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동기본법, “아동판 차별금지법” 주장에 폐기될판

송진식 기자

아동을 보호 대상 아닌 권리 주체로…보수단체 반대에 막혀 국회서 표류 중

2023년 5월 3일 강훈식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국회에서 ‘아동기본법안’의 발의 취지와 제정 필요성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강훈식 의원실 제공

2023년 5월 3일 강훈식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국회에서 ‘아동기본법안’의 발의 취지와 제정 필요성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강훈식 의원실 제공

“모든 아동이 존중받으며 살 수 있도록 ‘아동기본법’ 제정을 촉구합니다.”

2023년 8월 9일 열린 ‘대한민국아동총회’에 참가한 10~17세 지역 아동대표 100명이 만장일치로 채택한 ‘특별결의문’ 내용이다. 올해 20회째를 맞은 아동총회는 ‘아동에게 영향을 미치는 정책과 문제에는 반드시 당사자인 아동의 의견을 반영해야 한다’는 취지로 마련된 기구다.

아동총회에서 지난해 특별결의문까지 채택해가며 아동기본법 제정을 요구한 것은 그만큼 법 제정에 대한 기대치가 높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1991년 ‘유엔아동권리협약’을 비준하고도 30년 넘게 이를 뒷받침할 근거법을 마련하지 못했다. 아동의 권리와 참여에 대한 사회적 인식도 여전히 낮다. 이는 아동학대 범죄와 ‘노키즈존’ 등의 사회적 문제로 나타났다. 아동단체와 학계 등의 지속된 요구 끝에 지난해 4~5월 국회에서 여야가 잇달아 ‘아동기본법안’을 발의했다. 윤석열 정부도 아동기본법 제정을 약속했다.

기대와는 달리 아동기본법안은 발의 후 내내 국회에서 표류하다 결국 해를 넘겼다. 일부 보수단체들이 “아동판 차별금지법”이라며 반대하고 나선 탓이다. 법안은 21대 국회 임기 종료와 함께 폐기될 가능성이 높다. 합계출산율이 0.778명(2022년 기준)으로 ‘국가 소멸론’까지 거론되는 나라. 아동들의 ‘삶 만족도’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내 최하위권을 맴도는 나라. 2024년 대한민국의 현주소다.

■아동은 단지 ‘보호’의 대상인가

아동권리보장원에 따르면 유엔아동권리협약은 아동(18세 미만)의 4가지 기본권을 제시하고 있다. 기본적인 삶과 안전·성장 등을 보장받는 ‘생존권’, 모든 형태의 학대나 차별로부터 보호받는 ‘보호권’, 교육·여가·문화생활 등을 누리기 위한 ‘발달권’, 의견을 말하고 존중받기 위한 ‘참여권’ 등이다. 국내 아동 관련 법 규제는 아동복지법, 청소년기본법, 초중등교육법 등 60여 개에 달하지만 아동권리협약에서 제시한 기본권을 명시한 법은 없다.

김형모 경기대학교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아동권리협약은 법적 구속력을 가진 국제협약으로 국내 법률과 동등한 효력을 가지며 협약당사국의 구체적 입법 의무도 규정하고 있다”며 “아동복지법 등 현재의 아동 관련 법률은 아동을 권리 주체가 아닌 보호 대상으로 인식하고 있어 협약의 온전한 이행을 위한 법적 기반을 제공하지 못하고 있다”고 밝혔다.

국회 차원의 아동 관련 입법 활동도 소극적이다. 2022년 세이브더칠드런이 21대 국회 임기 1년 동안 아동 관련 의정활동을 모니터링한 결과 전체 발의된 법안 중 아동 관련 법안은 5.4%로, 총인구 대비 아동비율(14.9%·2021년 기준)에 비해 비중이 작았다. 그나마 발의된 법안들도 78.2%가 아동학대 예방 및 대응, 복지, 양육, 가정 밖 아동보호 등 ‘보호 관점’의 법안이 대부분인 것으로 집계됐다. 아동 스스로 자신의 기본권에 대해 인지하고 있는 비율도 낮게 나타난다. 청소년정책연구원이 2022년 조사한 결과 “정책 참여 기회를 인지하고 있다”는 비율은 11%에 그쳤다.

