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동열의 야구, 이야기] 보이지 않는 미래, 스스로 길을 연 ‘천재’

④ 김라경의 도전

요즘 서점에 가보면 ‘정해진 미래’라는 키워드를 가진 책을 여러 권 볼 수 있다. 인구학과 경제학에서 많이 쓰는 용어다. 현재의 데이터를 통해 미래를 예측하는 것이 특정 분야에서는 어렵지 않은 모양이다.

미래가 정해졌다면 우리 삶은 어떨까. 어제처럼 오늘을 살고, 오늘과 비슷한 내일을 맞이할 것이다. 남들이 만든 길 위를 걸으면 그만이다. 인간의 의지로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으니 굳이 애쓸 필요도 없다.

미래가 없는 청년을 본 적이 있다. 2016년 LG배 국제여자야구대회에서 만난 김라경이었다. 당시 중학교 3학년, 열여섯 살이었다.

처음 봤을 때 깜짝 놀랐다. 여중생이 시속 110㎞ 정도의 빠른 공을 던졌고, 무엇보다 하체를 이용한 부드러운 투구 동작이 일품이었다. ‘공을 던질 줄 아는’ 투수였다. 성인이 되면 시속 130㎞ 이상의 공도 던질 것 같았다.

서울대 야구 선수 김라경. 박민규 선임기자

김라경은 여자야구에서 천재로 통했다. 최연소 국가대표 선수였고, 언론에도 여러 차례 소개됐다. 그런 선수에게 미래가 없었다. 17세가 넘으면 더는 리틀야구에서 뛸 수 없기 때문이다. 국내에는 여자선수가 뛸 수 있는 고교야구 팀이 없었다. 김라경의 재능과 열정을 도저히 지나칠 수 없었다. 글러브와 스파이크를 선물하고, 그가 일본 오사카 고교야구 팀에서 뛸 방법을 알아봐 준 적도 있다.

김라경의 미래는 김라경이 정했다. 그는 계룡고 진학을 선택했고, 한 번도 야구를 포기하지 않았다. 척박한 환경에서 땀 흘리며 2017년 세계여자야구월드컵 대표팀에 선발됐다. 틈틈이 공부도 열심히 했다. 2020년 서울대 체육교육과에 입학했다.

더 큰 꿈은 서울대 야구부에 입단하는 것이었다. 엘리트 선수들만 지원할 수 있는 다른 대학 야구부와 달리 서울대 야구부에서는 일반 학생도 대학리그에서 뛸 기회가 있기 때문이었다. 이 팀에 들어가는 것이 야구를 계속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고 했다.

김라경의 발자취는 이제 여자야구의 길이 되고 있다. 한국 야구에서 그는 여자야구 최연소 국가대표, 서울대 야구부 최초의 여자선수 등의 기록을 남겼다. 그리고 김라경은 6월 일본 여자야구 실업팀 아사히 트러스트에 입단한다. 한국 여자야구 선수 최초의 해외 진출 사례다.

그가 뛸 곳은 프로가 아닌 실업리그다. 야구는 주말에 하고, 주중에는 회사 일을 해야 한다고 한다. 대견하면서도 짠한 마음이 들어 얼마 전 만나 식사하면서 응원의 마음을 전했다.

김라경은 말했다. “한국에 여자야구를 위한 매뉴얼 같은 게 없어요. 제가 더 큰 무대를 직접 경험하면서 배울 생각입니다. 제 후배들은 저보다 더 좋은 환경에서 뛰고, 저를 뛰어넘는 선수로 성장하면 좋겠어요.”

1996년 일본 주니치에 입단했을 때, 나는 한국 프로야구 출신으로 가장 먼저 해외에 진출한 선수였다. 난관이 있었고, 용기가 필요했다. 그래도 나는 프로 선수였으니 야구만 잘하면 됐다.

김라경은 나와 다르다. 스스로 길을 찾고 있다. 미래를 만들고 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구체적이고 담대한 계획을 이미 세워놓고 있었다. 6년 전에는 어린 그의 투구에 감탄했지만, 지금은 그의 의지에 감동한다. 자랑스러운 대한민국 청년 김라경을 응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