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해자의 작은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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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해자의 작은 이야기]이날 평상 봄이 안 온 적이 없어

    이날 평상 봄이 안 온 적이 없어

    쓰러진 한마리 개 옆에 주저앉아 떨며 죽음의 과속을 멈추려는 사람오염물 뒤집어쓴 흙과 죽어가는 벌레와 풀, 잘린 나무의 신음을 듣는 사람저는 그를 아버지라 부르겠습니다먹고 먹히는 계산법을 넘어 자연의 경이에 무릎을 꿇는 사람자비와 분노가 한통속인 사람서로 밥이 되어주기를 바라 마지않는 사람저는 그를 형제이자 스승으로 받들겠습니다절망조차 사치임을 아는 사람탄식 속에서도 벌거벗은 인간의 영혼에 호소하는 것이결코 헛되지 않음을 믿는 사람아흔아홉의 낙담 속에서도 한줄의 희망을 꿰는 사람죽어가는 나무에게 물을 주는 사람저는 그를 친구이자 동지라 믿겠습니다폭력과 탐욕으로 얼룩진 인류 역사의 나쁜 책들을 태우고절멸을 향해 가는 마지막 페이지를 고쳐 쓰는 당신이 촛불입니다스스로를 태워 자기를 갱신하는 대지처럼폭염과 산불과 가뭄, 광폭한 바람과 비,물과 불조차 치우친 압도적인 비대칭 속에서 세계가 피 흘릴 때대지에...
  • [김해자의 작은 이야기]굉장하고 신비한 불꽃

    굉장하고 신비한 불꽃

    계단을 허겁지겁 뛰어내려왔는데발목을 삐끗하지 않았다오늘은 이런 것이 신기하다불행이 어디 쉬운 줄 아니버스는 제시간에 도착했지만또 늦은 건 나다하필 그때 크래커와 비스킷의 차이를 검색하느라두 번의 여름을 흘려보냈다사실은 비 오는 날만 골라 방류했다다 들킬 거면서 정거장의 마음 같은 건 왜 궁금한지지척과 기척은 서로의 존재를 알고 있을지장작을 태우면 장작이 탄다는 사실이 신기해서오래 불을 바라보던 저녁이 있다그 불이 장작만 태웠더라면 좋았을걸바람이 불을 돕지 않았더라면 좋았을걸솥이 끓고솥이 끓고세상 모든 펄펄의 리듬 앞에서나는 자꾸 버스를 놓치는 사람이 된다신비로워, 딱따구리의 부리쌀을 세는 단위가 하필 ‘톨’인 이유잔물결이라는 말솥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는 모른다다만 신기를 신비로 바꿔 말하는 연습을 하며 솥을 지킨다떠나지 않는 사람이 된다는 것내겐 그것이 중요하다...
  • [김해자의 작은 이야기]엄마는 얼마인가

    엄마는 얼마인가

    책을 보다가 엄마를 얼마로잘못 읽었다얼마세요?엄마가 얼마인지알 수 없었는데,책 속의 모든 얼마를 엄마로읽고 싶어졌는데눈이 침침하고 뿌예져서안 되었다엄마세요? 불러도 희미한 잠결,대답이 없을 것이다아픈 엄마를 얼마로계산한 적이 있었다얼마를 마른 엄마로 외롭게,계산한 적도 있었다밤 병동에서엄마를 얼마를,엄마는 얼마인지를알아낸 적이 없었다눈을 감고서,답이 안 나오는 계산을나는 열심히 하면엄마는 옛날처럼 머리를쓰다듬어줄 것이다엄마는 진짜 얼마세요?매일 밤 나는 틀리고틀려도,엄마는 내 흰머리를쓰다듬어줄 것이다-시, ‘계산’, 이영광 시집 <살 것만 같던 마음>이틀 사이에 겨울이 왔다. 추위를 대비해 부직포를 덮어놓은 마늘밭과 무밭도 하얗게 눈이불을 덮고 있다. 몇 포기 남은 배추와 쪽파와 갓배추만 희푸르고 희붉은 빛. 엊그제는 눈 오기 전에 쪽...
  • [김해자의 작은 이야기]물의 말, 공기의 말

