 담겼다. 5주기를 사흘 앞둔 지난 20일 서울 마포구 공덕동 노회찬재단에서 이 작가를 만났다. 평전은 ‘지금 노회찬이라면 뭐라고 말할까’라는 물음으로 시작한다.

노회찬의 위인전을 쓰지 않겠다고 생각
공적이고 구체적 행위와 노선에 한해
그의 삶을 재구성하기 위해 노력

그는 진보적 다원주의를 인정하고
북유럽의 사민주의로 가기를 원해

- 처음엔 평전 집필을 거절했다고 들었는데요.

“2018년 12월 노회찬재단 송년 모임에서 <노회찬 평전>을 써보지 않겠냐는 제안을 받고 그 자리에서 거절했어요. 수락은 이듬해 5월, 그사이 마음이 오락가락했어요. 쓰고 싶다는 욕심과 덜컥 쓰겠다고 해놓고 도중에 포기하면? 생각만 해도 막 떨렸어요. 안 하자니 평생 후회할 것 같더라고요. 나중에서야 ‘노회찬과 별로 가까이 지내지 않았다는 점’ 때문에 객관적으로 서술할 수 있어서 제안했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 평전 작업은 어떻게 진행됐습니까.

“노 전 의원 62년 삶의 여정을 기록하는 데 집중하기로 했어요. 평전 쓰기로 한 후 제일 먼저 만난 분이 <김대중 평전> 쓰신 김택근 선배예요. 김 선배한테 ‘조언 좀 해주세요’ 그랬더니 첫마디가 ‘남 얘기 듣지 말라’였어요. 제가 중심을 잡아야 한다는 얘기죠. 평전기획위원회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책에 기록되니까 팩트 확인하는 데 신경을 많이 썼고요. 가령 노 전 의원이 스스로 공적 생활의 기원으로 1972년 10월17일 유신 선포한 날을 잡고 있는데요. 당시 재수학원이 끝나고 집에 가는 버스에서 유신 발표 뉴스를 들었다고 합니다. 그 버스가 37번이라는 걸 확인하는 데에만 일주일이 걸렸어요. 무엇보다 가장 무서운 독자는 부인인 김지선 선배잖아요. 초고는 ‘안 읽겠다’고 하시더군요. 하긴 다큐영화 <노회찬 6411>도 아직까지 못 보셨으니까요. 책을 드렸더니, 전화로 ‘담백해서 읽기 어렵지 않았다. 좋았다’고 하셨어요. 엄청 떨었는데 ‘휴’ 했지요.”

- 수많은 사람을 만났을 텐데요.

“221명을 인터뷰하는 데 2년6개월 걸렸어요. 인터뷰를 시작한 시기가 노 전 의원이 떠난 지 1년 정도 지났을 무렵인데, 다들 슬픔에서 벗어나지 못하던 때라 힘들어했어요. 김지선 선배는 인터뷰를 세 번 했는데 힘들어하셔서 인터뷰가 자주 그쳤어요. 누님은 인터뷰 때문에 부산에서 서울에 오셨는데 ‘회찬이가 떠난 다음 한 번도 내 꿈에 나타나지 않았는데 인터뷰 전날 꿈에 나왔다’고 그러시더라고요, 노 전 의원 어머니의 영생여고보 동창도 만났어요. 이분이 ‘친구 태순이가 치매에 걸려서 아들의 부고를 듣지 못한 것에 감사기도를 드렸다’고 하시더라고요. 그 얘기 듣고 먹먹해지더라고요.”

- 첫 평전인데 무엇에 중점을 뒀나요.

“절대 위인전을 쓰지 않겠다고 생각했어요. 가급적이면 제 관점은 안 넣으려고 노력했습니다. 그의 삶을 재현하는 데 필요한 사실은 그를 아는 사람들의 기억과 관련 기록에서 찾고, 공적이고 구체적인 행위와 노선에 한해서 삶을 재구성해보자고 결론을 내렸죠. 제 시각이 들어간 부분은 평전의 맨 마지막 정도예요.”

