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식 팔 수 없다는 공직자

허남설 기자
유병호 감사원 사무총장(왼쪽)과 박성근 국무총리 비서실장. 연합뉴스 사진 크게보기

유병호 감사원 사무총장(왼쪽)과 박성근 국무총리 비서실장.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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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레터 점선면] 주식 팔 수 없다는 공직자
[뉴스레터 점선면] 주식 팔 수 없다는 공직자
2003년 2월, 노무현 대통령이 진대제 당시 삼성전자 사장을 정보통신부 장관에 발탁했습니다. 진보적 성격이 강했던 정부에서 재벌대기업 사장의 입각은 그 자체로 파격이었고, 정보통신(IT) 분야 육성에 대한 정부 의지를 확인했다는 점에서도 주목을 끌었어요.

그런데, 기업인이 하루아침에 공직자가 되다보니 미처 신변을 정리하지 못했던 모양입니다. 진 장관은 공직에 올라서도 여전히 삼성전자 주식 8만주를 갖고 있었어요. 시민단체가 주식 매각을 촉구했지만, 진 장관은 오히려 당당하게 “내가 보유한 주식은 불법적으로 모은 것도 아니다”, “삼성전자는 정보통신부의 직접 규제 대상이 아니다”라고 항변했습니다.

당시 어떤 보도는 지금 시각으로 보면 헛웃음이 납니다. 그의 주식 내역을 두고 ‘투자의 고수’라거나 ‘주식이 일등공신’ 같은 제목을 달며, 마치 재테크 수단으로 삼성전자 주식을 사라고 부추기는 것 같거든요. ‘이해충돌’이라는 개념 자체가 희미했던 사회의 풍경은 이랬습니다.

어쨌든 이를 계기로 시민단체와 학계가 꾸준히 공론화한 결과, ‘백지신탁’을 도입해야 한다는 여론이 힘을 얻었습니다. 결국 2005년 12월, 재산공개 대상인 고위공직자를 대상으로 주식 백지신탁제가 시행됐어요.

그 백지신탁제가 요즘 고위공직자들의 ‘도전’을 받고 있습니다. 그 공직자들의 주장은 ‘삼성전자’와 ‘정보통신부’는 아무 상관이 없다고 했던 진 장관을 떠올리게 합니다. 오늘 점선면은 백지신탁제를 둘러싼 상황을 다룹니다. 최근 벌어지고 있는 사건부터 백지신탁제의 법적 쟁점까지 찬찬히 뜯어볼게요. 경향신문 데이터저널리즘팀이 제작한 백지신탁 관련 콘텐츠를 참고해 준비했습니다.



[뉴스레터 점선면] 주식 팔 수 없다는 공직자

“주식 팔 수 없다”는 공직자

· 최근 고위공직자의 주식 재산을 백지신탁*하는 문제를 두고 소송전이 잇따라 벌어졌습니다.

· 유병호 감사원 사무총장은 배우자가 보유한 한 바이오기업 비상장 주식 8억원어치를 처분할 수 없다며 2022년 12월 소송을 제기했어요. 유 사무총장은 “제 처가 세포치료제에 대해 세계적인 기술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며 “큰 기술을 부하 직원과 함께 개발해서 공로주로 전부 받은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 법원은 지난 9월12일 “감사원 사무총장의 권한과 업무 범위에 비춰봤을 때 이해충돌 가능성이나 위험이 없다고 볼 수 없다”며 “(유 사무총장 배우자의 주식은) 직무관련성이 인정된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고 판단했어요.

· 유 사무총장은 “법원의 일차적인 판단이긴 하나 존중할 생각”이라고 밝혔어요. 2022년 9월 공직자 재산공개 당시 주식 보유 사실이 알려진 지 1년 만에 논란이 마무리될 것으로 보입니다.

· 그런데, 박성근 국무총리 비서실장이 제기한 비슷한 내용의 소송은 최근 막 시작됐습니다. 이번에도 배우자의 주식 문제입니다.

