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정부의 '대만 문제' 인식 수준

유신모 기자

지난주 열린 한·미 정상회담의 공동성명을 처음 봤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은 ‘한국이 드디어 미·중 사이에서 전략적 좌표를 설정하고 움직이기 시작한 것일까’라는 의문이었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는 것을 깨닫기까지는 몇 시간도 채 걸리지 않았다. 한국이 동맹 사안·지역 현안·글로벌 이슈 등 모든 면에서 미국의 입장을 따라간 것은 국제질서의 흐름에 맞춰 고민과 준비 끝에 내린 전략적 결단이 아니라, ‘판문점 선언과 싱가포르 선언 등 기존의 남북 간, 북·미 간 약속에 기초한 외교와 대화’라는 문구를 공동성명에 넣기 위한 것이었음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었다.

대표적인 예가 한·미 정상회담에서 나온 중국 관련 언급을 공동선언문 잉크도 마르기 전에 정부가 주워담기 시작한 것이다. 정부는 이번 정상회담에서 남중국해, 쿼드(Quad, 미국·일본·인도·호주 4개국 협의체), 인권 문제는 물론 대만 문제까지 미국의 입장을 따라갔다. 특히 ‘대만해협의 안정과 평화의 중요성’을 강조한 대목은 단연 눈길을 끌었다. 이 부분에 관심이 집중되자 정부는 전방위적 진화에 나섰다.

정의용 외교부 장관은 지난 24일 KBS 방송에 출연해 “대만해협의 평화와 안정이 역내 평화와 안정에 매우 중요하다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며 “이러한 사실을 공동성명에 표현한 것이며 매우 일반적인 내용”이라고 주장했다. 정 장관은 또 “한반도 문제를 평화적인 방법으로 해결해야 된다는 원칙과 양안관계의 문제도 평화적으로 해결돼야 한다는 원칙은 사실 같은 성격”이라며 “중국도 이해를 해 줄 것”이라고 말했다.

정 장관의 해명은 이 사안에 대한 정부의 인식 수준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다. 대만 문제는 중국의 국가정통성과 직결된 사안이다. 타국이 이 같은 언급을 하는 것은 ‘하나의 중국’ 원칙을 거부하는 것으로 간주한다. 평화와 안정은 어디에 써도 좋은 표현이지만 대만해협에 갖다붙이면 의미가 달라진다. ‘대만해협의 안정과 평화’가 외교적으로 뭘 의미하는지 모르는 나라는 하나도 없다.

이 표현이 일반적이고 원칙적이고 당연한 말이라는 정부의 주장은 사실과 다르고 설득력도 없다. 이 표현은 미국조차도 트럼프 행정부 후반기부터 조금씩 조심스럽게 쓰기 시작한 것이다. 일본이 지난달 미·일 정상회담에서 이 표현을 처음 따라갔을 때 일본 내부에서도 “루비콘 강을 건넜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파장이 컸다. 정부의 주장대로 일반적으로 많이 쓰이고 원칙적이고 당연한 말이라면 왜 한국은 한·중 수교 이후 30년 동안 이 표현을 한 번도 쓰지 않았는지 묻고 싶다. 또 정부는 앞으로도 이 문제가 대두됐을 때 “대만해협의 평화와 안정이 중요하고 이를 위해 미국과 협력하겠다”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매번 할 용의가 있는지도 묻고 싶다.

‘한반도 문제 평화적 해결’과 ‘양안 관계 문제 평화적 해결’이 같은 성격이라는 주장은 기초적인 상식에도 맞지 않는 말이다. 한국은 중국과 수교할 때 대만과 단교했다. 다른 나라도 마찬가지다. 대만은 국제사회에서 배제됐고 나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북한은 헌법상으로만 우리 영토일 뿐 국제적으로는 유엔 회원국이며 160여개 국과 수교한 독립국가다. 한 나라의 외교장관이 공개적인 자리에서 한반도 평화와 양안의 평화가 같은 성격이라고 주장했다는 것이 잘 믿기기 않는다.

이번 한·미 정상회담에서 정부가 보여준 모습은 정책적 전환도, 고민에 찬 결단도 아니었다. 결기가 없으면 말을 꺼내지나 말았어야 했다. 미국 앞에서는 한껏 내질러 놓고 돌아와서는 그런 뜻이 아니었다고 하면 해결될 것으로 생각했을 수도 있다. 바이든 대통령도 “굿 럭”이라고 하지 않았는가. 실제로 중국이 당장 사생결단을 내겠다고 나서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한·중 관계는 2021년 5월 21일 이전으로 돌아가기 쉽지 않다. 그리고 이런 태도는 중국뿐 아니라 미국에게도 신뢰를 주지 못한다. 손바닥으로 자신의 눈을 가리면 하늘이 안 보이겠지만, 그렇다고 하늘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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