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도 모자라 홍수까지···‘물폭탄’ 덮친 우크라 남부, 필사의 탈출

선명수 기자
우크라이나 남부 드니프로강 카호우카댐이 원인불명의 폭발로 파손된 지 이틀째인 7일(현지시간) 헤르손주 주거지역이 물에 잠겨 있다. AP연합뉴스

우크라이나 남부 드니프로강 카호우카댐이 원인불명의 폭발로 파손된 지 이틀째인 7일(현지시간) 헤르손주 주거지역이 물에 잠겨 있다. AP연합뉴스

시커먼 흙탕물이 도시를 삼켰다. 삽시간에 3m 높이로 불어난 물에 건물은 지붕만 남긴 채 물 속에 잠겼고, 주민들은 전쟁의 포화 속에서도 지켜온 집을 버린 채 고무보트에 몸을 실었다. 미처 탈출하지 못한 주민들은 가장 높은 건물 옥상에 올라 애타게 구조를 기다렸다. 일부는 그마저도 포기한 채 침수된 집과 함께 남기를 택했다.

전쟁에 홍수까지, ‘겹재난’이 우크라이나 남부 헤르손주를 덮쳤다. 러시아군이 통제 중이던 드니프로강 카호우카댐이 원인불명의 폭발로 파괴된 지 이틀째인 7일(현지시간) 인근 주민들은 필사적인 탈출을 이어갔다. 우크라이나 지역에서 최소 3명, 러시아 통제지역에서 최소 5명의 인명피해가 발생했다. 이런 와중에도 러시아는 이 일대 주거지역에 포격을 가해 주민 1명이 숨지고 1명이 다쳤다.

주민 4000여명 긴급 대피…러, 구조 요원에 총격까지

우크라이나 당국에 따르면 물은 드니프로강 유역 80㎞ 구간에 걸쳐 차오르고 있는 상태다. 우크라이나의 헤르손 군사행정부 책임자인 올렉산드르 프로쿠딘은 “수위가 내일(8일)까지 계속 높아지고 이후 닷새 동안 점차 감소할 것으로 예상한다”고 말했다.

수류탄을 실어 나를 때 쓰던 드론(무인기)은 이제 고립된 주민들의 위치를 파악하고 식수와 비상식량을 보급하는 용도로 쓰이고 있다. 러시아가 점령한 올레슈키마을 주민 라리사 카르첸코는 “하루 안에 홍수가 멈출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예상이 빗나갔다”면서 “우리는 포격에 익숙해졌지만, 이런 상황은 처음”이라고 뉴욕타임스(NYT)에 말했다.

미국의 상업용인공위성업체 맥사테크놀로지가 공개한 홍수 전후 헤르손주 올레슈키마을의 위성사진. 5월15일(왼쪽) 촬영된 사진 속 건물들이 댐 파괴 이후인 6월7일에는 대다수 지붕만 남긴 채 물에 잠겼다. AFP연합뉴스

미국의 상업용인공위성업체 맥사테크놀로지가 공개한 홍수 전후 헤르손주 올레슈키마을의 위성사진. 5월15일(왼쪽) 촬영된 사진 속 건물들이 댐 파괴 이후인 6월7일에는 대다수 지붕만 남긴 채 물에 잠겼다. AFP연합뉴스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당국의 발표를 종합하면 이날까지 약 4000여명의 주민이 대피한 것으로 전해졌다. 우크라이나 정부가 댐 파괴로 약 4만여명이 홍수 위험에 처했다고 발표한 것과 비교하면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수십만명의 주민이 심각한 식수난을 겪고 있다며 주민 대피와 함께 식수 공급이 최우선 과제라고 말했다.

파괴된 댐이 위치한 드니프로강을 중심으로 서쪽은 우크라이나군이, 동쪽은 러시아군이 통제하고 있다. 우크라이나 당국은 러시아군이 동쪽 점령지 주민들을 구조하지 않은 채 방치하고 있다고 비판했다.수해 지역을 방문한 이호르 클리멘코 우크라이나 내무부 장관은 “강 동편의 사람들도 대피 시킬 방법을 찾고 있지만, 강한 물살과 러시아군의 포격으로 방해를 받고 있다”고 말했다.