· 박 비서실장의 배우자는 서희건설 사내이사로, 이 회사 창업주의 자녀입니다. 서희건설과 그 계열사 주식과 채권 등 64억원어치를 보유 중이에요. 박 비서실장은 “(이해충돌에 대한) 추상적 위험을 이유로 배우자의 인격권과 자기계발권, 가업승계권이 다 무너질 것 같은 위험이 있기 때문”이라고 소송 제기 배경을 밝혔어요.

*백지신탁 공직자윤리법에 따르면, 고위공직자는 본인과 배우자·직계 가족을 합쳐 주식을 3000만원 넘게 보유하면 원칙적으로 이를 매각하거나 은행·증권사에 ‘백지신탁’해야 합니다. 백지신탁 계약을 체결하면, 은행·증권사가 주식 매각을 전적으로 담당하며, 고위공직자는 관여할 수 없습니다. 고위공직자가 정책과 법을 집행하면서 자신이 보유한 주식 가격에 영향을 줄 여지를 없애자는 취지를 띤 제도예요.

[뉴스레터 점선면] 주식 팔 수 없다는 공직자

정부 고위공직자 두 명이 잇따라 배우자의 주식을 백지신탁할 수 없다며 소송을 제기했어요.


[뉴스레터 점선면] 주식 팔 수 없다는 공직자

유병호·박성근 두 공직자의 소송에 담긴 쟁점은 비슷합니다. ①주식을 처분할 근거가 되는 ‘직무관련성’을 너무 넓게 해석한다는 점, ②‘배우자’라는 엄연히 다른 인격체의 재산권을 침해한다는 점이에요.

사실, 직무관련성은 딱 잘라 말하기 어렵습니다.

예를 들어, 국무총리는 기획재정부 등 모든 정부부처를 통할하는 자리이며, 그런 국무총리를 뒷받침하는 국무총리 비서실에는 100여명이 일합니다. 비서실장은 모든 정부부처에 업무가 걸쳐있는 비서실 직원을 모두 거느리는 만큼, 직간접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범위 역시 넓을 수밖에 없습니다. 행정기관과 지방자치단체를 감사할 수 있는 감사원의 사무총장도 마찬가지입니다.

따라서, 실제 영향력을 어떻게 행사했는지 증명하는 일도 간단하지 않습니다.

감사원 감사 대상에 포함되는 질병관리청을 예로 들어 가상의 사례를 만들어볼게요. 질병청은 민간 기업이 생산한 의약품을 검사하고 인증합니다.

A라는 기업이 만든

라는 의약품이 있습니다.

B라는 기업이 만든

라는 의약품도 있습니다.

는 효능이 유사한 의약품입니다.

감사원이 어느 날

질병청을 감사했는데,

A가 만든 를 인증한 과정에서

문제점을 적발했습니다.

의 문제가 알려지자

효능이 비슷한 의 가치가 더 올랐고

B뿐만 아니라 를 함께 만든

협력업체들의 매출도 상승했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한 감사원 고위직원이

B의 협력업체인

C의 비상장 주식을 보유했습니다.

상식적으로는 이 고위직원이 질병청을 감사해 A에는 불이익을 준 반면, B와 그가 주식을 보유한 C에는 이익을 줬다고 의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고유의 감사 권한을 질병청에 ‘직접적으로’ 휘두른 사실만 공공연할 뿐, C에 ‘간접적으로’ 이익을 안겼다는 사실까지 규명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정말 순수하게 감사 권한을 행사한 것일 수도 있으니까요.

서울 중구 하나은행 딜링룸 내 코스피 지수 스크린. 문재원 기자 사진 크게보기

서울 중구 하나은행 딜링룸 내 코스피 지수 스크린. 문재원 기자

1. 추상적 위험을 예방하는 이유

박성근 비서실장은 백지신탁이 ‘추상적 위험’에 근거한다며 반발했습니다. 유병호 사무총장은 “삼성전자에 제가 무슨 영향을 끼치는지 모르겠습니다”라고 했죠. 하지만 이들도 실제 직무관련성 범죄를 저지른 공직자를 단죄하는 일까지 반대하지는 않을 거예요.