2023년 8월 열린 ‘제20회 대한민국아동총회’에서 채택된 아동기본법 제정 촉구 특별결의문 내용 / 한국아동단체협의회 제공

2023년 8월 열린 ‘제20회 대한민국아동총회’에서 채택된 아동기본법 제정 촉구 특별결의문 내용 / 한국아동단체협의회 제공

정부 역시 현행 법체계의 한계를 인식하고 아동기본법 제정을 주요 과제로 추진 중이다. 정부는 지난해 4월 ‘윤석열 정부 아동정책 추진방안’을 통해 “아동을 독립된 인격체가 아닌 ‘부모에게 종속된 존재’, ‘보호와 육성의 대상’으로만 바라보는 사회적 인식이 여전하다”며 “모든 아동의 건강한 출생과 성장 지원을 뒷받침하기 위해 아동의 기본적인 권리와 국가·사회의 책임을 명시한 (가칭)아동기본법 제정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강미정 세이브더칠드런 아동권리정책팀장은 “아동정책은 책임 소재나 컨트롤타워가 불분명해 2020년 양천구 아동학대 사망사건(일명 ‘정인이 사건’)과 같이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 비극이 벌어진다”며 “제대로 된 아동정책 조정과 아동보호체계 수립을 위해서라도 아동기본법 제정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아동판 차별금지법” 보수단체 반대에 논의 중단

정부도, 국회도, 아동(단체)도 원하는 아동기본법안이 지난해 4~5월 국회에서 잇달아 발의됐다. 2020년부터 수차례 포럼과 토론회를 거쳐 정치권과 학계, 정부가 머리를 맞댄 결과물이기도 했다. 여당(양금희 의원안)과 야당(강훈식 의원안)이 각각 발의한 법안의 취지나 내용은 전반적으로 유사하다.

유엔아동협약에 기초해 아동이 ‘권리 주체’이자 인격체임을 명확히 하는 아동의 권리 규정을 뒀다. 아동의 권리 보장을 위한 정부와 지자체의 책임과 역할을 명확히 했다. 아동종합실태조사, 아동정책영향평가, 아동정책기본계획, 아동정책조정위원회에 관한 사항 등을 현행 아동복지법에서 이관하는 내용도 담겼다. ‘아동권리옹호관’을 신설해 아동권리의 침해 사안에 대한 조사 등을 전담하도록 했다. 아동단체의 의견을 적극 수용한 강 의원안이 보다 전향적이다. 아동의 권리보장에 대한 의무를 일반 국민과 기업에도 부여했다. 양 의원안에는 빠진 ‘아동에 대한 차별금지’ 조항도 명시됐다.

두 법안의 공동 발의에 참여한 여야 의원만 80명이다. 보건복지위원회는 법안 검토보고에서 “법안 제정 시 모든 아동정책과 제도 및 관련 입법의 방향키이자 균형추로서 아동의 삶의 질을 증진하고, 그 권리를 신장함에 있어 중요한 제도적 전환점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고 밝혔다.

그럼에도 법안은 상임위에서 제대로 법안 심사 한번 이뤄지지 못했다. 일부 보수단체들이 완강하게 법안에 반대하고 나선 탓이다. 이들은 “각 법안이 현행 아동복지법, 청소년기본법 등과 중복된다”며 “개별법에서 다루어야 할 권리 조항과 권리 구제 절차를 기본법에 포함한 것도 맞지 않다”고 주장했다. 법안이 부모의 친권과 양육권을 위협하고, 동성애에 대한 차별을 금지하는 등 ‘아동판 차별금지법’과 다름없다는 게 이들 주장이다. 법안을 대표 발의한 의원들에게는 항의 전화와 문자가 빗발치기도 했다.

총선이 코앞으로 다가온 상황에서 여야가 정치적 부담을 져가며 아동기본법안 제정에 나설 가능성은 높지 않다. 21대 국회 임기 종료와 함께 법안도 폐기되리라는 전망이 나온다. 정익중 아동권리보장원장은 “막상 기본법 내용을 보면 기존 아동복지법 등의 내용과 크게 다르지 않다. 기본법 제정을 통한 의식과 인식의 전환, 상징적 의미가 보다 중요하다고 본다”며 “새 국회가 출범하면 법안 찬반 양측 모두가 참여하는 논의의 장을 열어 법안 마련을 재추진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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