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미란 언니와 비교하면 난 아직 아기…해야 되나 했는데 이젠 꿈이 생겼어요”

춘천 | 하경헌 기자

도쿄 올림픽 또 한 명의 ‘아름다운 4위’

여자역도 국가대표 이선미

<b>“파리에선 메달 번쩍 들어야죠”</b> 2020 도쿄 올림픽 여자역도 87㎏ 이상급에서 4위에 오른 이선미(강원도청)가 21일 경향신문과 인터뷰하며 역기를 들어올리는 포즈를 취하고 있다.    정지윤 선임기자

“파리에선 메달 번쩍 들어야죠” 2020 도쿄 올림픽 여자역도 87㎏ 이상급에서 4위에 오른 이선미(강원도청)가 21일 경향신문과 인터뷰하며 역기를 들어올리는 포즈를 취하고 있다. 정지윤 선임기자

남자아이들 휘어잡던 힘센 소녀
역도장 기구 소리 겁나 도망도

처음 경험한 응원 큰 동기 부여
아쉬운 성적 예쁘게 포장 감사
파리 올림픽엔 꼭 시상대 올라
BTS 슈가 팬이라 말할 겁니다

2020 도쿄 올림픽 폐막 보름, 이선미(21·강원도청)는 다시 바벨 앞에 서 있었다. 지난 4일 귀국해서 나흘만 쉬고 일요일부터 강원도 춘천에 있는 강원체육회 훈련장으로 돌아왔다. 다음 대회는 10월 전국체전으로 조금 여유가 있지만 역도 종목 특성상 무작정 쉬면 근육이 풀려버려 다시 몸을 만들기까지 배 이상 공을 들여야 하기에 휴식 기간을 최소화했다. 지난 20일 춘천 강원체육회 인근 카페에서 만난 이선미는 “출퇴근의 일상으로 다시 돌아왔다”며 배시시 웃었다. 하지만 엄청난 모험을 하고 돌아온 판타지 소설 주인공처럼 다시 돌아온 일상의 느낌은 예전과 다르다.

이선미는 도쿄 올림픽 여자역도 87㎏ 이상급에서 4위를 차지했다. 인상 125㎏, 용상 152㎏으로 합계 277㎏을 들었다. 동메달을 딴 미국의 사라 로블레스의 합계 282㎏(인상 128㎏·용상 154㎏)에 5㎏ 모자랐다. 인상을 3위로 마쳤지만 용상 3차시기에서 155㎏을 들지 못한 것이 아쉬웠다. 155㎏을 들었다면 순위는 어떻게 바뀔지 몰랐다.

하지만 이미 지난 일, 이선미는 승자들에게 박수를 보내면서 4위까지 온 자신 또한 대견하게 여겼다. 이번 올림픽은 4위들이 특별히 조명받은 무대였다. 이들은 패배자가 아닌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긴 승리자라는 사실에 국민들은 새삼 공감했다.

이선미도 그랬다. 도쿄 올림픽을 앞둔 지난해 허리 부상으로 디스크 수술을 받았다. 재활에도 열을 올렸지만 대회를 앞두고 컨디션이 충분히 올라오지 않은 상태였다. 이선미는 “개인기록이 인상 127㎏, 용상 155㎏이었지만, 이번 훈련 때는 인상 115㎏도 놓치고, 용상 145㎏도 겨우 들었다. 첫 올림픽인데 망치면 어떡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래도 실전에 강한 편이어서 이만큼의 성과를 냈다”고 웃었다.

“장미란 언니와 비교하면 난 아직 아기…해야 되나 했는데 이젠 꿈이 생겼어요”

그래도 용상 3차시기는 너무 아쉬웠다. 이선미는 “무게는 괜찮았지만 바벨을 들고 구르기 자세를 할 때 (리듬이) 잘 안 맞았다. 실수였다. 만일 155㎏을 들었으면 어땠을까 생각했다. 스스로에게 화가 나 눈물이 좀 났다”며 쑥스러워했다.

이선미의 체급은 뉴질랜드의 성전환 선수였던 로렐 허버드의 출전종목으로도 유명했다. “똑같은 선수라고 생각해 그다지 신경쓰지 않았다”고 덤덤해 한 이선미는 “그래도 앞으로 비슷한 선수들이 많이 나오면 좀 불공평해지지 않나 싶었다”면서도 “국제대회에 나가면 라이벌도 롤모델도 없다. 다른 선수는 별로 신경쓰지 않는 편”이라고 말했다.

경북 경산에서 초등학교 재학 시절 남자 아이들을 휘어잡던 힘 센 소녀였던 이선미는 선생님의 권유로 역도를 시작했다. 처음에는 역도장의 기구소리와 언니들의 얼굴이 무서워 역도장에 연습간다고 해놓고, 두 달 동안 딴 곳으로 새며 도망도 다녔다. 하지만 주니어 무대에 데뷔해 기록을 점령해가는 희열을 느끼며 역도 선수로 급성장했다. MZ세대답게 이선미도 솔직하고 당당했다. 그는 “생각이 그렇게 많지 않다. 생각해보면 역도를 하라고 해서 했고, 대회를 나가라고 해서 나갔고, 선수가 되라고 해서 된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러나 도쿄 올림픽은 역도인생에 큰 전환점이 됐다. 이선미는 “올림픽에 나가보니 다음에는 더욱 잘할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응원과 격려를 처음 경험하면서 앞으로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뚜렷한 동기를 갖고 역도를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아름다운 4위’라는 표현, 이선미에게는 어땠을까. “아쉽기는 아쉽다”고 말한 그는 “아쉬울 수도 있는 성적을 그렇게 예쁘게 포장해주시니까 기분이 훨씬 좋았다. 4위도 좋은 것 같다”고 덧붙였다.

‘제2의 장미란’을 이야기하면서도 솔직함이 드러났다. 한국 여자역도의 큰별인 장미란 현 용인대 교수는 2008년 베이징 올림픽 여자 75㎏ 이상급에서 인상 140㎏, 용상 186㎏에 합계 326㎏으로 우승했다. 이선미 역시 최중량급 샛별로 장미란의 뒤를 이을 재목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선미는 “장미란 언니의 기록은 정말 엄청나다. 그 기록과 비교하면 저는 ‘아기의 기록’이라 생각한다. ‘제2의 장미란’이라는 표현도 그래서 맞지 않다”면서 “그냥 이선미로 불렸으면 한다. 가까운 목표는 인상 130㎏, 용상 160~165㎏ 정도다. 열심히 해서 다음 파리 대회 때는 꼭 시상대에 오르겠다”고 다짐했다. 그는 수줍은 표정으로 또 다른 목표를 꺼냈다. 시상대에 오른 후 “방탄소년단 슈가의 팬이라고 꼭 말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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