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공기관장, 차라리 대통령 임기와 맞추자”

김지환 기자

정권교체 때마다 반복되는 신·구 권력 인사권 공방

2019년 11월 8일 당시 문재인 대통령과 윤석열 검찰총장이 청와대에서 열린 반부패정책협의회에서 인사하고 있다. / 청와대사진기자단

2019년 11월 8일 당시 문재인 대통령과 윤석열 검찰총장이 청와대에서 열린 반부패정책협의회에서 인사하고 있다. / 청와대사진기자단

“당선인은 부동산 매매 계약에서 대금을 다 지불하고 명도(明渡)만 남아 있는 상태라고 볼 수 있다. 매도인에게 아무리 법률적 권한이 있더라도 들어와 살 사람의 입장을 존중해 본인이 사는 데 필요한 조치는 하지만 집을 고치거나 이런 건 잘 안 하지 않나.”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이 지난 3월 24일 서울 통의동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사무실로 출근하는 길에 기자들과 만나 이렇게 말했다. 원칙적으로 문재인 대통령이 차기 정부와 함께 일해야 할 인사를 임기 마지막에 임명하는 게 바람직하지 않다는 견해를 밝힌 셈이다.

20대 대통령선거 이후 정권교체기로 접어들면서 ‘인사 알박기’ 논란이 커지고 있다. 윤 당선인 측이 문 대통령이 남은 임기 동안 공공기관장을 포함한 주요 인사 임명을 자제해달라는 목소리를 내면서다. 문 대통령이 지난 3월 23일 한국은행 총재 후보로 이창용 국제통화기금(IMF) 아시아태평양담당국장을 지명한 걸 두고도 파열음이 터져 나왔다. 청와대는 윤 당선인 측 의사를 반영해 인사를 했다고 밝혔지만 윤 당선인 측은 “협의하지 않았다”며 양측 간 진실공방이 벌어졌다. 감사원 감사위원 2명과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상임위원 1명 인사를 두고도 조율이 쉽지 않으리라는 전망이 나온다.

기업분석연구소 리더스인덱스가 최근 공공기관 경영 정보 공개시스템(알리오)을 통해 공공기관 현황을 조사한 결과를 보면 새 정부의 출범(5월 10일) 이후에도 350개 공공기관의 기관장 및 상임감사 총 460명(공석 23명 포함) 중 290명(63%)은 임기가 1년 이상 남아 있는 것으로 나온다. 이중 207명(45%)은 임기가 2년 이상 남아 있다.

공공기관장 등의 인사를 둘러싼 신·구 권력 간 갈등은 정권교체기마다 되풀이되고 있다. 야당일 때는 “낙하산 인사, 알박기” 등의 표현을 동원해 현직 대통령의 인사권 행사를 공격하지만 여당이 되면 “정당한 인사권 행사”라며 방어에 나선다. 전형적인 ‘내로남불(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다. 정권교체 때마다 반복되는 이 소모적 논란을 해소할 방안은 없는 것일까.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노무현 대통령은 형사적·민사적 위법문제가 없거나 조직운용과 경영과정상의 문제가 없을 경우에는 웬만하면 임기를 존중해줘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그러나 어지간히 하신 분들은 스스로 거취를 정리해야 할 필요가 있다.” 2004년 5월 당시 정찬용 청와대 인사수석이 공공기관장 인사를 놓고 한 말이다. 참여정부 청와대가 사실상 일부 기관장들의 용퇴를 촉구한 것으로 해석됐다.

이명박 정부 당시엔 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2008년 3월 취임 뒤 첫 강연을 하면서 “이전 정권의 정치색을 가진 문화예술계 단체장들은 스스로 자리에서 물러나는 게 자연스럽다”고 말했다. 참여정부가 임명한 문화예술계 단체장들을 겨냥한 사실상의 퇴진 요구였다. 이후 유 장관은 김정헌 한국문화예술위원장, 김윤수 국립현대미술관장 등의 실명을 거론하면서 “스스로 물러나는 게 순리”라고 압박하기도 했다.