- 한국 진보정당 역사에서 민주노동당이 원내에 처음 진출한 17대 총선을 빼놓을 수 없는데요.

“그는 2004년 17대 총선에서 맹활약을 했어요. 그해 3월 ‘불판 발언’부터 주목받기 시작하면서 민노당이 ‘바람’을 탔죠. 불판 발언은 사람들이 대부분 기발함만 기억하는데 사실 그건 굉장히 전략적인 표현이에요. 당시 노무현 대통령 탄핵 국면에서 거대 정당들이 격렬한 싸움을 하고 있을 때 민노당이 뒤집힐 위기인데, 노회찬이 돌파를 하지 않으면 진짜 망하는 거였거든요. 민노당의 원내 진출에는 오랫동안 부당한 선거제도와 싸워왔던 그의 공이 컸죠. 헌법소원 심판 청구로 얻어낸 1인 2표제라는 제도가 상호작용했고, 덕분에 그해 총선에서 지역구 2석, 비례 8석 총 10석을 확보할 수 있었죠.”

- 실패도 많았습니다.

“그는 진보정치의 기틀을 다지는 데 평생을 바쳤어요. 많은 동지들이 떠나갈 때에도 끝까지 진보정당의 꿈을 놓지 않고 현장을 지켰죠. 결국 2000년 1월30일, 간절히 꿈꿨던 민주노동당이 세상에 나왔죠. 이후 어떻게든 민노당의 분당만큼은 막아보려 했는데 민노당이 분당하니까 노 전 의원은 자기 프로젝트가 끝났다고 했어요. 결국 민노당을 탈당했고, 2008년 18대 총선 때 진보신당 후보로 노원병에 출마했다가 패했어요. 2010년 서울시장 선거에서는 야권 표심의 분열을 일으킨다고 평생 먹을 욕을 이때 다 먹었어요. 그래도 노 전 의원은 남 탓 한 적이 없어요. 그에겐 2012년 통합진보당 파동 이후 진보정당의 이합집산 궤적이 큰 고통이었을 것입니다. 통합진보당 사태 때는 정치를 그만두고 싶다고까지 했으니까요. 결국 다양한 입장들이 있으니 진보적 다원주의를 인정하고 북유럽의 사회민주주의(사민주의)로 가자는 게 그의 생각이었어요.”

- 그의 의정 활동은 어땠나요.

“비례대표 초선 뒤 18대 총선에서 낙선한 후 2012년 19대(서울 노원병), 2016년 20대(경남 창원 성산) 총선에서 당선돼 3선 의원이 됐죠. 19·20대 국회 첫 공식 일정은 청소노동자들하고 밥 먹는 거였어요. 국회 들어와서 갑자기 한 ‘보여주기식 정치쇼’는 아니고 진심이었어요. 그들에게 노 전 의원은 같이 밥을 먹어주는 몇 안 되는 의원 가운데 하나였어요. 국회 입법 활동도 보면 굉장히 주도면밀하고 사전 준비를 많이 하는 분이었어요.”

- 그에게 가장 쓰라린 기억은 뭘까요.

“제 얘기를 그가 듣는다면 ‘아니야’라고 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요. 노 전 의원은 진보정당 정치인으로서는 이례적으로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인물이었지만, 당 안에서 조직적 지지를 얻는 데는 약했어요. 2007년 민노당 대선후보 경선에서 대중적 지지와는 달리 당원 투표에서 3위를 해 결선투표에도 오르지 못했어요. 제 생각엔 이때가 정치인으로서 상당히 좀 뼈아팠을 것 같아요. 2015년 정의당 당대표 선거에서도 똑같은 상황이 반복됐어요. 그때도 그의 승리를 의심하는 사람은 별로 없었는데 결과가 뒤집어지면서 심상정 의원에게 졌죠.”

