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⑤입 속의 검은 잎 - 기형도
1991년 5월의 거리는 뜨거웠다. 강경대, 박승희, 김영균, 천세용, 박창수, 김기설, 윤용하, 이정순, 김철수, 정상순, 김귀정. 그해 4월부터 5월까지 이어졌던 숱한 죽음들. 나는 그들의 때 이른 부고를 감옥에서 들었다. 제주교도소 2사 3방 95번. 이름 대신 번호로 불려와 면회실에 앉으면, 스물의 아들을 감옥에 보낸 마흔 일곱의 어머니가 송곳 같은 울음으로 당신을 찌르고 있었다.면회를 마치고 돌아오면 나는 일개 ‘잡범’이었다. 스물의 분노를 철없는 객기라며 손가락질하던 교도관들에게 대들고 싶었지만 나의 언어는 무기력했다. 감방은 5월에도 냉골이었다. 배식을 하고, ‘뼁기통’을 청소하는 틈틈이 기형도를 읽었다. 간수 몰래 숨겨놓았던 볼펜심을 건네준 것은 교통사고를 내고 들어온 서른 살쯤 되는 방장 형이었다. 방 안 죄수들 중에 유일한 먹물이라고 어쭙잖은 조언을 해준 덕택이었는지 모른다. 가느다란 볼펜심으로 기형도가 남긴 시의 행간에 나만의 글을 썼다. 얼... -
④1844년의 경제학 철학 수고 - 카를 마르크스
‘임금은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의 적대적 투쟁을 통해 결정된다’는 마르크스의 이 책을 처음 읽은 것은 대학 1학년 겨울 무렵이었다. 박종철 출판사에서 <칼 맑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 선집>을 내기 시작했고 이 글도 선집 1권에 수록되어 있었다. 나중에 여러 출판사에서 <경제학 철학 수고> <1844년의 경제학 철학 수고> 등의 제목으로 단행본이 나오기도 했지만 그때는 ‘신성가족’ ‘공산주의당 선언’ 등의 여러 글과 함께 묶여 있었다.고백하자면 전집 1권을 다 읽지 못했다. 임금노동, 노동 소외, 화폐의 본질 등 여러 부분을 뒤적이며 건너뛰기도 했다. 하지만 이 책의 마지막 문장만은 지금도 그대로 외울 수 있다. 일본의 철학자 사사키 아타루는 책은 읽는 것이 아니라 삼켜지는 것이라고 했는데 그야말로 갓 스물의 내가 삼켜버린 몇 안 되는 문장이 바로 마르크스의 글이었다.“네가 사랑을 하면서도 되돌아오는 사랑을 불러일으키지 못한... -
③검은 피부 하얀 가면 - 프란츠 파농
프란츠 파농을 처음 접한 것은 김남주 시인이 번역한 <자기의 땅에서 유배당한 자들>을 읽으면서였다. 대학 시절 헌책방에서 처음 이 책을 접했을 때 제목만 보고도 손이 갈 수밖에 없었다. 제주에서 나고 자란 사람이라면 ‘유배’라는 단어가 낯설지 않다. 입도 몇 대손이니 하는 항렬이 자연스럽기도 했지만, 그 무렵 현기영의 <변방에 우짖는 새>를 읽었던 때문이기도 했다. 현기영은 제주 사람들이야말로 “물 위에 뜬 뇌옥(牢獄)에 갇힌” 사람들이라고 했다. 어린 시절 다녔던 초등학교는 표준어 시범학교였다. 학교에서는 사투리를 쓰지 못하게 했다. ‘국민통합에 저해된다’는 게 이유였다. 행여 육지라도 가게 되면 ‘사투리 좀 해보라’는 호기심 어린 시선이 부담스러웠다. 말이 놀림거리가 될 수 있다는 사실 때문에 육지에 가면 본의 아니게 과묵해졌다. 용케 서울로 진학한 또래 친구들이 제일 먼저 익힌 것도 표준어였다. 우리는 그것을 ‘곤밥(쌀밥) 먹는... -
②4·3은 말한다 - 제민일보 4·3취재반