같은 정당에서 정권 재창출을 했다고 크게 다르진 않았다. 전직 대통령 박근혜씨는 2013년 3월 11일 취임 후 첫 국무회의를 주재하면서 “각 부처 산하기관과 공공기관에 대해 앞으로 인사가 많을 텐데 새 정부의 국정철학을 공유할 수 있는 사람으로 임명할 수 있도록 노력해달라”고 말했다. 이명박 정부에서 임명한 이들의 ‘대대적 물갈이’ 예고였다.

문재인 정부 역시 이전 정부가 임명한 공공기관장을 무리하게 쫓아내려 했다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않다. 김은경 전 환경부 장관이 박근혜 정부 때 임명한 환경부 산하 기관 임원들의 사직을 종용했다가 징역형을 선고받은, 이른바 ‘환경부 블랙리스트’ 사건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판결문에는 사표 제출을 종용받은 이들의 법정 진술이 담겨 있다.

“새 정권이 공공기관 임원의 임기가 남았음에도 불구하고 정권이 바뀌었다는 이유만으로 사표 제출을 요구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라고 생각했으나, 정권이 변경되면 이사장의 경우 사표를 내는 관행이 있었으므로 감수해야겠다는 생각은 했다.”(A공단 이사장)

“사표를 내지 않고 버티면 가장 고생할 사람이 환경부 운영지원과 후배들이고, 사표를 제출하지 않는 경우 환경부와 공단의 업무 협조가 잘되지 못할 우려가 있었기 때문에 임원회의 자리에서 사표 제출을 하라는 말을 듣고 사표를 제출했다.”(A공단 본부장)

“사표 제출을 거부하는 경우 여러 부끄러운 일들을 들춰내 모욕을 주는 등의 방법으로 사퇴하도록 유도하는 사례를 본 적이 있다.”(B공사 기획이사)

김 전 장관은 사표를 제출하지 않은 환경공단 상임감사의 표적 감사를 지시하기도 했다. 사표 제출 종용과 표적 감사 등이 직권남용죄에 해당한다는 대법원 판례가 나오면서 공공기관운영에 관한 법률(공운법)에 따라 임기를 보장받은 기관장, 이사·감사를 솎아내려는 시도는 쉽지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윤 당선인 측이 최근 문 대통령의 인사권 행사를 두고 강하게 문제를 제기하고 나선 이유다. 대법원 판례라는 일종의 가이드라인에도 차기 정부는 문재인 정부에서 임명된 공공기관장의 사퇴를 압박하려는 유혹을 느낄 수밖에 없다. 선거 공신들을 비롯해 챙겨야 할 ‘자기 식구’들이 많기 때문이다.

박근혜 정부 때 임명된 환경부 산하기관 임원들에게 사직을 종용한 혐의로 기소된 김은경 전 환경부 장관이 지난해 2월 9일 1심 선고 공판에 출석하기 위해 서울중앙지방법원 청사로 들어오고 있다. / 김영민 기자

박근혜 정부 때 임명된 환경부 산하기관 임원들에게 사직을 종용한 혐의로 기소된 김은경 전 환경부 장관이 지난해 2월 9일 1심 선고 공판에 출석하기 위해 서울중앙지방법원 청사로 들어오고 있다. / 김영민 기자

■제도와 현실의 괴리

공공기관장 인사 논란 해소를 위해 살펴야 할 두가지 쟁점은 ‘임명 방식’과 ‘임기’다.

공공기관장 임명 방식과 관련한 행정학계의 오랜 논쟁은 ‘실적제냐, 엽관제냐’다. 엽관제는 인사권자와의 정치적·개인적 관계를 기준으로 기관장을 임명하는 방식을 말한다. 대통령의 국정철학과 가치를 공유하는 인물들을 공공기관장으로 임명할 필요가 있다는 논리다. 따라서 ‘민주성’을 담보할 순 있지만 전문성이 부족한 인사를 임명할 여지 또한 크다는 게 엽관제의 단점이다.

이에 반해 실적제는 공공기관장의 당파성과 같은 정치적 요인이 아니라 능력, 자격을 임용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는 논리에 기반을 둔다. 공운법은 공공기관장 임기 3년(이사·감사는 2년)을 보장하고 있다. 비위행위, 경영실적 부진 등 특별한 이유가 없으면 임기 중 기관장을 해임해선 안 된다는 취지다.