문제는 앞서 살핀 가상의 사례처럼 이해충돌이 존재한다는 합리적인 의심에도 불구하고 사후 규명과 처벌이 쉽지 않다는 점입니다. 이는 ‘추상적 위험’을 막기 위해 백지신탁과 같은 강력한 사전 규제를 옹호하는 논리가 됩니다.

헌법재판소는 2012년 8월 한 국회의원이 본인과 배우자의 주식 백지신탁을 거부하며 신청한 위헌법률심판에 대해 선고하면서 이 같은 점을 지적했어요. 부당이익 환수나 형사처벌 등 다른 제재 수단이 현실적으로 효력을 내기 어렵기 때문에, 미리 이해충돌을 피하도록 강제하는 백지신탁과 같은 조치가 필요하다고 판단했습니다.

“부당한 재산증식을 형사처벌하고 부당이득을 몰수하려면, 국회의원이 직무상 수집한 정보를 이용해 그 주식을 취득했고, 실제 그러한 정보가 호재로 작용해 그 주가가 상승했다는 점 등을 합리적 의심이 없을 정도로 증명해야 한다. (하지만) 그러한 증명이 현실적으로 매우 쉽지 않다는 측면에서 그 실효성을 장담할 수 없다. 따라서 형사적·사후적 규제가 이해충돌을 사전에 회피하도록 강제하는 것과 동등·유사한 효과가 있다고 단정할 수 없다.

주식이라는 재산의 특성상 관련 정보 유무에 따라 수익률은 천차만별입니다. 어느 고위공직자가 주식으로 큰 돈을 벌었다면, “당연히 일반국민들로부터 직무집행 중에 획득한 정보를 빼돌려 사적으로 썼다는 의심을 살 수밖에 없다”는 게 헌재의 생각입니다.

헌재는 이 문제를 판단하면서 ‘일반국민’의 눈높이를 의식하려고 애쓴 것으로 보여요. 점선면 독자 희망만들기님은 “자신의 것을 지키기 위해 어떠한 행위가 나타날지 예측할 수 없으므로, 그 원인을 원천봉쇄해야 한다”는 의견을 주셨습니다. 찰보리빵님은 “이해충돌 가능성에 대해 뭔가는 봐주고 다른 뭔가는 봐주지 않는다면 기준이 무엇인지 또 다른 논란이 생기기 마련”이라고 하셨습니다.

헌재는 2012년 결정에서 공직자 배우자의 주식 백지신탁 문제에 관해서도 판단을 내렸습니다. 당시 위헌법률심판 제청을 신청한 국회의원은 배우자 주식을 백지신탁하라는 결정이 헌법 제13조 제3항 ‘모든 국민은 자기의 행위가 아닌 친족의 행위로 인하여 불이익한 처우를 받지 아니한다’에 어긋난다고 주장했어요. 이는 그 유명한 ‘연좌제 금지’에 관한 조항입니다. ‘배우자 주식 백지신탁=연좌제’라고 주장한 셈이죠.

이 문제를 두고 한 점선면 독자님은 “가족은 ‘경제 공동체’이기 때문에 가족의 경제적 이해관계가 공직자의 정책 결정에 영향을 줄 수도 있어요”(김군김군님)라는 의견을 주셨어요. 헌재의 판단도 다르지 않습니다.

헌재는 “국회의원 배우자의 경우 국회의원 본인과 일상을 공유하면서 사실상 하나의 경제단위를 이루게 되고 따라서 부부 사이에 누구의 명의로 재산을 보유하는지는 특별한 의미가 없게 된다”며 “실질적·경제적 관련성에 근거한 것이지, 실질적으로 의미 있는 아무런 관련성을 인정할 수 없는데도 오로지 친족관계만으로 불이익을 가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판단했어요.