- 결혼 생활도 평전에 공개됐는데요.

“김지선 선배가 인천에서 노동운동을 할 때 노 전 의원을 만나 결혼했어요. 김 선배 입장에서 가장 큰 불만이 ‘나도 같이 운동하는 사람인데 왜 어려움을 나한테 얘기하지 않나’ 하는 것이었어요. 노 전 의원은 ‘내가 유일하게 성공한 것이 김지선과의 결혼’이라고 공언할 만큼 부인을 신뢰했어요. 그가 부인을 어느 정도 신뢰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로 제가 이해할 수 없는 발언이 있어요. ‘삼성 X파일’ 사건으로 의원직을 잃고 2013년 치러진 노원병 보궐선거 때 김지선 선배가 출마했잖아요. 당시 지역구 세습이라며 비판의 목소리가 있었어요. 정작 그는 김지선은 자질 있는 노동운동 선배고, 외부에서 먼저 출마 요청이 있었다는 사실을 언급하면서 ‘세습’ 딱지를 붙인 것을 이해할 수 없다며 항변했다고 합니다. 누구보다도 대중 반응에 예민하고 정확했던 사람이 그런 얘기를 했다는 게 저로선 너무 이해가 안 돼요. 한편으론 그 정도로 부인을 신뢰했다는 얘기일 수도 있고요.”

[논설위원의 단도직입] “휴머니스트 노회찬의 ‘길동무’ 많아지면, 세상은 좀 더 나아질 것”
고 노회찬 의원이 6411번 버스에 앉아 있다(사진 위). 경기 남양주시 모란공원에서 ‘5주기’ 추모제가 열린 지난 22일 <노회찬 평전>이 묘소에 놓여 있다. 연합뉴스

고 노회찬 의원이 6411번 버스에 앉아 있다(사진 위). 경기 남양주시 모란공원에서 ‘5주기’ 추모제가 열린 지난 22일 <노회찬 평전>이 묘소에 놓여 있다. 연합뉴스

지금 현실을 그의 발언에 적용하는 것은
되레 ‘비노회찬적’인 것이 아닐까 생각

‘내 이름만 붙들고 미래로 못 나가면
결국 노회찬답지 않은 것이다’
내가 아는 그라면 그렇게 말했을 것

- 노 전 의원 하면 ‘6411 연설’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이 연설의 메시지는 ‘투명인간’에게 가까이 다가가지 못한 ‘투명 정당’에 대한 자성과 자책이 핵심입니다. 왜 많은 사람한테 울림을 줬을까 생각해보면, 각자도생만 강요하는 때에 사실 우리는 다 연결돼 있고, 그 연결망 안에 너도 예외는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해서가 아닐까요. 이번 5주기 추모 슬로건이 ‘같이 삽시다. 그리고 같이 잘 삽시다’인데요. 생전에 그가 ‘같이 잘 살자’며 꺼낸 비유가 있어요. ‘(부유세를 주장하며) 옆에서 굶고 있는데 암소 갈비 뜯어도 되느냐, 암소 갈비 뜯는 사람들이 불고기 먹으면 옆에 있는 사람은 라면이라도 먹을 수 있다.’ 나는 이 말이 갈비 뺏어서 먹자보다 더 혁명적인 얘기라고 생각해요. 그런 얘길 듣고 사람들이 ‘내 편’이라 느끼며 신뢰를 줬던 것이죠.”

- ‘마지막 하루’를 읽으면서 먹먹했어요.

“김지선 선배가 노 전 의원 죽기 전날 ‘드루킹 사건’ 연루 의혹 관련 기자회견을 하자고 했는데 그 제안을 받아들였으면 어땠을까 하는 안타까움은 있어요. 제가 돌아가신 며칠 후 페이스북에 ‘마지막 선택을 존중한다’고 적었거든요. 그에게 당은 확장된 자아였어요. 그래서 그의 마지막은 상황에 떠밀려서 한 선택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는 무신론자였지만, 만약 위에서 정의당을 보고 있다면 굉장히 안타까워하겠죠.”