공운법은 공정하고 투명한 절차를 거쳐 전문성을 갖춘 기관장을 선발하기 위해 임원 후보의 공개모집과 추천, 임원추천위원회의 심사와 추천, 공공기관운영위원회의 검토 등의 절차도 규정하고 있다. 따라서 현재 공운법은 실적제의 취지를 반영한 형태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법과 현실의 간극은 넓다. 공공기관 임원 자리는 여전히 전리품 혹은 대통령의 정치적 보상수단으로 활용되는 측면이 있다. 전문성을 갖춘 인사를 공정한 절차를 거쳐 임용하는 사례가 오히려 예외적이라는 평가까지 나온다.

이 때문에 실적제에 근거해 공공기관의 정치적 임용을 근절하는 데 초점을 맞출 게 아니라 엽관제라는 현실을 인정하는 바탕 위에서 논의를 풀어가야 한다는 문제의식이 커지고 있다. 이른바 ‘좋은 낙하산’이 내려올 수 있도록 제도와 관행을 손질하는 게 더 합리적인 접근이라는 주장이다.

김주찬 광운대 행정학과 교수는 2018년 8월 한국조세재정연구원이 주최한 좌담회에서 “낙하산 인사 자체가 문제라기보다는 ‘어떤 낙하산 인사가 문제인가, 우리가 낙하산 인사를 어디까지 인정할 것인가’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며 “대통령제 국가에서 무조건 낙하산 인사를 하지 못하게 한다거나 낙하산 인사라 해서 일방적으로 매도하는 건 그다지 정직하지 못하다”고 말했다. 김갑순 동국대 회계학과 교수도 “모든 자리를 시험에 의해 배분할 수 없다. 나머지 자리는 대부분 정치적 과정에 의해 배분된다”며 “따라서 그 자체를 받아들이고 잘 작동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투명성을 더 높여 암실 거래처럼 이뤄지는 것은 막아야 할 것”이라고 짚었다.

유상엽 연세대 행정학과 교수는 2019년 9월 한국행정연구원, 한국행정학회가 공동 주최한 세미나에서 임명 방식 개편을 통해 공공기관장의 ‘민주성’과 ‘전문성’을 동시에 확보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임원추천위원회와 공공기관운영위원회가 제 기능을 충실히 수행하면 대통령이 추천한 인물의 전문성을 검증할 수 있다. 따라서 대통령도 전문성을 갖춘 인물 가운데 대통령의 국정철학을 지지하는 인사를 추천할 수 있게 된다. 이를 위해 임원추천위원회의 기관장 후보자 심사를 보다 엄격하게 하고, 필요하면 블라인드 심사 도입을 추진하되 심사의 투명성과 공정성을 담보하기 위해 회의록을 어느 정도 공개하는 방안도 고려할 수 있다.”

미국 플럼북 표지

미국 플럼북 표지

■한국판 플럼북

‘한국판 플럼북’도 하나의 대안으로 꼽힌다. 최근 공공기관장 임명을 둘러싼 논란이 커지면서 다시 주목을 받고 있는 것이 미국의 플럼북(plum book)이다. ‘미국 정부 정책 및 지원 직책(The United States Government Policy and Supporting Positions)’이 공식 명칭인 이 책은 표지 색상이 자두(plum)색이어서 ‘플럼북’이라고 부른다.

플럼북은 미국 대통령이 임면권을 가진 연방정부 9000여개의 직책명, 근무지, 재직자의 성명, 임명 방식, 급여, 임기 및 임기 만료 시점 등의 정보를 담고 있다. 미 의회는 4년마다 대통령선거 직후 이 책을 발간한다. 조 바이든 대통령의 당선 직후인 2020년 12월에 발간한 플럼북은 분량이 200페이지가 넘는다.

플럼북은 1952년 드와이트 아이젠하워가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처음 만들어졌다. 22년 만에 정권을 잡은 공화당이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임명할 수 있는 연방정부의 직책 리스트를 전임 정권에 요구했는데 이것이 플럼북의 기원이 됐다.

