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물의 말, 공기의 말
바닷물은 차고 볕은 한없이 따가운 칠월 초순 첫 멍게 작업이었다휘이휘이 숨 트며 방파제 돌아 나오던 춘자 형님이 그만 정신을 놓았다후불 형님과 돌돌이 형님이 둥둥 뜬 몸 끌고 와물옷 물고 찢으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119, 119, 사람 간다. 119 전화해라순식간에 모여든 해녀들이 둥그렇게 에워싸고는 발을 동동 굴렀다백지장처럼 하얗게 돌아가는 목숨을 붙들겠다고 울부짖었다살아래이살 거래이가믄 안 된데이살아야 한데이춘자야 인나거라, 인나라, 인나라숨을 놓는 동료에게 주문을 걸던 고래들이 생각났다주둥이로 힘껏 물 위로 차올려 몇번이고 분기공 띄우려 애쓰던 참돌고래들가라앉는 삶을 떠받치며 푸른 바다 검게 울던 물의 말구급차가 올 때까지 울며불며 심장 두드리던 해녀들이춘자 형님 숨 하나 뱉자 가슴 쓸어내리며 주저앉았다물안경 자국 깊은 얼굴에서 바닷물이 눈물처럼 흘렀다됐다, 인자 됐다-시 ‘... -
정뜨르 비행장과 알뜨르 비행장
하루에도 수백의 시조새들이날카로운 발톱으로 바닥을 할퀴며 차오르고찢어지는 굉음으로 바닥 짓누르며 내려앉는다차오르고 내려앉을 때마다뼈 무너지는 소리 들린다빠직 빠직 빠지지지직빠직 빠직 빠지지지직시커먼 아스팔트 활주로 밑바닥반백년 전까닭도 모르게 생매장되면서 한 번 죽고땅이 파헤쳐지면서 이래저래 헤갈라져 두 번 죽고활주로가 뒤덮이면서 세 번 죽고그 위를 공룡의 시조새가발톱으로 할퀴고 지날 때마다 다시 죽고그때마다 산산이 부서지는 뼈소리 들린다빠직 빠직 빠지지지직빠직 빠직 빠지지지직정뜨르 비행장이 국제공항으로 변하고하루에도 수만의 인파가 시조새를 타고 내리는 지금‘저 시커먼 활주로 밑에 수백의 억울한 주검이 있다!’‘저 주검을 이제는 살려내야 한다!’라고외치는 사람 그 어디에도 없는데샛노랗게 질려 파르르 떨고 있는 유채꽃 사월활주로 밑 어둠에 갇혀몸 뒤척일 때마다 들려오는 뼈들의 아우성이 ... -
빵과 장미의 유통기한은 영원
미래가 없는 사람처럼 살고 미래가 있는 사람처럼 죽고 있습니다오늘도 죽고 있습니다 매일 죽고 있습니다떨어져 죽고 끼여 죽고 맞아 죽고 부딪혀 죽고 깔려 죽고 붕괴되어 죽고 있습니다이 시각에도 땀 흘리다 죽고 피 흘리며 죽고 있습니다미래?죽음을 갈아 넣는 세계와 헛된 죽음의 죽음을 멈추지 않는 이곳에 미래가 있습니까알버틴장미 사향장미 다마스크장미 백장미 캐비지로즈 아일랜드의불꽃 아도니스 레이딩리딩 스노우퀸 붉은 글자의 날 튜터장미 노수부 바스의 아내 토마스 베케트 에밀리 브론테 티 로즈 ……장미들은오늘도 제 몫의 이름을 달고 피어오르는데이름이 없는 사람처럼 살고 이름이 없었던 사람들처럼 죽고 있습니다오늘도 죽고 있습니다 매일 죽고 있습니다-시 ‘노동의 미래’, 안현미 시집 <미래의 하양>김장배추와 무와 갓배추를 심다 한숨이 절로 나온다. 저 하얗게 타버린 고추를 달고 있는 고춧대를 어찌할까. 가지가 ... -
어둠 속에서 실패가 빛날 때
