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바이칼의 관문, 이르쿠츠크

시속 20km··· 창 밖 호수는 시시각각 변하는 요물이었다

이르쿠츠크(러시아) | 글·사진 김형규 기자
환바이칼 관광열차는 시베리아 횡단열차의 초기 노선을 달린다. 호수와 산을 가로지르는 풍경도 멋지지만 100여년 전 절벽 틈바구니에 터널을 만들고 다리를 건설한 노동자들의 노고와 기술에도 감탄하게 된다.

환바이칼 관광열차는 시베리아 횡단열차의 초기 노선을 달린다. 호수와 산을 가로지르는 풍경도 멋지지만 100여년 전 절벽 틈바구니에 터널을 만들고 다리를 건설한 노동자들의 노고와 기술에도 감탄하게 된다.

이르쿠츠크는 바이칼의 관문이 되는 도시다. 마추픽추를 가려면 페루 쿠스코를 거쳐야 하는 것처럼 바이칼 호수로 가는 길에는 보통 이르쿠츠크를 들른다. 여유가 있다면 알혼섬에 들어가 충분히 시간을 보내며 바이칼의 정수를 맛봐야겠지만, 촉박한 여행자라면 이르쿠츠크에서 당일치기 여행으로도 바이칼을 맛볼 수 있다.

■ 저속 관광열차의 정취

대표적인 방법은 환바이칼 관광열차를 타는 것이다. 오전 8시쯤 이르쿠츠크역에서 출발하는 기차는 시베리아 횡단열차의 운행 구간을 그대로 따라 슬류지얀카역까지 달린다. 시내를 벗어나면 초록 들판과 개천이 펼쳐지고 소박하게 지은 목조주택들이 예쁜 장식품처럼 풍경 속에서 튀어나온다. 꽃밭을 잘 가꿔놓은 러시아식 여름별장 다차의 모습도 쉽게 눈에 띈다.

환바이칼 관광열차

환바이칼 관광열차

기차는 슬류지얀카에서 잠시 멈췄다 방향을 바꿔 반대로 달린다. 철길은 시베리아 횡단철도의 초기 노선으로 지금은 관광용으로만 사용된다. 오른쪽으론 바이칼 호수가, 왼쪽으론 자작나무와 소나무가 지천인 야생의 원시림이 끝없이 이어지는 그림 같은 풍경이다. 기차는 앙가솔카, 키르키레이, 슈미하 등 고립된 마을의 역에서 30~40분씩 쉬어간다. 관광객들은 정차할 때마다 절벽에 만들어진 터널과 다리를 구경하고 근처 숲을 산책하거나 호숫가에서 수영을 즐긴다. 마을 아낙들은 일주일에 두세번 들어오는 열차를 기다렸다가 간단한 요깃거리를 들고나와 좌판을 연다.

날이 흐리고 바람이 불었다. 파도가 크게 일었다. 검게 변한 호수는 바다보다 깊은 심연을 만들어냈다.

날이 흐리고 바람이 불었다. 파도가 크게 일었다. 검게 변한 호수는 바다보다 깊은 심연을 만들어냈다.

종착지인 포트 바이칼역까지 기차는 시속 20㎞로 달린다. 창밖의 풍경은 천천히 흘러간다. 그렇게 객차 안에서 반나절이 지나니 주변에서 ‘지겹다’는 말이 나왔다. 아무리 비경이라도 계속 엇비슷한 모습이 계속되다 보니 질린다는 것이었다. 동의하기 힘들었다. 내 귓속의 이어폰에선 재즈 피아니스트 키스 자렛의 독일 쾰른 콘서트 실황 앨범(1975)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그의 즉흥 연주처럼, 내게 보이는 호수는 시시각각 변하는 요물이었다. 해안선의 윤곽도 나무의 모양도 야생화의 색깔도 계속 바뀌었다. 거센 바람에 쓰러져 호숫가에 머리를 처박고 쓰러진 자작나무의 하얀 몸뚱어리는 백골 같은 이미지로 다가왔다. 자작나무의 하얀 껍질은 썩지 않는다. 언제까지 저 나무는 저 모습 그대로 남아있을까. 번잡한 일상의 고민 대신 쓸데없고 기분 좋은 생각들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재미있는 자연 다큐멘터리 보듯 차창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홀짝이다 보니 출발 전에 들고 탄 5000원짜리 팩와인 한 통이 어느새 바닥을 드러냈다.

리스트비얀카의 바이칼 호숫가

리스트비얀카의 바이칼 호숫가

바이칼 호수에서 발원한 앙가라강은 북쪽으로 흘러 이르쿠츠크를 관통하고 북해로 향한다. 바이칼에서 앙가라강이 시작되는 초입에 위치한 리스트비얀카 역시 호수의 매력을 느끼기 좋은 도시다. 이르쿠츠크에서 차로 한시간 남짓 걸리는 이곳에선 유람선을 타거나 스쿠버다이빙을 즐길 수 있다. 유람선을 타고 호수로 나가니 뜨거운 여름볕이 무색하도록 찬 바람이 얼굴을 때렸다. 일행 모두 서둘러 긴팔옷을 꺼내입었다. 선미 한쪽에 마련된 식탁에서 보드카를 마셨다. 안주로 바이칼에서만 나는 물고기 ‘오물’(omul)을 훈제한 요리가 나왔다. 청어와 비슷하게 생긴 생선인데 맛은 짭조름하니 연어에 가까웠다. 이르쿠츠크로 돌아오는 길에 버스에서 1980년대 러시아에서 최고의 인기를 누렸던 한국계 록가수 빅토르 최의 익숙한 노래가 흘러나왔다. 창밖으로 스쳐 지나는 숲에 어둠이 깃들고 있었다. 음울하고 낮게 깔리는 그의 목소리가 근사하게 어울렸다.