법원은 이번에 유병호 감사원 사무총장이 제기한 소송을 기각하면서, 유 사무총장이 함께 낸 위헌법률심판 제청 신청도 기각했습니다. 2012년 헌재의 논리는 지금도 유효한 셈입니다.



2. 추상적 위험을 판단하는 사람

백지신탁은 ‘사후’가 아닌 ‘사전’ 판단에 근거한 조치입니다. 공직자가 직무 수행 중 얻은 주식 관련 정보를 활용해 수익을 올린 후 처벌하는 게 아니라, 그런 일이 일어날 가능성에 주목하고 이를 미리 차단하는 목적을 띱니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을 예측하고 판단하는 만큼 신중하고 전문적일 필요가 있습니다. 이 추상적 위험은 누가 판단하는 걸까요?

정부는 공직자윤리법에 직무관련성을 심사하는 ‘주식백지신탁 심사위원회(백지신탁심사위)’라는 기구를 규정해 운영하고 있습니다. 고위공직자는 원칙적으로 3000만원 넘는 주식을 처분해야 하지만, 당사자가 원한다면 백지신탁심사위에서 직무관련 여부를 한번 따져볼 기회를 얻습니다.

백지신탁심사위의 구성은 독립성과 전문성에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 헌법재판소·중앙선거관리위원회와 같은 방식으로 구성됩니다. 대통령이 임명하는 위원 9명 중 3명은 국회가, 3명은 대법원장이 추천합니다. 백지신탁심사위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공직자의 재산등록과 퇴직공직자의 취업제한·승인을 심사하는 ‘공직자윤리위원회’가 존재하는데도, 주식의 직무관련성만을 따지는 백지신탁심사위를 별도로 둔 사실 또한 그렇습니다. 위원 자격으로는 교수, 법조인, 금융인, 고위공직자 출신을 명시한 것은 전문성을 확보하는 차원으로 볼 수 있습니다.

여러모로 봤을 때 정부에서 백지신탁심사위의 지위는 꽤 무거운 편입니다. 하지만 유병호·박성근 두 사람 모두 이 심사에서 ‘직무관련성 있음’이란 판단을 받자 행정심판 혹은 소송을 제기했어요. 정부 고위공직자가 독립적·전문적 위상을 갖춘 정부 기구의 판단에 불복한 점부터 비판받을 소지가 다분합니다.

[뉴스레터 점선면] 주식 팔 수 없다는 공직자

공직자가 사익을 추구해 이익을 얻었더라도 이를 규명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백지신탁처럼 사전에 그 가능성을 차단하는 제도를 도입했으며, 그 가능성을 판단하는 전문적이고 무게가 있는 기구를 만들었습니다.


[뉴스레터 점선면] 주식 팔 수 없다는 공직자

그런데 정부는 최근 사법부와 다른 기조를 보입니다. 백지신탁에 대한 공직자의 불만을 기각하지 않고 사실상 수용했어요. 김승호 인사혁신처장은 지난 9월4일 “주식 백지신탁이 엄정한 공직기강을 확립하는 데 필요하지만 유능한 인재를 초빙하는 데 여러 가지 장애요인이 된다”고 말했습니다.

김승호 처장의 발언에서 ‘유능’과 ‘기강’, 즉 전문성과 도덕성은 서로 대립하는 자질입니다. 우리 사회에서 이런 언사는 낯설지 않습니다. 인사청문회에서 도덕성 논란에 휩싸여 장관 등 고위공직 후보자들이 줄줄이 낙마할 때, 정부는 전문성 있는 인재 발탁이 어렵다고 호소하는 사례를 종종 볼 수 있어요.