몇 해 전 오래된 사진 한 장을 본 적이 있다. 흐드러진 벚꽃을 배경으로 화염병과 최루탄이 오고 가던 시위 현장을 찍은 흑백 사진이었다. 사진 속 몇몇의 얼굴을 단번에 알아봤다. 왜 4월이면 벚꽃이 잊지도 않고 피었던지. 꽃 나들이 좋은 날들이었지만, 매운 최루탄 연기에 눈물 콧물 쏟고 나서야, 낙화를 안주로 삼아 막걸리 몇 잔 먹을 수 있었다. 대학에 입학하고 나서야 4월을 알았다. 금서를 몰래 읽고, 선전문을 돌려 보았다. 고통의 시간이 깊으면 실감조차 할 수 없다는 걸 그때 알았다. 항쟁의 분노와 학살의 공포 사이를 살아냈던 그 시절의 삶이 풍문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러다 <4·3은 말한다>를 만났다. 집요한 사실의 문장을 읽을수록 숨이 턱턱 막혔다. 책이 출간된 몇 해 후 신문사에 입사했다. 풍문을 사실의 기록으로 만들어간 주인공들과 함께 일했다. 오래된 컴퓨터 앞에서 취재를 정리하던 선배의 모습이 아직도 선하다. 신문사를 정리하고 대... -
①영웅문 - 김용
이제는 볼 수 있다. 교실 바닥에 넘어져 동급생의 발길질에 속수무책으로 떨고 있었던 열네 살의 소년을. 독서실 옥상으로 끌려가 벗겨진 바지를 애써 올리며 울고 있던 어린 시절의 나를. 그날 밤 별은 유난히 먼 데서 빛났다.끝을 알 수 없는 모멸감에 떨었던 중학 시절, 나는 틈만 나면 책의 세계로 도망갔다. 읽고 있는 동안만 잊을 수 있었다. 아버지가 월부 책장사에게 구입한 세계문학전집을 읽기 시작한 것도 그즈음이었다. 세로로 쓰인 작은 활자를 손으로 짚어가며 읽고 또 읽었다. 두꺼운 전집에 질릴 때쯤 집 근처 경찰청 도서관에서 김용을 만났다. 대민서비스 차원에서 민원실 2층을 작은 도서관으로 꾸몄던 것 같다. 구색을 갖추기 위한 시설이라 찾는 이는 많지 않았다.곽정, 양과, 황용의 이야기는 세계문학전집과는 다른 놀라운 신세계였다. <영웅문>이라는 다락방에서 나는 지긋지긋한 폭력을 잠시나마 잊을 수 있었다. 사파(邪派)의 암수에 내상을 입은 사춘... -
⑤지하생활자의 수기 - 도스토옙스키
나는 책 읽는 속도가 대단히 느리다.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을 삼중당 문고로 몇 권 사놓고 제대로 못 읽은 기억도 난다. 그러나 <지하생활자의 수기>는 쉽게 도전해 볼 수 있는 책이었다. 일단 분량이 얼마 되지 않거든. 이 책을 읽고 나서 나는 도스토옙스키가 얼마나 위대한지 깨달았다. 그는 이 짧은 1인칭 소설을 통해 19세기 유럽의 합리주의라는 위압적인 상대에게 도전장을 던지고 골리앗과 싸우는 다윗처럼 혈혈단신 맞선다. 이런 일을 한 사람은 그와 니체밖에 없다. 그 기개와 용기가 무시무시하다. 앙드레 지드의 말대로 이 작품은 도스토옙스키의 전체 작품을 푸는 열쇠다. “나는 병적인 인간이다. 나는 심술궂은 인간이다. 남에게 호감을 주지 못하는 인간이다.” 이 작품으로 예술은 비로소 ‘병리학적 인간학’이 된다. 지금으로 치면 악플이나 달고 살 법한 지하생활자는 세상에 대한 반감으로 가득한 음울한 인격의 소유자다. 그런 그... -
④지각의 현상학 - 모리스 메를로-퐁티
프랑스의 철학자 모리스 메를로-퐁티의 이름을 처음 들은 것은 1988년, 대학교 3학년 때였다. 나는 불문과를 다녔지만 종종 타 학과의 전공과목을 들었다. 2학기 들어 ‘예술철학’이라는 과목을 신청했다. 미학과의 오병남 선생님이 맡으신 그 강의에서 메를로-퐁티의 이름을 처음 접했던 거다.그러나 정작 강의를 열심히 듣지는 못했다. 2학기 개강하고 올림픽이 열렸고 학교문은 닫혔다. 휴교령 때문이었다. 그해 가을 하늘은 유난히 높고 파랬다. 청명한 하늘을 보며 우리는 빈둥거렸다. 10월이 되어 학교문이 다시 열렸지만 마음은 허전했다. 친구들은 모두 군대에 가고 없었다. 나는 빈 강의실에 혼자 엎드려 자곤 했다. 때로 기독교 계통의 친구들이 성경을 들고 내 잠을 깨웠다. 그러면 나는 도망치듯 한산한 도서관으로 가서 메를로-퐁티를 읽었다. 어려운 글들이 내 앞을 막아섰다. 정신이 번쩍 났다. 출구를 찾아야만 했다.2년 후, 나는 대학원생이 되었고, 메를로-퐁티의 ... -
