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 대통령, 과거사 혈흔 지우는 일본에 ‘셀프 불기소’

박은경 기자

윤 대통령 “100년 전 일 가지고···”

일본 두둔한 ‘WP 인터뷰 발언’ 파장

“후대 사과 의무 지워선 안 된다”는

아베 담화와 같은 인식 ‘극우와 유사’

예로 든 ‘유럽 전쟁 당사국 간 협력’

독일 총리의 ‘무릎 사과’가 출발점

미국을 국빈 방문한 윤석열 대통령이 24일 워싱턴DC ‘블레어 하우스’에서 한 외신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대통령실 제공

미국을 국빈 방문한 윤석열 대통령이 24일 워싱턴DC ‘블레어 하우스’에서 한 외신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대통령실 제공

윤석열 대통령이 워싱턴포스트와 인터뷰에서 “100년 전의 일을 가지고 일본이 무조건 무릎 꿇어야 한다는 생각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한 것을 두고 비판이 이어지고 있다. 끊임없이 과거사의 혈흔을 지우면서 법적 책임과 반성을 회피해 온 일본 입장을 두둔한 발언이기 때문이다.

워싱턴포스트 기자가 25일 자신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공개한 녹취록을 보면 윤 대통령은 한·일 관계에 대해 “정말 100년 전의 일들을 가지고 지금 유럽에서는 전쟁을 몇 번씩 겪고 그 참혹한 전쟁을 겪어도 미래를 위해서 전쟁 당사국들이 협력하고 하는데 100년 전에 일을 가지고 ‘무조건 안된다’, ‘무조건 무릎 꿇어라’라고 하는 이거는 저는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했다.

윤 대통령은 예로 든 ‘유럽 전쟁 당사국 간 협력’은 전범국의 통렬한 반성이라는 토대 위에 세워진 것이라 한·일관계와는 전혀 다르다. 2차 세계대전 전범국인 독일과 피해국 들 간의 화해와 협력은 ‘무릎 사과’가 출발점이 됐다. 1970년 빌리 브란트 당시 서독 총리는 폴란드 바르샤바를 방문해 유대인 위령탑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독일의 과거사 반성은 사과에만 그치지 않았다. ‘무릎 사과’를 계기로 1972년 독일과 폴란드는 공동으로 ‘교과서 위원회’를 만들어 함께 역사 교과서를 연구·분석하며 역사 화해의 토양을 다졌고 2016년 공동 역사교과서를 출간했다. 150년 동안 4차례나 전쟁을 치르며 적대관계를 유지했던 독일과 프랑스도 1935년부터 역사교과서 협의를 시작해 2006년 공동 역사 교과서라는 결실을 맺었다. 공동 역사교과서는 서술 내용 개선 뿐 아니라 상대국에 대한 적대적 감정과 응어리, 그리고 무지에서 나오는 편견을 해소하는 기초가 됐다.

반면 1982년부터 시작된 일본의 역사 교과서 왜곡은 40년 넘게 해결점을 찾지 못하고 있다. 지난달 말 일본 문부과학성이 검정 통과시킨 초등학교 사회 교과서에서 독도 영유권 주장은 강해지고 조선인 징병을 포함해 강제동원과 관련한 강제성 기술이 이전보다 약화되는 등 더 심각해졌다. 역사 왜곡을 넘어 역사 지우기에 나선 것이다.

독일은 전쟁범죄의 공소시효를 없애고 ‘무한책임’을 보여주고 있지만 일본은 전범 처벌조차 자발적으로 하지 않았다. 일본은 1946년 승전국에 의한 재판의 전범들마저 법적 사면과 종교적 추모를 통해 대부분 복권시켰다. 사면의 혜택을 본 전범 용의자 중 한 명이 아베 신조 전 총리의 외조부 기시 노부스케 전 총리다. 일본은 1953년 중의원에서 ‘전쟁범죄에 의한 수형자 사면에 관한 결의’를 채택하고, A급 전범은 1956년, B·C급 전범은 1958년까지 모두 석방했다.

당장 최근 행보만 봐도 태도는 극명하게 갈린다. 프랑크 발터 슈타인마이어 독일 대통령은 지난 19일(현지시간) 폴란드에서 열린 게토 80년 추모 행사에 참석해 “독일인의 역사적 책임에는 끝이 없다”고 고개를 숙였다. 그는 추모의 의미를 담아 유대인을 상징하는 다윗의 별 모양 수선화 장식을 가슴에 달았다. 반면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는 21일 태평양 전쟁 A급 전범 14명이 합사된 일본 군국주의의 상징 야스쿠니 신사에 공물을 봉납했다. 기시다 총리의 공물 헌납은 2021년 10월 취임 후 4번째다.

독일은 수도 베를린 한복판에 유대인 희생자를 기리는 홀로코스트 기념공원을 세웠지만 일본은 끈질기에 위안부 소녀상 철거를 요구하며 과거사의 잘못에 대한 반성은커녕 역사 지우기에 집착하고 있다. 유럽은 전범국가의 사죄를 통한 용서, 과거 청산을 통해 새로운 차원의 협력이 가능해졌다는 점에서 한·일관계와 차이가 크다. 그런데도 윤 대통령은 이번 발언을 통해 역사 우경화를 지속하는 일본에 셀프 불기소 처분을 내렸다.

윤 대통령의 발언은 2015년 8월 아베 전 총리가 발표한 “전쟁에 아무런 관계가 없는 우리의 자녀나 손자 그리고 그 뒤 세대의 아이들에게 사과를 계속할 숙명을 지게 해서는 안 된다”고 한 아베 담화와 같은 역사 인식을 담고 있다. 한·일 과거사 문제에 대한 일본 극우 인사와 유사한 인식이란 의미다.

한·일관계 전문가인 호사카 유지 세종대학교 교수는 25일 통화에서 “일본은 한번도 법적 책임을 인정한 적이 없는 데다, 법적·제도적 후속 조치들을 내놓지 않았다”면서 “한번 사과하거나 상했으면 끝났다는 게 일본 입장인데 윤석열 대통령의 발언은 이같은 일본 방식을 모두 수용하겠다는 의미로 읽힌다”고 평가했다. 그러면서 “일본이 한·일관계에서 자주 쓰는 ‘미래지향적’이라는 단어에도 과거를 직시한다는 내용이 빠져있다”면서 “과거를 직시하지 않고 독일과 달리 교과서 등에서 역사 지우기에 나선 일본의 행태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윤석열 대통령에게 물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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