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형물까지 만들어 기리는 양반과 기생의 로맨스라…

글·사진 김종목 기자
단양 단성면 두악공원 내 퇴계 이황과 두향 조형물.

단양 단성면 두악공원 내 퇴계 이황과 두향 조형물.

가체를 한 여성이 눈을 지그시 감은 채 입술을 내민다. 마고자 차림의 남성은 게슴츠레한 눈빛으로 역시 입술을 내밀고 있다. 충북 단양군 단성면 북하마을 두악공원에 있는 퇴계 이황과 두향의 조형물이다. 두 조형물은 선 곳은 핑크빛 하트 모양의 받침대다.

지난 10일 구단양인 상방리 벽화마을과 적성을 가던 길 이 조형물을 발견했다. 안내판은 “이황 선생이 단양군수로 부임한 것은 ○○ 두향의 나이 18세였다. 처신이 풀 먹인 안동포처럼 빳빳했던 퇴계 선생이었던지라 한동안은 두향의 애간장을 녹였었지만, 퇴계 이황도 두향이를 끔찍이도 ○○었다 한다”고 적혀 있다. ‘○○’은 단양 적성비 비문의 일부처럼 지워져 있다.

경향신문은 2019년 1월9일자 “ ‘48세 이황과 19세 두향이 사랑을 했다’…기려야 할 서사라고?”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두 사람의 연애담과 지자체의 ‘스토리텔링’을 비판했다. 단성면 장회나루의 ‘퇴계 이황·두향 스토리텔링 공원’은 뒤춤에 매화꽃을 들고 선 퇴계와 거문고를 타는 두향을 청동상으로 전시했다. 만남부터 이별까지 스토리를 새긴 입석 12개도 설치했다. 군은 2017년 ‘스토리텔링 관광정책’을 펼친다며 예산 2억원으로 이 공원을 만들었다.

이황과 두향 조형물 전경.

이황과 두향 조형물 전경.

단양군은 이 연애담을 반복 재생산한다. 지난해 10월 제34회 두향제를 개최할 때 낸 자료에 “퇴계 이황과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가 전해지는 관기 두향의 넋을 기리기 위해 마련됐다. 퇴계와의 안타까운 이별 이후 단양강 강선대에서 생을 마감했다고 전해지고 있다”고 적었다.

두 사람 이야기는 공식 기록이 없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이태희 연구원이 지난해 6월 ‘여성과 역사’에 ‘관기 두향을 보는 두 가지 시선’이란 제목의 논문을 실었다. 정석태·김언종의 선행 연구를 참고했다. 이 연구원은 기존 문헌을 더 분석하고, 새 문헌들도 찾아냈다.

이안눌이 이황 사후인 1602년 8월 강선대를 두고 지은 시엔 이황·두향이란 말이 없다. 임방이 1695년 지은 ‘두양(두향은 두양, 계향이라고도 기록됐다)의 무덤’이란 시는 두향이 뛰어난 기생이라 추켜세우고, 강선대 경관을 찬양했을 뿐이다. 1727년 강호부가 두향에 관한 더 자세한 기록을 남겼다.

수몰이주기념관 내 열녀 연옥 정려비.  “김연옥은 정병 박세웅의 처로 30세에 남편이 죽은 후 개가하지 않고 육식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고 적었다. 조선시대 ‘남성-양반’은 여성의 성적 욕망을 억압하고, 순결과 지조를 강조했다. 남성-양반은 축첩과 관기 제도를 유지하며 성적 욕망을 채웠다는 게 강명관 교수의 분석이다.

수몰이주기념관 내 열녀 연옥 정려비. “김연옥은 정병 박세웅의 처로 30세에 남편이 죽은 후 개가하지 않고 육식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고 적었다. 조선시대 ‘남성-양반’은 여성의 성적 욕망을 억압하고, 순결과 지조를 강조했다. 남성-양반은 축첩과 관기 제도를 유지하며 성적 욕망을 채웠다는 게 강명관 교수의 분석이다.

<강선대에는 남쪽을 마주하여 외딴 무덤 하나가 있다. 뱃사공이 가리키며 말했다. “단구(단양의 옛 지명 중 하나)에 옛날에 기생 하나가 있었는데, 평소에 이 강선대를 지독히 좋아하여 죽을 때에 ‘내가 죽거든 강선대 건너편에 묻어주세요. 만약 그리하지 않으면 내 죽어서라도 당신을 지켜보겠습니다’라고 부탁을 남겼지요.” (중략) 단구에 이르러 늙은 기생을 불러다가 그 일을 물어보자, 기생은 말했다. “정말 그렇습니다. 그가 죽은 지는 겨우 십여년이 지났습니다.”> ‘죽은 지 십여년’을 고려하면 두향은 1717년 전후 사망했을 것이다. 이황의 생몰년은 1502~1571년이다. 1548년 1월부터 9개월 동안 단양군수로 일했다. 이 연구원은 강호부 기억에 착각이 있는 점을 감안해도 두향의 생존 시기가 이황의 그것과 100년 이상 차이가 난다며 “연애담은 실제로 일어나지 않았던 전설”이라고 말한다.