하지만 전문성과 도덕성의 관계를 꼭 ‘도 아니면 모’, ‘흑 아니면 백’과 같다고 볼 수 있을까요? 보수적 법학자로 꼽히는 장영수 교수는 백지신탁제 문제점을 다룬 논문에서 “우리가 민주주의와 국가안보를 양자택일로 생각할 수 없듯이, 전문성과 도덕성 또한 양자택일은 아니다”라며 “양자를 동시에 최대한 확보할 수 있도록 끊임없이 노력할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지난 8월14일 서울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국무회의. 조태형 기자

지난 8월14일 서울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국무회의. 조태형 기자

1. 공직자란 무엇인가

서의동 경향신문 논설실장은 백지신탁 결정에 불복한 유병호·박성근 두 공직자를 비판하는 칼럼에서 ‘공무원은 국민전체에 대한 봉사자’라고 규정한 헌법 제7조 제1항을 언급했어요. ‘봉사자’라는 말이 다소 진부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사실 국민과 공직자의 관계를 함축하는 단어입니다.

헌재는 2012년 결정에서 이 조항과 함께 제1조 제2항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를 인용했어요. 그러면서 “고위공직자의 주식거래는 단순히 부당이득 환수 등 차원을 넘어 주식과 직무 간의 이해충돌을 사전에 방지해 그 위임관계가 훼손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는 점이 특히 중시돼야 한다”라고 밝혔습니다.

학계에선 이 ‘위임관계’를 주로 사회계약론에 바탕을 둔 ‘주인-대리인’ 이론으로 설명합니다. 여기에서 주인은 국민, 대리인은 공직자입니다. 주인은 대리인에게 어떤 업무를 맡기고, 대리인이 그 업무를 성실하게 수행하길 기대합니다. 이 관계에서는 한마디로 ‘믿고 맡기는’ 문제, 즉 ‘신뢰’가 관건이 됩니다. 이 신뢰를 배반하는 대표적 요인이 바로 이해충돌입니다. 대리인이 주인의 이익(공익)이 아니라 자신의 이익(사익)을 추구하는 순간 이해충돌이 발생하며 위임관계는 깨집니다.

이는 공직자 한 사람에 대한 신뢰 문제에 그치지 않고, 공직자 집단에 대한 신뢰 문제로 확산되는 걸 종종 볼 수 있어요. 가령, 2021년 한국토지주택공사(LH) 직원들의 땅 투기 사건이 드러났을 때가 그렇습니다. 몇몇 직원들의 일탈이라고 의심하는 데 끝나지 않고, 파장은 정부의 부동산 정책 전체에 대한 불신으로 번졌습니다. 그리고 그해 열린 4월 재·보궐선거에서 여당이 참패하는 결과로 이어졌습니다. 도덕성은 곧 전문성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2000년대 초 참여연대에서 활동하며 공직사회의 이해충돌 문제를 연구한 윤태범 교수는 이렇게 정의했어요.

이해충돌의 회피를 강조하는 중요한 이유의 하나는 민주주의의 근간이라고 할 수 있는 대리인 관계(제도)의 신뢰성 유지에 있다. (…) 민주주의의 근간에 비추어 본다면, 이해충돌의 회피는 임의로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원래부터 이해충돌은 없어야 하며, 부득이 이것이 발생할 경우에는 이를 회피하는 행위를 하거나, 그것이 불가능하거나 혹은 이해충돌의 회피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대리인 관계를 철회하는 것으로서 보다 적극적으로 이해충돌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백지신탁 등 이해충돌 회피 조치에 따르지 않는 공직자의 문제는 언제든 공직자 한 사람이 아니라 전체 민주주의 체제의 문제로 확장될 수 있습니다. 과연 김승호 처장처럼 ‘유능’과 ‘기강’을 대립되는 자질로 취급해도 되는 걸까요? 독자 인디안님은 “유능한 인재로 포장되는 사람이 유능하지 않다는 것을 역사가 증명합니다. 사리사욕에만 유능하고 공익에는 엄청난 피해를 입혔습니다”라고 의견을 보내셨어요.

주인-대리인 이론은 신뢰받는 공직자가 능력과 기강을 모두 갖춘 대리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다만, 2012년 헌재 결정문에는 재산권을 들어 백지신탁제가 지나치다는 의견도 비중있게 담겼습니다. 당시 헌법재판관들은 재산권 쟁점을 두고 4:4(당시 재판관 1명 공석)로 의견이 팽팽하게 갈렸어요. 유병호 사무총장이 주식 백지신탁을 거부하며 내세운 근거 중 하나도 바로 ‘재산권’이었습니다. 재산권은 헌법이 보장하는 국민의 기본 권리입니다.