젤렌스키 대통령도 “(강의) 맞은편에서도 익사한 시신이 떠내려가는 모습이 보인다”면서 러시아군이 동쪽 지역에서 주민들을 구조하려는 우크라이나 구조대를 향해 총격을 가하고 있다고 전했다. 우크라이나 국토부는 29개 마을이 완전히 침수됐으며, 이 가운데 19개 마을은 우크라이나군이 통제하고 있다고 밝혔다.

7일(현지시간) 우크라이나 헤르손주 침수지역에서 주민들이 고무보트를 타고 대피하고 있다. AP연합뉴스

7일(현지시간) 우크라이나 헤르손주 침수지역에서 주민들이 고무보트를 타고 대피하고 있다. AP연합뉴스

지역 전체가 물폭탄으로 휘청이는 상황에서도 러시아군의 공습은 이어졌다. 우크라이나 당국은 이날 하루 동안 러시아군이 헤르손 민간인 주거지역에 70발의 총격을 가한 것을 포함해 대포와 박격포, 드론 등으로 총 9차례 포격을 가했다고 밝혔다.

이런 상황에서도 일부 주민들은 대피를 거부한 채 침수된 집과 함께 남기를 택한 것으로 알려졌다. 국제원조구호기구(CARE)의 셀레나 코자키예비치는 CNN에 “대피를 거부한 이들 가운데 많은 이들이 노인이며, 이들은 1년 이상 이어진 전쟁으로 집을 떠났다가 최근 돌아온 사람들”이라고 말했다.

헤르손시는 지난해 8개월간 러시아의 점령을 받았고 우크라이나군의 탈환 이후에도 강 동쪽 러시아 점령지에서 포격이 계속되는 등 분쟁이 끊이지 않았다.

7일(현지시간) 우크라이나 헤르손주 침수지역에서 한 노인이 집을 떠나 대피하면서 울고 있다. AP연합뉴스

7일(현지시간) 우크라이나 헤르손주 침수지역에서 한 노인이 집을 떠나 대피하면서 울고 있다. AP연합뉴스

비옥한 곡창지대, 사막화 우려…유엔 “세계 기근 악화될 것”

이번 사태로 장기적인 환경 피해도 우려된다. 우크라이나 농업부는 침수로 인한 당장의 농작물 유실은 물론 상류지역 곡창지대 일부가 빠르면 내년 초 ‘사막화’될 가능성이 크다고 밝혔다. 댐 파괴로 저수지의 물이 모두 빠지면 농업용수 고갈로 최소 50만㏊의 농지가 사막화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서울시의 7배가 넘는 면적이다. 유엔 세계식량계획(WFP)도 이번 사태가 세계 기근 위기에 악영향을 끼칠 것이라고 경고했다. dpa통신에 따르면 WFP 독일 담당 마르틴 프리크 국장은 “댐 붕괴로 대규모 홍수가 발생해 새로 심은 곡물이 훼손됐다”며 “우크라이나산 곡물에 의존하는 전 세계 3억4500만명의 굶주린 사람들에게 희망이 사라지고 있다”고 말했다.

댐 붕괴로 수력발전소에 저장돼 있던 150t이상의 엔진오일을 비롯해 인근 산업단지에서 각종 화학물질이 함께 쓸려 내려가면서 홍수가 끝난 후 심각한 토양 오염 역시 우려되는 상황이다. 여기에 드니프로강을 따라 매설한 지뢰 수만대가 거센 물길에 횝쓸리면서 하류지역은 언제 무엇이 터질지 모르는 말 그대로 ‘시한폭탄’이 됐다.

7일(현지시간) 우크라이나 남부 헤르손주 침수지역에서 주민들이 고무보트를 타고 대피하고 있다. AP연합뉴스

7일(현지시간) 우크라이나 남부 헤르손주 침수지역에서 주민들이 고무보트를 타고 대피하고 있다. AP연합뉴스

지역주민들도 우크라이나에서 가장 비옥한 곡창지대로 꼽혔던 헤르손주가 황폐화되는 것을 우려하고 있다. 주민 세르히 리토바스키는 “빠르게 물이 빠지는 이곳 토양은 관개 시설에 의존할 수 밖에 없다”면서 “물이 없으면 아무도 이곳에서 살지 못할 것이고, 이 유산은 수십년 동안 지속될 것”이라고 말했다.

로만 코스텐코 우크라이나의회 국방정보위원장은 “이것은 남부 전체에 재앙”이라며 “그러나 당장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사람들을 구하는 것이며, 그 이후에야 피해를 측정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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