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폭정을 피해 고국 등진 불행한 두뇌들, 인류의 불행을 덜다

이종필 교수

파란만장 난민 과학자들

일러스트 | 김상민 기자 yellow@kyunghyang.com

일러스트 | 김상민 기자 yellow@kyunghyang.com

핵분열 현상 처음 관측한 마이트너
독일에 오스트리아 병합되자 탈출

20세기의 가장 유명한 난민은 단연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다. 독일에서 태어난 유대인 아인슈타인은 미국으로 외유 중이던 1933년 독일에서 히틀러가 집권하자 독일 국적을 포기하고 난민이 되었다. 히틀러는 집권 초반부터 유대인을 박해하기 시작했다. 아인슈타인은 독일을 떠나기 전에 이미 세계적인 과학자였고 대중적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었다. 불과 26세인 1905년 스위스 베른의 특허국에서 일하고 있을 때 특수상대성이론을 발견했고 광전효과(금속에 빛을 쪼이면 전자가 나오는 현상)를 성공적으로 설명했으며 브라운 운동을 분자 수준에서 규명하기도 했다. 1915년에는 독일 베를린에서 현대적 중력이론인 일반상대성이론을 완성했다. 1921년에는 광전효과에 관한 공로로 노벨상을 수상했다. 그런 아인슈타인이었기에 세계 어디에서든 직장을 구하고 자리 잡기가 어렵지는 않았을 것이다. 미국으로 건너간 아인슈타인은 지금까지도 세계 최고의 이론과학연구소로 꼽히는 고등연구원(IAS)에서 1933년부터 1955년 생을 마감할 때까지 수학부 교수로 재직했다. 이때도 그는 난민 신분이었다. 아인슈타인은 1940년 미국 시민권을 취득했다.

지난번에 소개했던 오스트리아의 리제 마이트너 역시 나치를 피해 독일을 떠난 난민 과학자였다. 마이트너는 독일의 오토 한과 함께 우라늄에 중성자를 포격하는 실험을 연구하면서 최초로 핵분열 현상을 관측했고 이 현상을 정확하게 설명한 과학자였다. 아인슈타인은 히틀러 집권 직전에 독일을 떠났기 때문에 히틀러 치하를 겪지 않고 비교적 안전하게 난민생활을 보냈다면 마이트너는 극적으로 독일을 탈출했다. 마이트너는 오스트리아 국적이라 히틀러의 반유대정책에서 조금 비켜나 있었으나 1938년 나치가 오스트리아를 병합하자 사태가 급변했다. 한은 독일을 떠나는 마이트너에게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긴급한 상황에 쓰라며 어머니께 물려받은 다이아몬드 반지를 건네주었다고 한다. 마이트너가 손에 쥔 현금은 단 10마르크였다고 한다. 마이트너는 기차를 이용해 독일을 빠져나가 네덜란드로 갔고 이후 스웨덴에서 자리를 잡았다.

인공 암모니아 합성 성공한 하버
유대인 박해받자 영국서 새 둥지

격동기의 독일에서 파란만장한 인생을 보낸 과학자 중에 프리츠 하버가 있다. 하버 역시 유대인이었으나 일찍이 스스로 유대인의 정체성을 버리고 철저한 독일인으로 살기로 작심했다. 하버의 가장 큰 공로는 인공적으로 암모니아를 합성하는 데에 성공(1910년)했다는 점이다. 암모니아 합성이 중요한 이유는 인공적으로 비료를 만들 수 있는 길을 열었기 때문이다. 증가하는 인구를 먹여 살리기 위해서는 식량을 증산해야 하고 그러려면 많은 양의 비료가 필요하다. 비료에서 중요한 성분이 바로 질소이다. 하버는 높은 압력에서 암모니아를 생산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았다. 이 방법을 이용해 카를 보슈는 저명한 화학기업인 바스프에서 이를 대량으로 생산할 수 있는 공정을 완성했다. 이 때문에 하버는 “공기에서 빵을 만든 과학자”라는 별칭을 얻었다.