국내에서도 플럼북을 언급한 적이 있다. 참여정부 청와대의 박남춘 인사수석은 2006년 8월 공개한 글에서 “장기적으로 여야 간 합의만 이뤄진다면 우리라고 대통령의 정치적 임명 직위를 명확히 규정한, 미국의 플럼북 같은 합의된 틀을 갖추지 못할 이유가 있겠는가”라고 적었다. 당시 한나라당이 참여정부 인사를 두고 “낙하산”, “코드인사”라는 비판을 이어가자 “책임정치에 걸맞은 책임인사를 제도화할 수 있도록 머리를 맞대자”며 응수하는 과정에서 나온 발언이었다.

유상엽 교수는 기자와 통화하면서 “한국판 플럼북에 누가 어떤 자리에 가는지, 자격요건이 무엇인지 등을 한꺼번에 공개하면 대통령이 정치적 임용을 한다 해도 전문성이 없는 무자격자를 임용하는 데 부담을 느낄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이어 “플럼북에는 대통령이 임명할 수 있는 자리에 대한 정보를 담기 때문에 그 이외의 자리는 대통령이 임명할 수 없는 자리라고 선을 긋는 효과도 있다”며 “대통령한테도 플럼북이 무자격자가 아니라 좋은 사람을 쓸 수 있는 ‘변명거리’가 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미국 플럼북도 한계는 있다. 플럼북의 발간 주기가 4년이기 때문에 시민들이 그사이 어느 자리에 누굴 임명했는지 파악하는 데 어려움이 있다. 미 감사원은 2019년 발표한 보고서에서 “정치적으로 임용돼 행정부에서 일하는 사람들에 관해 공개적으로 활용 가능하고, 포괄적이면서도 제때 볼 수 있는 단일한 소스가 없다”며 플럼북의 점검을 권고했다. 이 때문에 한국판 플럼북은 수시로 업데이트되는 상황을 체크할 수 있도록 디지털 형태로 만들고, 미국 플럼북에는 없는 자격요건을 포함시키자는 제안도 나온다.

“공공기관장, 차라리 대통령 임기와 맞추자”

■고양이 목에 방울 달기

남은 쟁점은 ‘공공기관장의 임기를 어떻게 할 것인가’다. 정권교체기마다 벌어지는 소모적 논란을 막기 위해 공공기관장의 임기를 아예 대통령의 임기와 맞추는 방안을 고려해보자는 제안이 꾸준히 나오고 있다. 세부적으로 살펴보면 기존의 공공기관장 임기 3년을 유지하면서 1년씩 두 번 더 재임할 수 있는 기회를 허용하는 방안, 임기를 2.5년으로 하는 방안, 장·차관처럼 별도의 임기를 정해두지 않는 방안 등이 있다. 김정우 전 더불어민주당 의원(현 조달청장)이 2019년 새 정부 출범 시 기존 공공기관장의 임기가 만료된 것으로 간주하는 공운법 개정안을 발의한 전례도 있다. 다만 기관장 견제를 위해 독립성이 필요한 공공기관의 감사, 검찰총장·감사원장 등 정치적 독립이 필요한 자리는 임기를 보장하자는 의견이 다수다.

민경률 한국조세재정연구원 초빙연구위원은 2019년 8월 ‘공공기관 임원 임명에 관한 논의’ 좌담회에서 “미국의 경우 기관장 임기를 정해놓지 않고, 대통령 임기와 같이 연동하는 것으로 생각한다”며 “다만 기관장이나 임원들이 대통령의 임기에 맞춰 교체됐을 때 정치적 균형점을 유지하기 위해 임원의 절반 정도는 대통령과 같은 정당의 사람을 임명하고 나머지 절반은 다른 정당의 사람을 임명하는 것을 기관의 개별법에 명시하기도 한다. 기관장의 임기를 대통령 임기와 연계해 국정 운영의 효율성을 높이는 동시에 균형점을 갖추는 방안도 함께 고려해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제도와 현실 간 괴리를 해소하고, 정권교체기 때마다 반복되는 논란을 해소하기 위한 논의는 꾸준히 있었다. 하지만 법제도 개선을 위한 실질적 동력은 여전히 약한 상황이다. 집권세력은 임기 마지막까지 조금이라도 더 ‘자기 사람’을 임명하려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대통령 임기와 공공기관장의 임기를 맞추는 데 소극적이게 마련이다. 과연 누가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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