바이칼의 명물 훈제 오물과 보드카

바이칼의 명물 훈제 오물과 보드카

리스트비얀카의 노천시장은 오믈을 비롯해 바이칼에서 잡힌 생선과 지역 특산품인 잣을 구입하려는 관광객들로 늘 붐빈다.

리스트비얀카의 노천시장은 오믈을 비롯해 바이칼에서 잡힌 생선과 지역 특산품인 잣을 구입하려는 관광객들로 늘 붐빈다.

■ 사회주의 독립운동가들의 자취

이르쿠츠크는 ‘시베리아의 파리’로 불린다. 부에노스아이레스를 ‘남미의 파리’라고 부르는 것과 마찬가지로, 문화예술이 발달한 도시의 아름다움을 상찬하려는 의도일 테지만 무조건 자신들을 ‘세계의 중심’으로 놓고 보는 서유럽의 오만이 느껴져 불쾌하기도 하다. 이르쿠츠크엔 이르쿠츠크만의 매력이 있다. 200년 이상의 역사를 지닌 목조건물들이 저마다 화려하고 독특하게 치장한 창문을 달고 있는 모습은 다른 유럽 어느 도시에서도 보기 힘든 것이다. 집집마다 창문 장식이 다른 것은 조상신이 헛갈리지 않고 잘 찾아오게 하려는 것이라는 설명도 재밌다.

수카초프 미술관

수카초프 미술관

레닌거리에 위치한 수카초프 미술관은 관광객에게 치이지 않고 호젓하게 그림을 감상하기 딱 좋은 곳이다. 러시아 사실주의의 거장 일리야 레핀의 ‘거지 소녀’ 그림이 가장 유명하지만 그것 말고도 볼 만한 작품이 많다. 미술관을 채운 풍경화 속에는 바이칼과 알혼섬을 오가며 보았던 풍경들, 시베리아의 벌판과 광막한 숲이 그대로 들어있다.

일리야 레핀의 작품 ‘거지 소녀’

일리야 레핀의 작품 ‘거지 소녀’

도시 중심인 키로프 광장에서 가까운 로만 가톨릭 성당에선 종종 파이프오르간 연주회가 열린다. 이르쿠츠크에 머무는 동안 지역 출신으로 모스크바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오르가니스트 야나 유덴코바의 연주를 들을 기회가 있었다. 건반을 누르는 손과 페달을 밟는 발이 정신없이 움직이는 동안 웅장하고 기품있는 소리가 성당 안에 울려 퍼졌다. 무소르그스키의 대표작 ‘전람회의 그림’을 연주하면서 템포가 빨라지고 기교도 더 화려해졌다. 고음과 저음이 조화를 이루며 악기가 가진 매력이 유감없이 드러났다. 연주자는 한 곡이 끝날 때마다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했고 관객들도 뜨거운 박수로 화답했다. 거대한 파이프오르간을 자랑하는 유명한 성당들에선 상상하기 힘든 경험이었다.

로만 가톨릭 성당에서 파이프오르간 연주를 들려준 야나 유덴코바(왼쪽)와 함께 공연한 소프라노 가수

로만 가톨릭 성당에서 파이프오르간 연주를 들려준 야나 유덴코바(왼쪽)와 함께 공연한 소프라노 가수

이르쿠츠크는 일제와 맞서 싸운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들의 자취를 지닌 우리 역사의 무대이기도 하다. 1920년 고려공산당 창립대회가 열렸던 건물이 레닌거리 23번지에 그대로 남아있다. 지금은 이르쿠츠크 필하모니 건물로 사용되고 있다. 독립을 위해 사회주의를 무기 삼았던 조봉암과 여운형도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모스크바에 가는 길에 이르쿠츠크를 들렀다.

이르쿠츠크 레닌 광장에 있는 레닌 동상

이르쿠츠크 레닌 광장에 있는 레닌 동상

이르쿠츠크 시내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것이 동상이다. 혁명 지도자 레닌의 동상은 6개나 된다. 혁명 작가 막심 고리키의 동상도 있고, 마르크스의 이름을 딴 거리도 있다. 눈에 띄는 건 도시와 직접 관계된 인물들이다. 앙가라 강변에는 1661년 원주민 부족을 도륙하고 도시를 처음 세운 카자크(코사크)족 지도자 야콥 파하바프의 동상이 서 있다. 시베리아 횡단철도 건설을 지시한 알렉산드르 3세의 동상도 있다. 도시를 만들고 또 먹고 살게 해준 이들을 기리는 동상을 잘 보이는 곳에 세워둔 것이다.

원주민을 몰아내고 도시의 기초를 세운 카자크 대장 야콥 파하바프의 동상

원주민을 몰아내고 도시의 기초를 세운 카자크 대장 야콥 파하바프의 동상

왜 역사가 더 오랜 서울엔 그런 동상이 없을까라는 당연한 의문이 들었다. 한양을 도읍으로 결정한 조선의 건국왕 이성계는 물론 한양의 설계자이자 그곳을 무대로 민본주의 정치를 펼치려 했던 개혁 정치가 정도전의 동상도 서울엔 없다. 그 두 사람만큼 도시에 숨은 한국의 역사를 설명하기 좋은 실마리가 또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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