    물의 말, 공기의 말

    바닷물은 차고 볕은 한없이 따가운 칠월 초순 첫 멍게 작업이었다휘이휘이 숨 트며 방파제 돌아 나오던 춘자 형님이 그만 정신을 놓았다후불 형님과 돌돌이 형님이 둥둥 뜬 몸 끌고 와물옷 물고 찢으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119, 119, 사람 간다. 119 전화해라순식간에 모여든 해녀들이 둥그렇게 에워싸고는 발을 동동 굴렀다백지장처럼 하얗게 돌아가는 목숨을 붙들겠다고 울부짖었다살아래이살 거래이가믄 안 된데이살아야 한데이춘자야 인나거라, 인나라, 인나라숨을 놓는 동료에게 주문을 걸던 고래들이 생각났다주둥이로 힘껏 물 위로 차올려 몇번이고 분기공 띄우려 애쓰던 참돌고래들가라앉는 삶을 떠받치며 푸른 바다 검게 울던 물의 말구급차가 올 때까지 울며불며 심장 두드리던 해녀들이춘자 형님 숨 하나 뱉자 가슴 쓸어내리며 주저앉았다물안경 자국 깊은 얼굴에서 바닷물이 눈물처럼 흘렀다됐다, 인자 됐다-시 ‘...
  • [김해자의 작은 이야기]정뜨르 비행장과 알뜨르 비행장

    정뜨르 비행장과 알뜨르 비행장

    하루에도 수백의 시조새들이날카로운 발톱으로 바닥을 할퀴며 차오르고찢어지는 굉음으로 바닥 짓누르며 내려앉는다차오르고 내려앉을 때마다뼈 무너지는 소리 들린다빠직 빠직 빠지지지직빠직 빠직 빠지지지직시커먼 아스팔트 활주로 밑바닥반백년 전까닭도 모르게 생매장되면서 한 번 죽고땅이 파헤쳐지면서 이래저래 헤갈라져 두 번 죽고활주로가 뒤덮이면서 세 번 죽고그 위를 공룡의 시조새가발톱으로 할퀴고 지날 때마다 다시 죽고그때마다 산산이 부서지는 뼈소리 들린다빠직 빠직 빠지지지직빠직 빠직 빠지지지직정뜨르 비행장이 국제공항으로 변하고하루에도 수만의 인파가 시조새를 타고 내리는 지금‘저 시커먼 활주로 밑에 수백의 억울한 주검이 있다!’‘저 주검을 이제는 살려내야 한다!’라고외치는 사람 그 어디에도 없는데샛노랗게 질려 파르르 떨고 있는 유채꽃 사월활주로 밑 어둠에 갇혀몸 뒤척일 때마다 들려오는 뼈들의 아우성이 ...
  • [김해자의 작은 이야기]빵과 장미의 유통기한은 영원

    빵과 장미의 유통기한은 영원

    미래가 없는 사람처럼 살고 미래가 있는 사람처럼 죽고 있습니다오늘도 죽고 있습니다 매일 죽고 있습니다떨어져 죽고 끼여 죽고 맞아 죽고 부딪혀 죽고 깔려 죽고 붕괴되어 죽고 있습니다이 시각에도 땀 흘리다 죽고 피 흘리며 죽고 있습니다미래?죽음을 갈아 넣는 세계와 헛된 죽음의 죽음을 멈추지 않는 이곳에 미래가 있습니까알버틴장미 사향장미 다마스크장미 백장미 캐비지로즈 아일랜드의불꽃 아도니스 레이딩리딩 스노우퀸 붉은 글자의 날 튜터장미 노수부 바스의 아내 토마스 베케트 에밀리 브론테 티 로즈 ……장미들은오늘도 제 몫의 이름을 달고 피어오르는데이름이 없는 사람처럼 살고 이름이 없었던 사람들처럼 죽고 있습니다오늘도 죽고 있습니다 매일 죽고 있습니다-시 ‘노동의 미래’, 안현미 시집 <미래의 하양>김장배추와 무와 갓배추를 심다 한숨이 절로 나온다. 저 하얗게 타버린 고추를 달고 있는 고춧대를 어찌할까. 가지가 ...
  • [김해자의 작은 이야기]어둠 속에서 실패가 빛날 때

    어둠 속에서 실패가 빛날 때

    어둠 속에서 새벽이 오는 것을 보았다어둠이 어떻게 물러나는가를 찬찬히 보았다유리창이 내 얼굴을 꽉 붙들고 있었다내 눈에 비치는 내 눈세숫대야에 담그고 있는 것처럼어둠 속에 얼굴을 담그고 있었다어둠은 꼼짝없이 그 자리에 가만히 있더니서서히 얼굴을 풀어 놓아 주었다돌아서서 검은 얼굴을 씻는다묻어나지 않는 어둠, 손바닥으로 훑으니산새 울음 하나 따라 나오고아무리 뚫어져라 보고 있어도 훨훨그가 물러나는 처음을 볼 수는 없었다 -시, ‘어둠은 어떻게 새벽이 되는가’, 임혜주 시집 <어둠은 어떻게 새벽이 되는가>덥다. 해마다 기록을 경신하니 올해가 우리 생애 가장 시원한 여름이겠다. 이상한 일이 늘 벌어진다. 모가 한창 기세 좋게 자라야 하는데 뽑아도 뽑아도 논에선 풀이 사라지지 않는다. 평생 벼농사를 지어온 농부도 모르는 풀이 벼 옆에 자란다. 나도 옥수수 때문에 애를 먹었다. 잎이 자랄 때는 폭...
  • [김해자의 작은 이야기]작은 것이 아름답다

