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기완 | 시인·뮤지션

가장 잔인한 자기 고백

[성기완의 내 인생의 책]①봉별기 - 이상

이상의 글들만큼 재미난 글들이 또 있을까? 무엇보다도 리드미컬하다. 또 날이 서있다. 읽는 재미로만 본다면 나는 그중에서도 자전적 소설인 ‘봉별기’를 최고로 친다.

“스물세 살이요―삼월이요―각혈이다.”

셋, 셋, 으로 가는 이 멋들어진 3박자의 인트로는 이 세상에서 내가 본 가장 유장한 죽음의 왈츠다. 카프카도 이상 앞에 무릎 꿇고 형님, 당신 라임에 졌소, 할 거다. 스물 세 살의 연속된 시옷들이 삼월의 시옷으로 이어지고, 살의 리을받침이 월의 리을 받침으로 넘어가더니 결국 각혈의 처절한 리을로 마무리된다.

이 시옷과 리을 사이에 ‘각혈’의 기역이 목을 칵, 하고 막는다. 이 드라마틱한 ‘ㄱ’의 쉼표 다음에, 화산처럼 용솟음친다. 피가. 청춘이 낭자하고, 유혈이 낭자하고, 슬픔이 낭자하고도 죽음 앞에서 춤이 흐드러진다. T S 엘리엇의 “4월은 가장 잔인한 달”도 처절하지만 이상의 죽음의 왈츠에는 못 미친다. 이것은 내가 들은 가장 잔인한 자기 고백이다.

“여섯 달 잘 기른 수염을 하루 면도칼로 다듬어 코밑에 다만 나비만큼 남겨 가지고 약 한 제 지어 들고 B라는 신개지(新開地) 한적한 온천으로 갔다. 게서 나는 죽어도 좋았다.”

죽어도 좋았다고 썼지만 죽으러 간 거다. 그 처절한 자포자기에 멋이 흘러넘친다. 면도칼의 날카로움과 코 밑의 나비. 그의 무스타슈는 봄볕을 쬐며 꽃 사이로 팔랑거리는 호랑나비다. 이상은 나비의 환상조차 자기 신체에 아로새긴다. 그의 모든 작품이 자신을 비추는 거울이다. 그 나비는 무슨 꿈을 꾸었을까?

“나는 몇 편의 소설과 몇 줄의 시를 써서 내 쇠망해가는 심신 위에 치욕을 배가하였다. (…)나는 하여간 허울 좋게 말하자면 망명해야겠다.”

이 구절을 읽으며 왜 그렇게 마음이 아팠던가. 이상은 볕 좋은 춘삼월 식민지 상태의 온천지에서 망명을 꿈꾸었다. 여러분들은 지금 뭘 꿈꾸십니까.


Today`s HOT
올림픽 성화 도착에 환호하는 군중들 러시아 전승절 열병식 이스라엘공관 앞 친팔시위 축하하는 북마케도니아 우파 야당 지지자들
파리 올림픽 보라색 트랙 첫 선! 영양실조에 걸리는 아이티 아이들
폭격 맞은 라파 골란고원에서 훈련하는 이스라엘 예비군들
바다사자가 점령한 샌프란만 브라질 홍수, 대피하는 주민들 토네이도로 파손된 페덱스 시설 디엔비엔푸 전투 70주년 기념식
경향신문 회원을 위한 서비스입니다

경향신문 회원이 되시면 다양하고 풍부한 콘텐츠를 즐기실 수 있습니다.

  • 퀴즈
    풀기
  • 뉴스플리
  • 기사
    응원하기
  • 인스피아
    전문읽기
  • 회원
    혜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