어둠 속에서 새벽이 오는 것을 보았다어둠이 어떻게 물러나는가를 찬찬히 보았다유리창이 내 얼굴을 꽉 붙들고 있었다내 눈에 비치는 내 눈세숫대야에 담그고 있는 것처럼어둠 속에 얼굴을 담그고 있었다어둠은 꼼짝없이 그 자리에 가만히 있더니서서히 얼굴을 풀어 놓아 주었다돌아서서 검은 얼굴을 씻는다묻어나지 않는 어둠, 손바닥으로 훑으니산새 울음 하나 따라 나오고아무리 뚫어져라 보고 있어도 훨훨그가 물러나는 처음을 볼 수는 없었다 -시, ‘어둠은 어떻게 새벽이 되는가’, 임혜주 시집 <어둠은 어떻게 새벽이 되는가>덥다. 해마다 기록을 경신하니 올해가 우리 생애 가장 시원한 여름이겠다. 이상한 일이 늘 벌어진다. 모가 한창 기세 좋게 자라야 하는데 뽑아도 뽑아도 논에선 풀이 사라지지 않는다. 평생 벼농사를 지어온 농부도 모르는 풀이 벼 옆에 자란다. 나도 옥수수 때문에 애를 먹었다. 잎이 자랄 때는 폭... -
작은 것이 아름답다
이웃들, 벗들, 새와 달과 양철지붕에 내리는 빗소리와 별과 나무 그리고 텃밭의 벌레와 채소들과 찾아오는 손님들과 지고 뜨는 해와 꽃등처럼 내건 곶감과 마당의 꽃들과 아침 고요한 차 한 잔과 처마 끝 풍경소리와 계절마다의 비바람과 함박눈에게 감사의 말을 전하네또한 깊은 밤 자꾸 방안으로 기어 들어오는 개울물 소리와 푸른 하늘과 따뜻한 장작더미와 삶의 뜨락을 쓸어 주는 인연의 빗자루와 혼자 먹는 밥상의 쓸쓸함과 그 밥상 위의 장식이 되어 준 생명들과 내 안의 웃음과 미움과 분노와 눈물과 슬픔과 사랑들께 깊이 허리 숙이네 가엾은 내 몸과 영혼이여 고마워요 거듭 감사드리네- 시 ‘인사말’, 박남준 시집 <어린 왕자로부터 새드 무비>흙을 깊게 갈아엎지 않아도 되는 농사법을 실험 중이다. 산마늘이나 아스파라거스 같은 귀족 식물은 물론이려니와 꽃나물이라 불리는 삼잎국화나 울릉도취라 불리는 부지깽이와 곰취 등 나물이 주종이다. 그 애들은 아무리 잎을 잘라먹어... -
땀방울에 섞인 눈물 닦고
그대가 안간힘을 쓰고 있을 때능소화보다 더 진한 노을이 그대 뒤에 있었다그대가 기진맥진해 있을 때감빛 노을에 어둠의 먹물이 흘러들고 있었다그대의 한쪽 무릎이 주저앉을 때노을은 한쪽 가슴이 까맣게 타고 있었다포기하지 마라재가 된 하늘 위에 사리 같은 별이 뜬다그 별이 더 많은 별을 불러올 것이다땀방울에 섞인 눈물 닦고 허리를 펴라어둠 속에 어둠만 있는 게 아니다저녁 바람도 초승달도 모두 그대 편이다-시, ‘노을’, 도종환 시집, <정오에서 가장 먼 시간> 며칠째 땡볕이 이어진다. 하지가 열흘 남았는데 7월인가 싶게 뜨겁다. 상춧잎도 헐떡거리고 여린 고춧잎도 기진맥진해 보인다. 붉은 꽃 수없이 피워내던 양귀비도 시들해지고 감자잎이 눕고 마늘대도 노리끼리해졌다. 하지 무렵 땅과 이별해야 할 감자와 마늘 너머 옥수수밭만 청청하다. 사춘기 아이들처럼 날마다 다르게 커간다. 귀촌해 사는 동안 땅이 공짜... -
온갖 열망이 온갖 실수가
나는 고요하게 몸을 부풀리는 중일 초 일 초 아주 조금씩 늘어나는 중내일 보면 모르겠지 일년 후에도 모를 거야멀리서 돌아보면 나는 커져 있을 예정스멀스멀 징그럽게한이나 화 나뭇가지 이것저것 모아서너를 지우기 위해 말이지약한 자라 참고 있는 거 아니냐 하면 맞아 난 강해져도 티내지 않는식물성 힘을 갖게 될 거야크게 자라 신령하게 될 거야모두 고개를 숙이고 기도하게 될 거야기도하는 손들 점점 늘어술과 떡을 바치게 될 거야어느 날 벼락을 맞을지도 모르는 일 그러나알 바 있니 늘어나는 중인데 부푸는 중인데세상의 이치를 거슬러 시간을 뛰어넘어고요하게 날뛰는 중인데물을 머금고 공기와 스킨십하며 - 시 ‘자연-복수’, 권민경 시집 <온갖 열망이 온갖 실수가>비 갠 봄날 아침은 눈부시다. 온갖 열망이 터져나오는 듯 싱싱하다. 물방울 맺힌 풀 하나도 풀에 얹힌 물방울도 저마다 빛나며 서로를 비춘다... -