화학자로서 성공한 하버는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자신의 특기를 살려 조국 독일에 대한 충성심을 증명했다. 전선을 돌파할 대량살상무기로 독가스를 개발한 것이다. 하버가 주도적으로 개발한 염소가스는 1915년 벨기에 이프르 전선에서 ‘성공적으로’ 살포되었다. 하버는 당시 빌헬름 황제로부터 크게 치하를 받았다. 그러나 결국 독일이 전쟁에서 패하자 하버도 전범의 신세를 면할 수 없었다. 그래도 하버는 암모니아 합성법을 개발한 공로로 1918년 노벨 화학상을 수상했다. 당해에는 노벨위원회에서 해당자를 선정하지 못해 이듬해로 연기되었고 하버도 1918년 노벨상을 1919년에 수상했다. 하버에게 가장 큰 시련은 1933년 히틀러의 등장과 함께 다가왔다. 히틀러의 유대인 박해 정책으로 하버는 독일에서의 모든 직을 내려놓고 독일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하며 독가스를 만들면서까지 독일에 충성했던 터라 아마도 하버의 상심이 무척 컸을 것이다. 역설적이게도 떠돌이 신세의 하버를 따뜻하게 맞아준 곳 중에는 얼마 전까지 적국이었던 영국의 케임브리지도 있었다. 하버는 1934년 스위스 바젤에서 심장마비로 객사했다.

히틀러의 나치즘을 피해 많은 유대계 과학자들이 독일을 떠나 영국이나 미국으로 이주했다. 그 숫자는 수천명에 달한다. 역시나 난민 과학자들이 새로운 직장을 구할 수 있도록 적극 도와준 것은 동료 과학자들이었다. 특히 미국으로 이주한 많은 과학자들은 핵무기 개발계획인 맨해튼 프로젝트에 적극 참여해 프로젝트가 성공하는 데에도 크게 기여했다. 이들은 전후 학계를 이끌었고 미국이 20세기 초강국으로 성장하는 밑거름이 되었다.

나치는 아니지만 비슷한 시기 전제국가의 폭정을 피해 나라를 등진 과학자들도 있었다. 우크라이나 출신의 조지 가모프는 소련을 탈출하기 위해 일반인의 상상을 초월하는 방법으로 여러 번 놀라운 시도를 했다. 자서전에 따르면 첫 번째 시도에서는 부인과 함께 조립식 보트를 타고 노를 저어 흑해를 가로지르려고 했다. 크림반도 남단에서 무려 270㎞를 건너 터키 해안에 이르는 경로였다. 네댓새 걸릴 것으로 예상했던 가모프의 첫 시도는 기상악화로 채 이틀이 되지 않아 실패했다. 두 번째 시도는 전혀 다른 루트였다. 북극해 근처 무르만스크라는 항구에서 노르웨이까지 가는 여정이었다. 처음에는 스키를 타고 국경을 건널 생각이었으나 국경수비가 삼엄해 모터보트를 타고 바다를 이용하기로 했다. 불행히도 하필 그때 소련이 근처에 잠수함 기지를 건설할 예정이라 경계가 강화돼 이 또한 물거품이 되었다. 가모프의 사연을 들을 때마다 나는 그의 기막힌 발상법에 새삼 놀라곤 한다. 역설적이게도 가모프의 소련 탈출은 훨씬 덜 극적이면서 지극히 평범한 방법으로 진행되었다. 1933년 저명한 국제학회에 참석할 수 있도록 당국의 허가를 얻은 것이다. 미국으로 건너간 가모프는 조지워싱턴대학의 교수가 되었다. 이후 빅뱅이론 연구 등에서 큰 업적을 남겼다.

비밀사찰받던 물리학자 페르미
미국 건너가 첫 인공 원자로 완성

이탈리아가 낳은 위대한 물리학자인 엔리코 페르미는 아주 우아한 방법으로 근사하게 독재정권을 탈출한 사례이다. 20대부터 이미 세계적인 업적을 내며 두각을 나타낸 페르미는 애초에 이탈리아를 적극적으로 떠날 생각이 없었다. 여기에는 그의 부인 라우라 페르미가 로마와 토스카나를 너무 사랑해 다른 나라로 이주할 마음이 전혀 없었던 이유가 컸다. 당시 이탈리아를 통치하던 무솔리니는 히틀러와 달리 유대인에 특별히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러다가 1938년 히틀러가 로마를 방문한 뒤 상황이 바뀌었다. 무솔리니 정권이 반유대정책을 펴기 시작하자 (페르미는 문제가 없었으나) 평생 유대인 정체성이라고는 거의 없이 살았던 라우라 일가에게는 충격적인 일이었다. 결국엔 라우라도 마음을 돌려 평생 살았던 이탈리아를 떠나기로 결심했다. 페르미는 여름마다 미국 등을 자주 방문했지만 부인, 두 자녀와 함께 무사히 이탈리아를 탈출하기란 쉽지 않았다. 페르미는 이미 경찰의 비밀사찰을 받던 터였다.