1751년 이윤영이 지은 단양 유기 산사의 기록에 ‘전설’이 등장한다. 이 기록은 두향의 무덤을 거론하면서 “(이황이)절벽에 시를 쓰고 돌아가다가 중류에서 읊조리니 두향이 곧장 가곡에 넣었는데, 그 소리가 맑고도 슬펐다. 두향이 또 만조를 지어 잇기를, ‘아! 아이야, 배를 천천히 저어라/ 혹여나 신선 올까 바라고 계시니’라고 하였다. 선생이 탄식하며 ‘너는 비록 천인이지만 그래도 내 맘을 아는구나’라고 하였다고 한다”고 기록했다. 이윤영은 이 이야기를 전하면서 “믿을 만한지는 모르겠다”는 사족도 붙였다.

이 연구원은 1824년 조두순이 쓴 “퇴계옹의 시가 있지 않았더라면/ 그 누가 알았으랴, 두향의 이름”으로 시작되는 시에 이어 1841년 이원진이 동유록 기록이 연애담을 사실로 만들었다고 분석한다. “두향은 바로 본군의 명기(名妓)이다. 일찍이 퇴계 선생을 모시고 이 대에 올랐는데, 선생이 시를 짓자 두향이 번번이 노래하여 만족시킨 것이 한 시기에 회자되었다”고 썼다.

19세기에는 많은 사람이 두향이 이황의 정인이며 열녀라는 전설을 사실로 믿었다. 정비석의 연작 소설 <명기열전> 중 두향편은 현대인들이 가짜 연애담을 사실로 믿게 하는 데 일조했다. 정비석은 소설에 두 사람 성관계도 묘사했다.

사실이면 연애담을 지금도 기리는 게 타당하냐는 물음은 여전히 남는다. ‘양반과 기생 간 러브 스토리’는 흔하다. ‘관기 제도’의 역사를 안다면 시대 상황을 감안해도 쉬이 로맨스로 치부할 순 없다.

관기 제도는 조선시대 사대부의 성적 모순과 이중성을 드러낸다. 고려 제도를 폐지하지 못했다. 고려는 “공인된 성적 대상인 여성이 부재하게 되었을 경우, 다른 성적 대상자를 찾지 않은 경우”를 의미하는 ‘의부(義夫)’를 뒀지만, 조선은 고려의 기녀제도를 유지하면서 ‘열녀’만 강조했다.

지금도 성행하는 논리로 관기 제도를 옹호했다. 세종조 기녀제도 폐지 문제가 제기됐을 때 제도를 폐지하면 관원들이 민간의 부녀자를 겁탈할 우려가 있다는 반대가 나왔다. 강명관 부산대 한문학과 교수는 ‘조선 가부장제의 성적 욕망과 기녀’에서 이런 사례를 전하며 “고려의 유제인 기녀제도가 여전히 유지되었다는 사실은, 그것의 존속을 원하는 욕망, 곧 조선사회의 지배층이었던 남성-양반의 의지가 내재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했다.

도담삼봉은 가운데 봉우리를 장군봉, 그 왼쪽을 첩봉,오른쪽을 처봉이라고도 불렀다.

도담삼봉은 가운데 봉우리를 장군봉, 그 왼쪽을 첩봉,오른쪽을 처봉이라고도 불렀다.

단양 도삼삼봉은 가운데가 장군봉, 왼쪽이 처봉, 오른쪽이 첩봉이다. 처봉은 ‘얌전하게 돌아앉은’ 모양, 첩봉은 ‘교태를 부리듯 야릇하게 생긴’ 모양이라 이름 붙였다고 한다. 수몰이주기념관에 남은 비석엔 남편이 죽은 뒤 육식을 끊은 부인을 기리는 열녀비도 있다. 조선의 관기·축첩 제도, 열녀 찬양의 이념은 한 묶음으로 돌아갔다.

강 교수는 “기녀제도와 축첩제도를 유지함으로써 윤리 이전의 성적 욕망을 충족시키고자 했”던 것을 가부장제의 본질적 욕망이라 분석한다. “이 욕망은 가부장제가 작동하는 곳이라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여전히 작동하고 있을 것”이라고도 했다.

강 교수 분석을 빌리자면 두악공원 입맞춤 조형물의 주제는 ‘성적 욕망’에 뒀다고 볼 수 있다. 단성면 관계자는 “(사실관계 문제나 여러 비판이 있어) 폐기 등을 검토하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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