- 노회찬의 못다 이룬 꿈이 진보정당의 집권인데요. 지금 노회찬이라면 뭐라고 말할까요.

“정치에 항상 현안을 반영했던 사람인데, 지금의 현실을 과거 노회찬 발언 등에 적용하는 것이야말로 ‘비노회찬적’인 것이 아닐까요. 제가 아는 노회찬이라면 ‘당신들의 언어를 찾고 당신들의 현장에 가 있어라’ 그렇게 말할 것 같아요. 정치는 그래야 하잖아요. 정리하면 ‘노회찬 이름만 붙들고 미래로 나아가지 못하는 것은 노회찬답지 않은 것이다’라고 했을 것 같아요.”

- 노회찬을 어떻게 기억해야 되는지요.

“그는 휴머니즘이 가장 진보적인 이념이고, 자신도 휴머니스트로 불렸으면 했어요. 휴머니즘은 관철돼야 할 어떤 가치인데 지금 우리 사회는 오히려 줄어드는 쪽으로 가고 있어요. 그는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만들고자 했고, 그 바탕에는 휴머니즘이 있었어요. 그래서 같이 잘 사는 일상에서의 구체적인 실천들은 정치가 아닌 어느 곳에도 있다고 했고, 이 일을 같이하는 사람들을 그는 ‘길동무’라고 불렀는데요. 그런 길동무가 많아지면 세상이 지금보다 좀 나아지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을 하는 거죠.”


“진보정당을 세상 중심에 세우려 한 노회찬 과업, 정의당서 넓고 깊게 걸음 내디뎌 달라”


5주기 추모제…배우자 김지선 “그가 힘든 현실에 걱정을 많이 할 것 같아 마음 아파”

“노회찬은 너무 꿈이 많았고 열심히 살았습니다. 현실은 너무 어렵고, 국민도 힘들어하는 상황으로 가는 것 같습니다. 여기 이정미 정의당 대표도 와 계시는데 넓게, 깊게, 천천히 가더라도 확실하게 가는 걸음을 내디뎌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노회찬이 걱정을 많이 할 것 같아서 마음이 아픕니다. 여기 계신 사랑하는 동지 여러분, 노회찬을 많이 사랑해주셔서 감사하고요. 저도 열심히 잘 살아내겠다고 약속드리고, 유족을 대표해 고맙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고맙습니다.”

고 노회찬 전 의원 5주기를 하루 앞둔 지난 22일 경기 남양주시 마석모란공원에서 열린 추모제에서 그의 배우자이자 유족 대표인 김지선씨가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정의당이 노회찬재단과 함께 주최한 추모제에는 이 대표 등 정의당 지도부와 의원단, 김영배 더불어민주당 의원, 조승수 재단 이사장 등 400여명이 참석했다. 김창희 노회찬평전 기획위원장은 재단이 기획한 지 4년 만에 세상에 나온 <노회찬 평전>을 영전에 바쳤다.

최근 재창당을 선언한 정의당은 ‘노회찬 정신’을 기리며 이를 잇는 혁신재창당을 통해 당을 재건할 것을 다짐했다. 이 대표는 추모사를 통해 “정의당이 무너지면 노회찬의 정신이 무너지고 노회찬이 지키려 했던 우리 사회 약자들의 삶이 무너진다”며 “수십년 진보정당을 세상의 중심에 분명히 세우시려 했던 그 과업을 정의당이 멈춰 세울 권리는 없다”고 말했다.

재단은 5주기를 맞아 지난달 27일부터 이달 23일까지를 추모기간으로 정하고 전국에서 <노회찬 평전> 발간 기념 북토크, 영화 <노회찬 6411> 특별상영회 등을 했다.


이명희 논설위원

이명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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