③8월의 빛 - 윌리엄 포크너
1991년 초여름, 입대 날짜를 받아놓고 뒹굴뒹굴하던 때였다. 거실 책장에 꽂혀 있던 전집에서 우연히 이 책을 발견하고 읽기 시작했는데, 그건 실수였다. 소설을 손에서 놓기도, 그렇다고 들고 있기도 싫었다. 장마철의 습기 속에서 나는 알 수 없는 답답함에 휩싸인 채 이 소설을 읽어내려 갔다. 우선 너무 길고 지루했다. 읽기가 매우 까다로웠다. 특유의 비비 꼬인 문장을 번역투의 한글로 읽는 일이 쉽지 않았다.그러나 읽다 보니 나도 모르게 포크너의 열렬한 팬이 되어가고 있었다. 우선 ‘시간의 사용’이 너무나 독창적이었다. 미래로 가고 있는 하나의 시간이 있고, 그 시간에서 가지를 친 몇 갈래의 시간이 과거로 달려간다. 그랬다가 다시 미래를 향해 거슬러 오는데, 끝내 미래로 가지 못하고 기준이 되는 그 ‘하나의 시간’에 합류한다. 다층적 레이어의 시간들을 멀티트래킹하는 면에서 포크너는 유일무이한 대가다.과거와 현재가 함께 가기에 이 소설은 의식 흐름을 리얼하게... -
②록 일렉기타 주법교본
내 청춘의 시간이 아로새겨진 20세기 후반에 출판사가 하나 있었으니 이름하여 ‘후반기출판사’다. 주로 가요나 팝송 책을 펴내던 후반기출판사의 책들 후반부에는 수많은 청춘들의 이름이 가나다순으로 깨알같이 적혀 있곤 했다. 펜팔 주소록이었다.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가끔 그 이름과 주소들을 하염없이 쳐다봤다. 방바닥을 뒹굴며 세월 따라 한 장 두 장 뜯겨가던 후반기출판사의 책들은 다 사라지고 없지만 그중에서 지금껏 소장하고 있는 유서 깊은 책이 하나 있는데 그 제목은 <록 일렉기타 주법교본>이다.책 표지에는 오렌지 형광색에 고딕체로 제목이 써 있고, 아래쪽에는 ‘새 시대 새 방법 새 감각의 트레이닝’이라고 써 있다. 표현이 어딘가 일본스럽지 않나? 일본 책을 무단복제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돌이켜보니 당시에 나는 전기기타가 없었다. 중학교 때 조르고 졸라서 장만한 통기타로 이 책을 마스터하기엔 역부족이었다. 초반에 나오는 척 베리의 전설적인 ... -
①봉별기 - 이상
이상의 글들만큼 재미난 글들이 또 있을까? 무엇보다도 리드미컬하다. 또 날이 서있다. 읽는 재미로만 본다면 나는 그중에서도 자전적 소설인 ‘봉별기’를 최고로 친다.“스물세 살이요―삼월이요―각혈이다.”셋, 셋, 으로 가는 이 멋들어진 3박자의 인트로는 이 세상에서 내가 본 가장 유장한 죽음의 왈츠다. 카프카도 이상 앞에 무릎 꿇고 형님, 당신 라임에 졌소, 할 거다. 스물 세 살의 연속된 시옷들이 삼월의 시옷으로 이어지고, 살의 리을받침이 월의 리을 받침으로 넘어가더니 결국 각혈의 처절한 리을로 마무리된다. 이 시옷과 리을 사이에 ‘각혈’의 기역이 목을 칵, 하고 막는다. 이 드라마틱한 ‘ㄱ’의 쉼표 다음에, 화산처럼 용솟음친다. 피가. 청춘이 낭자하고, 유혈이 낭자하고, 슬픔이 낭자하고도 죽음 앞에서 춤이 흐드러진다. T S 엘리엇의 “4월은 가장 잔인한 달”도 처절하지만 이상의 죽음의 왈츠에는 못 미친다. 이것은 내가 들은 가장 잔인한 자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