당시 백지신탁제가 재산권을 침해한다고 본 재판관들의 요지는 이렇습니다. ①공직자가 의무적으로 백지신탁 계약 체결하면 주식 처분 시기를 결정할 수 없는 점 ②주식 시장이 침체돼 주식 가격이 떨어졌을 때도 강제로 팔아야 하는 점 ③주식 매각이 곧 기업 경영권의 상실로 이어져 단순 지분 처분을 넘어 중대한 손실을 낼 수 있는 점 등입니다.

그러면서 “국가가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기업 경영권의 향배에 개입하는 상황이 초래되고, 이는 재산권 침해 문제를 떠나 이른바 자본주의 시장경제질서에 위배되는 문제로 이어질 수 있다”라고 주장했어요. 이런 의견에 따르면, 박성근 비서실장의 배우자는 서희건설의 주식을 처분하지 않아도 되며, 따라서 창업주의 일가로서 경영권을 잃을 우려가 없는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미국의 사례에 비춰보면 헌재의 재산권 침해 우려가 지나쳐 보이기도 합니다. 래리 톰슨 법무차관(2001~2006)은 로펌 ‘킹 앤 스팔딩(King&Spalding)’ 파트너로 일하다 차관에 발탁됐는데, 주가가 급락한 상황에서 주식과 스톡옵션을 모두 처분해 큰 손해를 본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2. 백지신탁도 유명무실

박덕흠 국회의원은 충북 지역에서 2012년 처음 당선돼 지금까지 의원직을 유지 중인 여당 중진의원입니다. 박 의원은 대학·대학원에서 토목공학을 전공하고, 건설업 관련 협회·연구원 대표직을 지낸 ‘토건(토목·건축)인’ 출신입니다. 실제 건설업체를 20년 넘게 경영한 경력도 있습니다.

참여연대 행정감시센터 자료를 보면, 박 의원은 2014년 9월 자신이 소유한 원하종합건설(현 이준종합건설) 등 건설회사 주식 100억원을 백지신탁했습니다. 이후 2015년 4월부터 2020년 9월까지 국회 국토교통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어요. 국토교통위원회는 각종 토목·건축 사업과 관련 깊은 상임위원회로, 그의 백지신탁은 필수였습니다.

그런데, 박 의원의 주식은 그 기간에 매각되지 않았습니다. 백지신탁 계약을 체결한 금융기관은 이를 60일 내 처분해야 하지만, 기한 내 처분하지 못하면 30일씩 횟수 제한 없이 연장할 수 있기에 가능할 수 있었습니다. 백지신탁했더라도 주식이 팔리지 않으면 임기를 마친 후 돌려받습니다. 주식이 ‘버젓이 살아있다’고 할 수 있는데도 박 의원은 국토교통위원회에서 활동했던 겁니다. 그 기간에 박 의원의 가족 명의 건설업체가 수백억원대 공사비와 기술사용료 수입을 거뒀다는 보도가 나와 이해충돌 논란이 일기도 했습니다.

박 의원은 백지신탁제의 허술함을 보여줍니다. 심지어 ‘국토교통위원회-건설업체’처럼 관계가 표면에 드러나지 않으면 대체로 직무관련성에 문제가 없다는 판단을 받습니다. 하승수 변호사는 “법안 발의뿐만 아니라 정책토론회 개최 등 다양한 방법으로 이익을 줄 수도 있다. 동료의원에 부탁해 자기 회사에 이익이 되는 행위를 하도록 이끄는 일도 충분히 가능하다”고 지적합니다.

