텍사스발 '임신중절 금지법' 미국 전역서 도미노 되나?

워싱턴|김재중 특파원
미국 임신중절 반대 단체 회원들이 지난해 6월 워싱턴 연방대법원 앞에서 임신중절 관련 재판 결과를 기다리면서 시위를 하고 있다. 워싱턴|AP연합뉴스

미국 임신중절 반대 단체 회원들이 지난해 6월 워싱턴 연방대법원 앞에서 임신중절 관련 재판 결과를 기다리면서 시위를 하고 있다. 워싱턴|AP연합뉴스

미국 연방대법원이 태아의 심장박동이 감지되는 시기 이후로는 임신중절을 할 수 없다고 규정한 텍사스주의 강력한 금지법의 효력을 정지시켜 달라는 가처분 신청을 기각함으로써 유사한 법률이 보수 성향의 다른 주로 확산될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텍사스 법이 1973년 여성의 임신중절 권리를 확립한 미 대법원의 기념비적인 ‘로 대 웨이드’ 판결을 우회할 수 있다는 힌트를 임신중절 반대론자들에게 제공했기 때문이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여성의 임신중절 권리를 보호하기 위한 모든 수단을 강구하겠다고 다짐했다.

미 대법원은 1일(현지시간) 자정 직전 미국시민자유연합(ACLU), 생식권리센터 등 임신중절 권리를 옹호하는 단체가 텍사스의 임신중단 금지법의 시행을 중단시켜 달라며 제기한 가처분 신청에 대해 대법관 9명 중 5명의 찬성으로 기각 결정을 내렸다. 보수 성향 존 로버츠 대법관이 진보 성향 대법관 3인의 인용 의견에 가세했지만 다른 보수 성향 대법관 5명을 수적으로 누르지 못했다.

태아의 심장 박동이 감지되는 시점 이후로는 임신중절 수술을 할 수 없다고 규정한 텍사스 법은 이미 이날 새벽 0시부터 시행에 들어간 상태였다. 기각 결정의 주된 사유는 원고 측이 이 법의 시행을 법원이 중단시켜야 할 법적 근거를 충분히 제시하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다만 대법원은 해당 법이 합헌 여부에 심각한 의문이 있다고 덧붙였다. 긴급하게 효력을 중단시킬 절차적 요건을 갖추진 못했지만 정식 소송을 통해 위헌성을 가릴 수 있다는 뜻이다.

임신중절 수술 허용 시점을 로 대 웨이드 판결이 허용한 임신 후 22~24주에서 임신 뒤 6주로 대폭 축소시킨 텍사스 법이 기존 판례를 우회할 수 있었던 것은 주 정부가 빠지는 대신 민간의 소송을 장려하는 방식을 택했기 때문이다. 텍사스주 법은 임신 6주 이후 임신부에게 임신중절 수술을 제공한 것으로 의심되는 의료기관과 의료진, 기타 조력자에 대해 소송을 제기해 승소한 시민에게 1만달러(약 116만원)를 제공한다고 규정했다. 로 대 웨이드 판결 요지는 주 정부 등 공권력이 태아가 산모의 자궁 밖에서 생존 가능한 시점 이전에 임신중절 수술을 하는 것을 막아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다수 의견을 형성한 보수 성향 대법관들은 텍사스 법이 로 대 웨이드 판결의 판결 범위 밖에 있기 때문에 정식 재판으로 위헌성을 따져야 한다고 봤다. 반면 소니아 소토마요르 등 진보 성향 대법관들은 텍사스 법이 교묘하게 여성의 헌법적 권리를 침해하고 있다고 밝혔다.

로 대 웨이드 판결을 무력화시키기 위해 끊임없이 시도해온 임신중절 반대 진영은 텍사스 법이 역사적인 진전을 이룩했다면서 환호하고 있다. 인터넷매체 악시오스에 따르면 9월 현재 미국 내 15개 주가 임신중절 금지법을 제정했지만 대부분이 주 또는 연방법원에 의해 효력이 중지되거나 폐지된 상태다. 텍사스에서 임신중절 금지법 제정을 주도한 단체들은 이미 다른 주의 임신중단 반대 단체들과 협력을 강화하겠다고 밝혔다. 텍사스에서 축적한 입법 성공 노하우를 다른 주에 전수하겠다는 것이다. 임신중절 수술 허용 범위를 임신 뒤 22~24주에서 6주로 대폭 축소한 텍사스 법이 도미노처럼 다른 지역으로 퍼질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것이다.

텍사스 법이 대법원에 제기된 가처분 신청이라는 장애물을 피해갈 수 있었던 것은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의 남긴 영향도 크다. 트럼프 전 대통령은 재임 기간 보수 성향 대법관 3명을 임명함으로써 대법원 인적 구성을 보수 6명 대 진보 3명의 보수 절대 우위 구도로 재편했다. 특히 트럼프 전 대통령은 지난해 8월 진보 성향 루스 긴즈버그 대법관이 별세하자 대선 승자가 후임 대법관을 지명해야 한다는 민주당이 강력한 반발에도 불구하고 9월 보수 성향 에이미 코니 배럿 대법관을 속전속결로 임명했다.

바이든 대통령은 2일 전날에 이어 텍사스의 임신중단 금지법과 이 법의 가처분 신청을 기각한 대법원을 비판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바이든 대통령은 대법원의 기각 결정은 거의 50년 간 확립된 로 대 웨이드 판결을 위협했다면서 보건복지부와 법무부에 여성의 임신중단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개입할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하라고 지시했다고 밝혔다. 민주당 낸시 펠로시 하원의장도 하원에 발의된 임신중단 권리 보호 법안을 신속하게 처리하겠다고 밝혔다. 이 법은 민주당이 다수인 하원에선 통과 가능성이 높지만 민주당과 공화당이 반씩 의석을 점유한 상원에선 통과가 불투명하다. 미국에서 진보와 보수, 민주당과 공화당을 가르는 전통적인 분열 이슈인 임신중단이 정치적 논쟁의 전면으로 부상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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