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12일(현지시간)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에서 제노사이드(집단학살)를 저지르고 있다고 밝혔다. 러시아군의 부차 민간인 학살에 대해 전쟁범죄라고 비난하면서도 집단학살이라고 규정하기를 거부했던 데에서 한발 더 나가 규탄 수위를 높인 것이다. 집단학살은 국제법적으로 일반적인 전쟁범죄에 비해 훨씬 중대한 범죄로 취급된다.
바이든 대통령은 이날 아이오와주 멘로를 방문해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일으킨 우크라이나 침공 때문에 미국인들이 높은 식료품 및 에너지 가격의 피해를 입고 있다면서 집단학살을 처음 언급했다. 그는 “여러분의 가정 살림살이, 여러분이 차에 기름을 채울 능력이 지구 반대편에서 한 독재자가 전쟁을 선포하고 집단학살을 자행하는지 여부에 좌우되어선 안된다”라고 말했다.
바이든 대통령은 이후 러시아가 집단학살을 저질렀다는 충분한 증거를 확보했느냐는 취재진의 질문에 “그렇다. 나는 이것을 집단학살이라고 불렀다”고 말했다. 이어 “푸틴은 우크라이나인들이 존재할 수 있다는 생각 자체를 없애버리려고 시도하고 있는 것이 갈수록 분명해지고 있다”고 말했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에서 자행하고 있는 폭력은 우크라이나인들의 절멸을 시도하는 행위라는 것이다.
유엔은 집단학살을 ‘어떤 국가, 인종, 민족, 종교 집단의 전체 또는 일부를 파괴하려는 목적으로 자행된 행위’라고 규정하고 있다. 폴란드 법학자 라파엘 렘킨이 1944년 나치 독일의 유대인 학살을 묘사하면서 처음으로 이 용어를 사용했다. 1948년 유엔 총회가 집단학살에 관한 국제 협약을 채택하면서 국제법상 범죄 용어로 정립됐다.
바이든 대통령은 “지난 주와는 다르다”면서 “러시아인들이 우크라이나에서 한 끔찍한 일들에 관한 더 많은 증거들이 나오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우리는 대대적인 파괴에 관한 점점 더 많은 것들을 알게 될 것”이라면서 “우리는 이것이 (집단학살에) 해당하는지에 관해 국제적으로 법률가들이 판단하도록 하겠지만 나에게는 확실히 그렇게 보인다”고 덧붙였다.
바이든 대통령과 미국 정부 당국자들은 그간 러시아군의 부차 지역 민간인 학살을 강력 비난하면서도 집단학살로 규정하는 것은 거부했다. 바이든 대통령은 지난 4일 부차 학살과 관련해 푸틴 대통령을 전범 재판에 회부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이것이 집단학살에 해당하느냐는 취재진의 질문에는 “아니다. 전쟁범죄다”라고 말했다. 제이크 설리번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도 브리핑에서 “우리는 잔혹 행위와 전쟁 범죄를 목격했지만 집단학살 수준까지 올라갈 정도로 우크라이나인 생명의 체계적인 박탈은 아직 보지 않았다”고 말했다.
러시아가 집단학살을 자행하고 있다고 주장해온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바이든 대통령의 언급이 나온 직후 트위터에 “사건을 이름 그대로 부르는 것은 악에 대항하기 위해 필수적이다”면서 환영 의사를 밝혔다.
드미트리 페스코프 크렘린궁 대변인은 13일 바이든 대통령의 언급에 대해 “우리는 결코 동의할 수 없으며 이런 식으로 상황을 왜곡하려는 그 어떠한 시도도 용납할 수 없다”고 말했다.
다만 바이든 대통령의 언급에도 불구하고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집단학살 수준까지는 아니라는 미국 정부 공식 입장이 변경될지는 두고봐야 할 것으로 보인다. 바이든 대통령은 지난달 말 폴란드 방문 당시 연설에서 “푸틴 대통령은 권좌에 있어선 안된다”고 밝혔지만 백악관은 즉각 “미국은 러시아의 정권교체를 추구하지 않는다”고 해명한 바 있다. 워싱턴포스트는 바이든 대통령이 그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과 관련해 백악관이나 정부의 비난 수위를 앞서 나가는 발언을 자주 했다면서 집단학살 언급 역시 이 같은 사례 가운데 하나로 보인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