경향신문 데이터저널리즘이 지난 4월 보도한 내용에 따르면, 3000만원 넘는 주식을 보유해 백지신탁해야 하는 고위공직자 685명 중 중 실제 백지신탁했다고 신고한 사람은 106명뿐으로 약 20%에 그쳤어요. 나머지 80%는 왜 백지신탁하지 않아도 되는지 심사 결과를 알 수가 없습니다. 주식백지신탁 심사위원회가 심사 내용을 일절 공개하지 않기 때문이에요.

최근 백지신탁제는 고위공직자들의 잇따른 소송에 도전받는 처지가 됐지만, 원래는 이렇게 유명무실하다는 지적을 많이 받았습니다.

부동산 백지신탁제 도입을 촉구하는 기자회견. 연합뉴스

부동산 백지신탁제 도입을 촉구하는 기자회견. 연합뉴스

3. 경각심이 더 커졌을까

사실, 우리 사회는 이해충돌 문제를 고민한 역사가 그리 길다고 볼 수 없습니다.

삼성전자 출신 진대제 전 정보통신부 장관 주식 논란을 계기로 2005년 백지신탁이 제도화된 이후, 2012년 이른바 ‘김영란법’이라고 불린 ‘부정청탁 금지 및 공직자의 이해충돌 방지법안’이 등장해 이해충돌 개념을 사회에 환기시켰죠. 하지만 2015년 김영란법은 ‘이해충돌 방지’는 쏙 빠진 채 ‘부정청탁 금지’만 담아 제정됐습니다. 2021년 LH 땅 투기 사건이 알려진 다음에야 ‘공직자의 이해충돌방지법’이 제정돼 2022년 5월부터 시행됐습니다.

이해충돌방지법은 공직자가 자신의 이해관계와 관련된 직무를 회피하고, 미공개 정보를 사적 이익을 위해 이용하는 일을 금지합니다. 1급부터 9급까지 모든 공무원에 적용되며, 사적 이해관계 신고 범위는 가족까지 모두 포함해 500만~600만명에 이를 것이라는 추정치가 있습니다. 이 법이 이해충돌 문제를 급격히 진전시킨 점을 고려하면, 최근 유병호·박성근 두 고위공직자의 소송은 ‘역주행’에 가깝습니다.

윤태범 교수는 백지신탁제가 제정되기 전인 2005년 4월 경향신문에 기고한 칼럼에서 이렇게 썼어요.

“장관은 어느 공직자보다도 앞서서 ‘공’의 의미를 실천해야 하기에 높은 수준의 도덕성을 확보하고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장관 스스로가 ‘이해충돌(Conflict of Interest)’의 상황에 처하지 말아야 한다. 쉽게 말해서 이권과 관련되는 어떤 일에도 관여하지 말아야 한다. 이해충돌의 상황에 처하는 것만으로도 장관은 물론 정부정책도 국민의 불신을 받는다. 한 예로 땅을 많이 가진 장관이 ‘서민을 위한 부동산 정책’을 펼친다면 어떤 국민도 신뢰하지 않을 것이다.”

20여년 후, 현재 공직사회는 이해충돌 문제에 이만한 경각심을 지니고 있는지 되돌아봐야 할 것 같습니다.

[뉴스레터 점선면] 주식 팔 수 없다는 공직자

공직자는 자신의 이해충돌이 정부와 민주주의에 대한 불신으로 확산될 가능성을 염두에 둬야 합니다. 백지신탁제에 허점이 있지만, 최근 정부 고위공직자들이 백신신탁 결정에 불복한 것은 그간 역사에 비춰볼 때 지나친 ‘역주행’입니다.

세 줄 점선면

▶ 정부 고위공직자들이 최근 가족이 보유한 주식을 처분하라는 정부 기구 판단에 불복해 소송을 제기했습니다.

▶ 헌법재판소는 이미 지난 2012년 공직자의 백지신탁이 명분과 방법에서 모두 정당하다고 결정한 바 있습니다.

▶ 일부 공직자의 이해충돌이 정부 전체를 불신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는 점을 지난 LH 땅 투기 의혹에서 목격했습니다.





[뉴스레터 점선면] 주식 팔 수 없다는 공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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