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법원으로 가”...문제 해결능력 상실한 정당정치

김찬호 기자
이준석 전 국민의힘 대표가 지난 8월 17일 서울남부지법에서 열린 당 비상대책위원회 효력 정지 가처분 신청 사건 심문을 마친 뒤 취재진 질문에 답변하고 있다. / 국회사진기자단

이준석 전 국민의힘 대표가 지난 8월 17일 서울남부지법에서 열린 당 비상대책위원회 효력 정지 가처분 신청 사건 심문을 마친 뒤 취재진 질문에 답변하고 있다. / 국회사진기자단

“낭만 섞인 결말은 말 그대로 가능성이 없다.”, “추가 징계를 촉구하겠다.”

이준석 전 국민의힘 대표와 국민의힘 주류세력이 서로를 겨냥해 내놓은 말이다. 이들의 대립은 반격에 재반격을 이어가며 장기화하고 있다. 이 전 대표의 ‘성 상납 증거인멸 교사 의혹’에서 시작한 논란도 어느새 ‘당권투쟁’으로 본질이 변했다. 패배하는 쪽은 단순히 정치적 주도권을 빼앗기는 것이 아닌, 정치생명을 장담하기 어려울 전망이다.

그런데 한국 정치사에서 이러한 당내 갈등은 그리 낯선 상황이 아니다. 정권 교체기나 당내 세대교체기에는 늘 크고 작은 갈등이 있었다. 정치생명을 건 치열한 싸움이 반복됐지만 정치의 본질이 위협받은 적은 없다. 적어도 ‘정치는 정치답게’ 갈등을 해결해 왔기 때문이다. 이번 국민의힘 사태가 주목받는 것은 이러한 ‘정치다움’의 원칙이 깨졌기 때문이다. 갈등을 ‘대화와 타협’으로 해결할 능력을 상실한 정치는 법원에 결정을 맡기고 있다.

실제로 이 전 대표가 국민의힘과 주호영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을 상대로 낸 비대위 효력정지 가처분 신청에 대해 법원은 지난 8월 26일 ‘국민의힘을 상대로 낸 신청은 각하, 주 위원장을 상대로 낸 신청은 인용’했다. 이로 인해 주 비대위원장의 직무가 정지됐다. 사실상 법원이 이 전 대표의 승리를 결정한 모양새다.

국민의힘 주류세력은 지난 8월 28일 긴급 의원총회를 열고 곧바로 반격에 나섰다. “(법원 결정이) 비대위 자체를 부정한 것은 아니다”는 논리로 새 비대위를 구성하기로 하고, 이를 위한 당헌·당규 개정을 결정했다. 권성동 원내대표를 유임시키고, 이 전 대표에 대해서는 추가 징계도 추진하기로 했다. 핵심은 결국, 법원이 비대위를 부정할 수 없게 당헌·당규를 개정한다는 것이다.

정치는 사회적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존재한다. 이를 위해 ‘대화와 타협’이 필요하다. 한국 정치권은 자신들 내부 문제도 ‘대화와 타협’으로 해결하지 못한다. 이로 인해 법원에 갈등 해결을 맡긴다. 그렇다면, 의문이 생긴다. 대체 한국 사회에서 정치가 왜 필요할까.

■“가처분을 한방 더 맞아야 한다”

이 전 대표의 비대위 가처분 신청으로 시작된 싸움은 ‘대화와 타협’의 정치가 법원 결정에 영향을 받는 상황을 만들었다. 정치인들 스스로 “상대가 말이 통하지 않는다. 설득할 생각도 없다”는 것을 자인한 셈이다. 특히 국민의힘의 ‘당헌·당규’를 개정해 법원이 비대위를 부정할 수 없게 만든다는 복안은 우려를 낳는다.

이 전 대표가 낸 가처분 신청이 인용된 핵심 요인은 국민의힘이 비대위를 출범할 만한 ‘비상상황’인지 여부다. 현행 국민의힘 당헌 제96조 제1항은 “당대표가 궐위되거나 최고위원회의의 기능이 상실되는 등 당에 비상상황이 발생한 경우 안정적인 당 운영과 비상상황 해소를 위해 비대위를 둘 수 있다”고 규정한다. 법원은 현 상황이 당헌이 규정한 비상상황 요건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봤다. 이에 국민의힘 주류세력은 당헌 제96조 제1항을 ‘선출직 최고위원 5명 중 4명 이상 궐위된 경우를 비대위 전환이 가능한 비상상황으로 한다’는 내용으로 개정하려고 한다. 법을 만드는 입법부 소속 정치인들이 법을 해석하는 사법부 판사의 뜻에 맞춰 당헌을 개정하는 상황이다.