페르미 부부는 1939년 이탈리아를 떠나기로 했다. 이때부터 페르미는 비밀리에 미국 대학들에 일자리를 알아보기 시작했다. 당시 페르미는 중성자를 이용한 실험 등으로 전 세계 학계의 주목을 받던 터라 미국에서 교수직을 얻기는 어렵지 않았다. 마침 컬럼비아대학의 제안을 페르미는 받아들였다.

이 와중에 뜻하지 않은 낭보가 들려왔다. 1938년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로 페르미가 단독 선정된 것이다. 수상 이유는 중성자를 이용한 새로운 방사성 원소 및 핵반응 발견이었다. 페르미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기로 했다.

페르미 일가는 그해 12월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노벨상을 받고 상금까지 챙긴 뒤 영국을 거쳐 미국으로 건너갔다. 이탈리아 당국이나 가까운 사람들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페르미의 여정이 그때까지 으레 있었던 학술적 목적의 방문으로 알고 있었다. 페르미는 이 모든 과정을 아주 꼼꼼하고 치밀하게 준비했다. 페르미는 1939년 1월 미국 땅을 밟았다. 그때 첫째는 7세, 둘째는 2세였다.

미국에 건너가서도 페르미는 결코 마음을 놓지 않았다. 어쨌든 페르미의 조국은 나치와 한패였고 미국이 연합국으로 참전하면서 결과적으로 페르미는 적국 출신의 과학자일 수밖에 없었다. 페르미는 한편으로는 자신의 미국에 대한 ‘충성심’과 과학자로서의 능력을 증명할 수 있는 지인의 편지 사본을 고이 간직해두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노벨상 상금을 미국 거주지 지하창고 바닥에 숨겨두기도 했었다고 한다.

페르미는 중성자로 원자핵을 연구하던 과정에서 자신이 우라늄보다 더 무거운 새 원소, 즉 초우라늄 원소를 발견했다고 주장했으며 이 내용은 노벨상 수상연설에도 포함돼 있었다. 결과적으로 이는 잘못된 것으로 판명됐다. 페르미가 노벨상을 받은 바로 그해 독일에 남아 있던 오토 한과 스웨덴으로 피신했던 마이트너는 사람들이 초우라늄이라고 생각했던 생성물이 사실은 우라늄보다 더 가벼운 원소들이며 결국 원자핵이 분열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페르미는 이 사실을 미국에 가서야 알게 되었다. 역사에 가정은 없지만, 만약 천하의 페르미가 일찍이 초우라늄이 아니라 핵분열이라는 올바른 결론을 얻었다면 2차 대전 추축국인 이탈리아와 독일에서 먼저 핵무기를 개발하지 않았을까 하고 상상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게 사실이라면 페르미의 불행이 인류의 행운이 된 셈이다. 이후 페르미는 시카고대학에서 사상 최초로 인공 원자로를 완성했고 맨해튼 프로젝트에도 적극 참여했다.

나치·탈레반은 인류에 고통 안겨
‘떠돌이’ 정착 도운 건 동료 과학자
미국은 덕분에 초강국 성장 밑거름

종종 우리는 나치나 탈레반 같은 폐쇄적 극단주의가 인류 전체에 커다란 고통을 주었으며, 반대로 개방적이고 융합적인 문명은 번성해 당대의 패권을 차지했다는 역사의 교훈을 잊고 산다. 명실상부 G8에 올라선 우리가 지금 되돌아볼 교훈이다.

▶이종필 교수

[전문가의 세계 - 이종필의 과학자의 발상법](20)폭정을 피해 고국 등진 불행한 두뇌들, 인류의 불행을 덜다

1971년 부산에서 태어났다. 1990년 서울대 물리학과에 입학했으며 2001년 입자물리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연세대·고등과학원 등에서 연구원으로, 고려대에서 연구교수로 재직했다. 2016년부터 건국대 상허교양대학에서 조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 <신의 입자를 찾아서> <대통령을 위한 과학 에세이> <물리학 클래식> <이종필 교수의 인터스텔라> <빛의 속도로 이해하는 상대성이론> 등이 있고, <최종이론의 꿈> <블랙홀 전쟁> <물리의 정석> <스티븐 호킹의 블랙홀> 등을 우리글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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