    작은 것이 아름답다

    이웃들, 벗들, 새와 달과 양철지붕에 내리는 빗소리와 별과 나무 그리고 텃밭의 벌레와 채소들과 찾아오는 손님들과 지고 뜨는 해와 꽃등처럼 내건 곶감과 마당의 꽃들과 아침 고요한 차 한 잔과 처마 끝 풍경소리와 계절마다의 비바람과 함박눈에게 감사의 말을 전하네또한 깊은 밤 자꾸 방안으로 기어 들어오는 개울물 소리와 푸른 하늘과 따뜻한 장작더미와 삶의 뜨락을 쓸어 주는 인연의 빗자루와 혼자 먹는 밥상의 쓸쓸함과 그 밥상 위의 장식이 되어 준 생명들과 내 안의 웃음과 미움과 분노와 눈물과 슬픔과 사랑들께 깊이 허리 숙이네 가엾은 내 몸과 영혼이여 고마워요 거듭 감사드리네- 시 ‘인사말’, 박남준 시집 <어린 왕자로부터 새드 무비>흙을 깊게 갈아엎지 않아도 되는 농사법을 실험 중이다. 산마늘이나 아스파라거스 같은 귀족 식물은 물론이려니와 꽃나물이라 불리는 삼잎국화나 울릉도취라 불리는 부지깽이와 곰취 등 나물이 주종이다. 그 애들은 아무리 잎을 잘라먹어...
  • [김해자의 작은 이야기]땀방울에 섞인 눈물 닦고

    땀방울에 섞인 눈물 닦고

    그대가 안간힘을 쓰고 있을 때능소화보다 더 진한 노을이 그대 뒤에 있었다그대가 기진맥진해 있을 때감빛 노을에 어둠의 먹물이 흘러들고 있었다그대의 한쪽 무릎이 주저앉을 때노을은 한쪽 가슴이 까맣게 타고 있었다포기하지 마라재가 된 하늘 위에 사리 같은 별이 뜬다그 별이 더 많은 별을 불러올 것이다땀방울에 섞인 눈물 닦고 허리를 펴라어둠 속에 어둠만 있는 게 아니다저녁 바람도 초승달도 모두 그대 편이다-시, ‘노을’, 도종환 시집, <정오에서 가장 먼 시간> 며칠째 땡볕이 이어진다. 하지가 열흘 남았는데 7월인가 싶게 뜨겁다. 상춧잎도 헐떡거리고 여린 고춧잎도 기진맥진해 보인다. 붉은 꽃 수없이 피워내던 양귀비도 시들해지고 감자잎이 눕고 마늘대도 노리끼리해졌다. 하지 무렵 땅과 이별해야 할 감자와 마늘 너머 옥수수밭만 청청하다. 사춘기 아이들처럼 날마다 다르게 커간다. 귀촌해 사는 동안 땅이 공짜...
  • [김해자의 작은 이야기]온갖 열망이 온갖 실수가

    온갖 열망이 온갖 실수가

    나는 고요하게 몸을 부풀리는 중일 초 일 초 아주 조금씩 늘어나는 중내일 보면 모르겠지 일년 후에도 모를 거야멀리서 돌아보면 나는 커져 있을 예정스멀스멀 징그럽게한이나 화 나뭇가지 이것저것 모아서너를 지우기 위해 말이지약한 자라 참고 있는 거 아니냐 하면 맞아 난 강해져도 티내지 않는식물성 힘을 갖게 될 거야크게 자라 신령하게 될 거야모두 고개를 숙이고 기도하게 될 거야기도하는 손들 점점 늘어술과 떡을 바치게 될 거야어느 날 벼락을 맞을지도 모르는 일 그러나알 바 있니 늘어나는 중인데 부푸는 중인데세상의 이치를 거슬러 시간을 뛰어넘어고요하게 날뛰는 중인데물을 머금고 공기와 스킨십하며 - 시 ‘자연-복수’, 권민경 시집 <온갖 열망이 온갖 실수가>비 갠 봄날 아침은 눈부시다. 온갖 열망이 터져나오는 듯 싱싱하다. 물방울 맺힌 풀 하나도 풀에 얹힌 물방울도 저마다 빛나며 서로를 비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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