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가락 하나 닮았다고 내 자식인가

유신모 외교전문기자
3일(현지시간) 주요 7개국(G7) 외교·개발장관회의 참석차 영국을 방문한 토니 블링컨 미국 국무장관(왼쪽)과 정의용 외교부 장관이 영국 런던의 한 호텔에서 별도 회담을 열고 있다. 런던/AP뉴스

3일(현지시간) 주요 7개국(G7) 외교·개발장관회의 참석차 영국을 방문한 토니 블링컨 미국 국무장관(왼쪽)과 정의용 외교부 장관이 영국 런던의 한 호텔에서 별도 회담을 열고 있다. 런던/AP뉴스

지난 주말 미국이 공개한 대북정책에 대해 청와대 관계자는 3일 “환영할 만하다”고 평가했다. 외교적 해법과 단계적 접근법을 추구한다는 점에서다. 정부는 특히 미 당국자가 2018년 북·미 정상의 싱가포르 합의를 포함한 다른 합의들을 기초로 했다고 언급한 것에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이 그동안 미국에게 싱가포르 합의를 계승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해왔는데 미 당국자가 이를 언급한 것은 미국의 대북정책에 한국의 요구가 반영됐음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만족해 한다.

정부가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지, 아니면 외교적 성과로 부각시키기 위해 의도적으로 강조하고 있는 것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바이든 행정부의 대북정책은 ‘새로운 포뮬러(방식)’가 아니라는 것, 그리고 미국이 싱가포르 합의를 언급한 것은 그 합의를 계승하고 정책의 기본으로 삼겠다는 뜻이 아니라는 것이다.

바이든 대북정책은 새롭지 않다. 외교적 해법은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것이며 단계적 접근법도 이미 시도해봤던 방식이다. 트럼프 행정부가 ‘하노이 노딜’ 이후 강조해온 ‘포괄적 합의 이후 단계적 이행’과도 다르지 않다. 북핵 문제를 한 방에 해결해줄 참신한 공식이 있을리 없으므로 당연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특히 미국이 싱가포르 합의를 언급한 것에 과도하게 무게를 둬서는 안된다. 이전 정부의 합의를 공식적으로 뒤집지 않는 전통을 존중하고 한국 정부의 체면을 감안한 레토릭일 가능성이 높다. 만약 미국이 싱가포르 합의를 계승하기로 결정했다면 바이든의 대북정책은 지금과 같은 모양이 아니라 북한이 적극 호응할 수 있는 신뢰구축 조치를 앞세웠을 것이다.

싱가포르 합의는 신뢰구축-평화체제-비핵화의 순서로 구성돼 있다. 북한이 미국에게 비핵화보다 신뢰구축을 위한 행동적 조치를 먼저 취해야 한다고 요구할 수 있는 빌미를 제공했다. 트럼프의 대표적인 외교실패 사례다. 트럼프 행정부가 ‘동시·병행론’을 들고 나온 것은 싱가포르 합의의 실패를 만회하고 후순위에 처져있는 비핵화를 앞으로 가져오기 위한 것이었다.

싱가포르 합의는 북·미 대화가 깨진 원인이기도 하다. 합의 한 달 뒤인 2018년 7월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은 평양을 방문해 비핵화 실무그룹 구성을 제안했다. 이에 대해 북한은 ‘강도적 요구’라고 반발했다. 북·미 대화는 사실 그때 끝났다. 이후 과정은 대화 재개를 위해 이것저것 해보다 결국 실패한 시도들의 연속일뿐이다. 비핵화가 먼저인지, 신뢰구축 조치와 평화체제 논의가 먼저인지를 놓고 벌어졌던 북·미 간 이견을 해소하지 않은 채 싱가포르 합의로 돌아가는 것은 지금까지 있었던 대책없는 실랑이를 계속하겠다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미 당국자가 싱가포르 합의를 언급했다고 해서 이 합의를 계승할 것이라고 보는 것는 섣부른 판단이며, 한국의 요구가 반영된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아전인수다. 다른 것은 다 제쳐둔 채 발가락 하나 닮았으니 내 자식이라고 주장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만약 정부가 이를 근거로 ‘미국의 대북정책은 싱가포르 합의를 기초로 하고 있다’고 인식한다면 중대한 정책적 오류를 빚게될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지금 중요한 것은 한국의 요구가 반영됐는지 여부가 아니다. 바이든의 접근법은 북한의 핵위협을 단계적으로 감소시키고 그에 다른 보상을 매 단계마다 제공하는 작업을 반복함으로써 비핵화에 이르게 한다는 것이다. 작은 성과를 얻어내는 것은 쉽지만 비핵화에 이르는 길은 매우 길고 험난할 수 밖에 없다. 도중에 중단된다면 북한을 핵보유국으로 인정하는 결과가 나오게 되는 매우 위험한 방법이기도 하다. 따라서 한국은 이 험난한 여정에 미국과 함께 동행해 종착점까지 완주하도록 독려하고 협력하고 감시할 길을 찾아야 한다. 이번 미국의 대북정책에서 유일하게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부분은 단계적 접근법이나 외교적 해법 추구나 싱가포르 합의 언급이 아니라, ‘최종목표를 완전한 비핵화로 설정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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