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금융시장 혼란 초래한 고소득층 감세안 철회

정원식 기자    박은하 기자

감세 정책 옳다는 신념은 여전

보수당에서도 비판 나오자 철회

리즈 트러스 영국 총리. EPA연합뉴스

리즈 트러스 영국 총리. EPA연합뉴스

영국 정부가 금융시장에 혼란을 초래했던 고소득자에 대한 감세안을 철회한다고 발표했다. 감세 정책 여파로 리즈 트러스 총리가 취임한 지 한 달도 안 돼 보수당 지지율이 급락하고 보수당 내부에서 강한 반발이 나오는 등 역풍이 불자 입장을 급선회한 것이다.

쿼지 콰텡 영국 재무장관은 2일(현지시간) 성명을 내고 연소득 15만파운드 이상 고소득자에게 적용하는 최고세율을 내년 4월부터 45%에서 40%로 낮추기로 했던 계획을 철회한다고 발표했다. 영국에서 최고세율 45%가 적용되는 인구는 전체 성인의 1%인 50만명에 불과하나, 이들 고소득층으로부터 거둬들이는 세입 규모는 60억파운드(약 9조6000억원)에 달한다.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콰텡 재무장관은 “기업 지원과 저소득층 세부담 감면 등 우리의 성장 계획은 더 번영하는 경제를 위한 새로운 접근법이었다”면서도 “최고세율 45% 폐지안은 영국이 직면한 도전을 극복하기 위한 우리의 최우선 임무에 방해가 됐다”고 말했다. 그는 “우리는 (현 상황을) 이해했고, 경청했다”고 밝혔다.

감세 정책이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논란이 심해 다른 정책을 추진해나갈 수 없게 돼 폐지한다는 것이다. 콰텡 장관은 이날 오전 BBC1과 인터뷰에서도 “최고세율 45% 폐지로 인한 논란이 우리의 강력한 에너지 관련 정책에 타격을 주고 있다고 느꼈다”고 말했다.

앞서 리즈 트러스 내각은 지난달 23일 연 450억파운드(약 69조원) 규모의 대대적 감세정책을 내놨다. 최고세율 인하(45%→40%)인하, 소득세 기본 세율 인하(20%→19%), 법인세 상향(19%→25%) 철회, 인지세(주택취득세) 주택 가격 기준 상향 등이 포함됐다. 감세를 통해 경제성장을 유도하고 물가를 잡겠다는 의도였으나 영국 파운드화가 급락하고 영국 국채 금리가 급등하는 등 금융시장에 대혼란이 일어났다. 영국발 충격에 글로벌 자산시장까지 요동쳤다.

지난달 26일 외환시장에서 달러 대비 파운드화 환율은 한때 사상 최저 수준인 1.0327달러까지 급락했다. 1971년 이후 최저치였다. 국제통화기금(IMF)은 지난달 28일 성명을 내고 영국 정부의 감세 조치가 인플레이션을 부추기고 불평등을 심화시킬 것이라고 공개 비판했다. 중앙은행인 잉글랜드은행(BOE)이 물가를 잡기 위해 금리를 인상하는데, 대규모 감세는 재정만 악화시키는 엇박자 정책이 될 것이라고 봤다. BOE는 금융시장 안정을 위해 국채 650억파운드를 긴급 매입했다. 정부가 채권을 매입해 가격 급락(금리 급등)을 막겠다는 것이다.

이후 파운드화 가치는 소폭 회복됐으나 반짝 효과에 그쳤다. 대신 영국 국채금리가 급등하면서 시중은행들이 신규 주택담보대출을 중단하기 시작했다. 금융발작이 실물경제로 옮겨붙어 위기가 발생할 것이라는 우려가 높아졌다. 국제신용평가사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는 지난달 30일 영국의 국가신용등급은 AA로 유지했지만 국가신용등급 전망을 기존 ‘안정적’에서 ‘부정적’으로 하향 조정했다. 일주일 만에 감세가 국가신용등급 강등 위기까지 번진 것이다.

급기야 정권교체 가능성도 거론됐다. 지난 23~25일 실시된 유고브 설문조사에 따르면 12년째 야당인 노동당 지지율은 45%로 보수당(28%)에 무려 17%포인트 앞섰다. 노동당과 보수당의 지지율 격차는 21세기 들어 최대 수준으로 벌어졌다.

보수당 내에서도 비판이 나왔다. 테리사 메이 전 총리 시절 노동·연금 장관이었던 데미안 그린 하원의원은 “보수당이 부자들과 이미 성공한 자들의 정당이 되면 다음 선거에서 패배할 게 확실하다”고 경고했다. 그랜트 샵스 전 교통부 장관도 더타임스 칼럼을 통해 “지금은 (국가 지원이) 가장 덜 필요한 사람들에게 선물을 줄 때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가디언은 보수당의 감세안 철회는 이날 예정된 콰텡 재무장관의 보수당 회의 연설 몇 시간 전 급박하게 이뤄졌다며 보수당 의원들의 반란표로 감세안이 포함된 ‘미니 예산안’이 의회에서 부결될 수 있다는 사실을 총리실이 깨닫게 된 결과라고 전했다. 트러스 총리는 전날까지만 해도 “금융시장 혼란에 대한 걱정은 이해하지만 우리 감세안을 지지한다”는 입장이었으나 당내 반발이 커지면서 결국 생각을 굽힌 것으로 보인다.

블룸버그통신은 옵션 거래인들의 말을 인용해 영국 정부의 최고세율 감세 철회만으로는 파운드화 가치가 추가 하락할 수 있다는 우려를 잠재우기에는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시장 반응은 엇갈렸다. 이날 오전 런던 금융시장에서 파운드화 가치는 1% 가까이 상승했으나 주가는 0.5%가량 하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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