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원 53명에서 9200만명으로…100년 역사의 세계 최대 정당

베이징 | 이종섭 특파원

신중국을 건설한 마오쩌둥

덩샤오핑, 개혁·개방 길 터

‘번신물망마오쩌둥(飜身勿忘毛澤東), 치부물망덩샤오핑(致富勿忘鄧小平)’.

마오쩌둥과 덩샤오핑에 대한 중국인들의 감정과 평가가 압축된 말이다. 신분이 바뀐 건 마오쩌둥 덕이고, 잘살게 된 것은 덩샤오핑의 덕이니 두 사람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두 사람은 중국 공산당 100년의 역사에서 중화인민공화국(신중국) 건설과 개혁·개방이라는 가장 중요한 두 시기를 연 인물이다.

1921년 7월23일 마오쩌둥을 비롯한 13명의 대표가 상하이에 모여 제1차 전국대표대회(당대회)를 열고 공산당을 창당할 당시 전체 당원은 53명에 불과했다. 이후 100년의 역사를 거치며 공산당은 당원 9200만명의 세계 최대 정당이 됐다.

공산당 100년의 역사에는 적지 않은 굴곡이 새겨져 있다. 공산당은 창당 이후 1924년부터 군벌 세력을 타도하기 위해 국민당과 손을 잡고 제1차 국공합작에 참여했지만, 이후 장제스(蔣介石)가 이끄는 국민당의 공산당 토벌작전이 시작되면서 1934년부터 이를 피해 달아나는 1년여의 대장정에 나서게 된다. 이 시기 당권을 쥐게 된 마오쩌둥은 일본의 침략에 맞서 제2차 국공합작을 진행한 뒤 국민당과의 내전에서 승리해 1949년 10월1일 중화인민공화국 수립을 선언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건국 초기 상황은 녹록지 않았다. 소련의 원조에 의존해 경제개발을 추진하던 중국은 농공업 생산력을 증대시키고 산업화를 촉진하기 위해 1958년부터 대약진 운동을 전개한다. 그 결과 도시 인구가 증가하고 농업생산력이 저하되면서 농촌이 황폐화됐고, 대기근으로 수천만명이 사망하면서 결국 대약진 운동은 실패로 돌아가게 된다. 이때 국가주석에서 물러나며 정치적 위기에 처했던 마오쩌둥은 홍위병을 앞세워 1966년부터 10년여에 걸쳐 사회주의 실천 운동인 문화대혁명을 추진하게 된다. 이 시기 중국은 300만명의 공산당원이 숙청되고 경제가 피폐해지는 등 다시 한번 극심한 혼란을 겪어야 했다.

중국이 이런 역사적 고난을 딛고 지금의 경제 성장 기반을 마련한 것은 1976년 마오쩌둥 사망 후 덩샤오핑이 등장하면서부터다. 덩샤오핑은 1978년 12월 개혁·개방 노선을 채택해 사회주의 시장경제 건설을 시작했고, 1979년 미국과 수교하며 서방과의 관계 개선에도 나섰다. 이후 장쩌민(江澤民)과 후진타오(胡錦濤) 시대를 거친 30여년간 중국 경제는 비약적으로 발전하면서 2010년 국내총생산(GDP) 규모에서 일본을 제치고 세계 2위 경제대국의 자리에 올랐다. 1952년 300억달러에 불과했던 중국의 GDP는 2019년에 14조달러를 넘어서며 470배가량 성장했고, 중국 GDP가 세계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960년대 4.4%에서 2019년 16.3%로 높아졌다.

그리고 시진핑 시대를 거쳐 주요 2개국(G2)의 반열에 오른 중국은 이제 세계 최대 공산당을 중심으로 세계 최강국 미국의 자리를 넘보고 있다. 글로벌타임스는 “공산당의 가장 큰 업적 중 하나는 경제 기적”이라며 중국의 경제 성공 스토리는 세계의 부러움을 사고 있다”고 자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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