오래 들여다본다는 것
바이칼호수 푸른 눈가에서 태어났다 태극 무늬 두르고 먼 하늘 날아왔다 시베리아 몽고 지나 만리 길날갯짓 소리 들으며 서로의 울음소리 들으며 날면서 합류하고 날수록 무리가 커졌다맨몸으로 왔다 공중에 매달려 왔다 작아서 모였다 추울수록 날았다떼 지어 춤추고 떼로 울면서, 가창오리는 야간조 노을빛 이고 밥 벌러 간다어두워야 난다 배고파서 오른다원이 춤춘다 공이 날아가고 물폭탄이 쏟아진다날개 파닥이는 자리마다 탱크 소리, 서로 상하지 않는다부딪치지 않는다 춤꾼이자 소리꾼 가창오리는 노래가 춤이고 울음이 노래, 어두울 무렵 기지개를 켠다 외따로들 앉아 있던 가창오리들이 물 박차고 치솟는다 동시에 날아오른다 곤두박질치고 흩어졌다 다시 대열을 이룬다시시각각 하늘에 새겨지는 검붉은 띠펼쳤다 접고 갔다 돌아온다 산이 울렁거린다 강이 흔들린다,기나긴 밤샘 작업이 끝나고 먼동이 트면 다시 솟구칠 게다낱낱이 ... -
너, 먼 데서 이기고 올 사람아
기다리지 않아도 오고기다림마저 잃었을 때에도 너는 온다.어디 뻘밭 구석이거나썩은 물웅덩이 같은 데를 기웃거리다가한눈 좀 팔고, 싸움도 한판 하고,지쳐 나자빠져 있다가다급한 사연 들고 달려간 바람이흔들어 깨우면눈 부비며 너는 더디게 온다.더디게 더디게 마침내 올 것이 온다.너를 보면 눈부셔일어나 맞이할 수가 없다.입을 열어 외치지만 소리는 굳어나는 아무것도 미리 알릴 수가 없다.가까스로 두 팔을 벌려 껴안아 보는너, 먼 데서 이기고 돌아온 사람아.-시 ‘봄’, 이성부 시집 <우리들의 양식>봄이다. 꽃다지도 부추도 파도 시금치도 퍼렇게 올라오는 봄이다. 봄바람과 겨울 끝바람이 기싸움을 벌이긴 해도 봄이다. 간밤에 얼었는지, 이파리 가장자리마다 눈꽃 같은 흔적이 있긴 해도, 봄이 이길 것이란 믿음만은 흔들리지 않는다. “기다리지 않아도 오고/ 기다... -
슬픔이 한 숟가락은 줄어들기를
아프리카 기니산 조기 눈이 하얗게 변할 때까지뒤집히고 뒤집힌 배가 검게 그을릴 때까지기름이 연기가 될 때까지밤을 벗어난 아침은 상을 차린다차례와 제사는 하나의 형식페루산 오징어와 칠레산 포도기니산 조기와 미국산 오렌지국산 도라지도 올라간다허겁지겁 식사를 하는 검은 눈에 쳐진 그물들‘내년이면 이 집도 슬픔이 한숟가락은 줄어들 겁니다’뒷밥을 문밖에 내놓는다지나가던 검은 눈의 방글라데시인 칸씨도터키인 쇤메즈씨도중국인 리우씨도 탈북인 김씨도형태를 알 수 없이 일그러진 무연고자씨도허겁지겁 음복하는 문 앞한술 뜨는 수십개의 손들젓가락이 놓친 공기들서로 다른 국적을 가진 조기의 눈들처럼텅 빈 입이 둥둥 떠다니는 씨들생이 일찌감치 거덜 난 씨들다시 발이 없이 멀어지는 씨들칼끝이 바깥으로 향하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