이를 두고 정치학자들은 비판의 목소리를 낸다. 이준한 인천대 정외과 교수는 “정당정치가 풀어야 할 문제를 법적 다툼으로 해결하겠다고 하면, 왜 정치인을 따로 선출하는 것이냐”며 “정치인들 스스로 정당을 법원보다 아래로 만들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러면서 “이 전 대표, 국민의힘 모두 법원 결정에 집착할수록 국민은 입법부가 사법부 밑이라고 인식하게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신율 명지대 정외과 교수 역시 비슷한 우려를 나타냈다. 신 교수는 “법원 결정도 ‘비대위의 정당성 자체를 부정한 것이냐’, ‘비대위가 단순히 성립요건이 안 된다는 것이냐’로 해석이 엇갈리고 있다”며 “이런 상황에서 당헌·당규를 고쳐 법원을 설득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고, 설사 법원을 설득하더라도 당헌·당규를 고치는 방식이 정당했느냐는 또 다른 문제를 만들 것”이라고 지적했다.

실제로 국민의힘 내부에서도 비판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국민의힘은 추석 전 새로운 비대위를 출범하기 위한 속도전을 시작했다. 국민의힘이 새 비대위를 꾸리려면 반드시 상임 전국위원회와 전국위원회를 거쳐야 한다. 이에 반대해 국민의힘 상임전국위·전국위 의장이었던 서병수 의원이 지난 8월 31일 의장직을 사퇴했다. 서 의원은 사퇴 기자회견에서 “당이 비대위로 가선 안 된다”며 “제 소신과 생각을 지키면서도 당에 불편을 주거나 지도부가 가는 방향에 걸림돌이 되지 않을까 고심한 끝에 제 직을 내려놓는 게 타당하다는 결론을 내렸다”고 말했다.

서 의원 사퇴 후 박정하 국민의힘 수석대변인은 “절차가 순조롭게 진행이 된다면 추석 연휴 전인 9월 8일 목요일경, 비상대책위원회가 출범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고 밝혔다. 이에 이 전 대표는 “가처분을 한방 더 맞아야 한다”며 “비대위 활동에 단계별로 효력정지 가처분 신청을 넣는 방안도 고려하고 있다”고 언론에 밝혔다. 정당정치가 다시 법원 앞으로 달려가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8월 25일 충남 천안 재능교육연구원에서 열린 국민의힘 국회의원 연찬회에 참석해 의원들과 인사하고 있다. / 대통령실사진기자단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8월 25일 충남 천안 재능교육연구원에서 열린 국민의힘 국회의원 연찬회에 참석해 의원들과 인사하고 있다. / 대통령실사진기자단

■정치력 없는 정치인들의 시대

국민의힘 갈등에서 주목받는 것은 법원뿐만이 아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윤 대통령의 행보 역시 주목받고 있다. 사실, 정부 탄생에 힘을 모았던 세력이 새 정부 출범 4개월여 만에 ‘파국’을 맞은 것은 한국 정치사에 유례를 찾기 어려운 일이다. 대통령선거를 중심으로 모인 ‘소수동맹’의 붕괴 관점에서 봐도 이는 독특하다. 일반적으로 대통령선거를 치르며 형성된 정치세력 간 연합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서서히 붕괴한다. 당내 세력이 대통령의 지지율이 하락하는 시점에 이합집산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윤 대통령은 집권 약 4개월차라는 점이다. 당내 세력이 먼저 대통령 지지율 하락을 초래할 수 있는 갈등을 만들 유인이 없다. 결국 국민의힘 내분은 대통령을 주요 변수로 놓아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는 것은 이 때문이다. 윤 대통령은 “당무에 개입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거듭 밝히고 있지만, 갈등의 실상은 ‘윤 대통령과 이 전 대표의 싸움’이라는 의미다.

실제로 과거 정치권에서 혼란이 발생하면 대통령의 ‘우려’ 표명이나 정치적 영향력을 가진 인물의 중재로 갈등이 봉합되는 사례가 많았다. 현재는 그러한 해법이 작동하지 않는다. 윤 대통령 스스로 권 원내대표에게 “내부총질이나 하는 당대표”라는 문자를 보내며 갈등 확산에 기여한 모양새다. 이 교수는 “결국 이번 싸움의 본질은 대통령과 이 전 대표의 갈등인데 어느 쪽도 양보나 포용을 하지 않으며 피로감만 높아지는 상황”이라며 “이들의 갈등이 정치적 노선, 정책방향 등의 건설적 사안이 아닌 대통령과 당대표의 감정싸움으로 전개되는 것에 양측 모두 책임감을 느껴야 한다”고 말했다.

영향력을 갖춘 정치인의 중재도 기대하기 어렵다. 현 정치권에는 갈등을 수습할 정치력을 갖춘 인물이 없다는 의미다. 신 교수는 “이번 사태는 정당이나 정치권이 갈등 당사자들을 대화로 중재할 능력이 없음을 보여주는 사례”라며 “결국 사태가 장기화되면 국정감사 등의 의회 본연의 기능이 후순위로 밀리고, 그 피해는 국민들에게 이어질 것”이라고 지적했다.

국민의힘 사태는 정치권 스스로 ‘갈등 해결 능력이 없다’, ‘중재를 담당할 정치력을 갖춘 인물도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가 되고 있다. 정치인들이 중심이 된 ‘윤핵관’(윤석열 대통령 측 핵심 관계자)을 대신해 새롭게 ‘검핵관’(검찰 핵심 관계자)이라는 말이 부각되는 상황에서 국민의힘 내분이 정국에 어떤 결과를 만들지 주목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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