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 1년

소년은 이제 구슬 대신 포탄 조각을 모은다

호스토멜 | 박은하 유럽 순회특파원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 외곽 도시 호스토멜에 사는 초등학생 블라디슬라우 빈차르스키(11)의 책상에는 유리병 여러 개가 가지런히 놓여 있다. 구슬, 레고블럭, 조개껍데기, 조약돌, 동전…. 유리병마다 무언가 한 가지씩 차 있다. 수집은 블라디슬라우의 취미이다.

블라디슬라우는 지난해부터 새로운 걸 모으기 시작했다. 포탄 조각이다. 건물, 차량, 도로 등에 명중한 후 산산조각난 포탄의 조각들을 모으는 것이다. 대체 왜 모으냐고 묻자 블라디슬라우가 답했다. “사람들이 다치잖아요.”

블라디슬라우 빈차르스키(11)가 자신이 주은 포탄의 파편 조각을 보여주고 있다.  호스토멜 | KISH KIM·다큐앤드뉴스코리아

블라디슬라우 빈차르스키(11)가 자신이 주은 포탄의 파편 조각을 보여주고 있다. 호스토멜 | KISH KIM·다큐앤드뉴스코리아

블라디슬라우의 아버지 뱌체슬라우는 포탄 조각 수집이 위험할 수도 있고 기이하다고 생각했지만 아들이 사람들이 다치는 걸 염려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수집을 허락했다. 블라디슬라우는 지난 1년 간 사람들이 죽고 다치는 것을 너무 많이 봤다.

뱌체슬라우의 가족은 지난해 2월 24일 새벽 4시 폭발 소리에 잠을 깼다. 뱌체슬라우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우크라이나를 상대로 전면전을 선택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호스토멜은 군비행장이 있는 도시라 더욱 위험했다.

이날 저녁 집 마당에서 군용 헬기 두 대가 보였다. 조종사가 눈에 보일 정도로 낮게 비행하고 있었다. 뱌체슬라우는 헬기가 격추돼 집으로 떨어질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대공포 두 대가 헬기를 향해 날아갔다. 헬기는 보복하듯 로켓을 발사해 공항과 주유소를 폭격했다. 그러다 한 대는 격추됐다. 우크라이나군 전투기가 벨라루스 국경 쪽으로 날아가 헬리콥터와 전투를 벌이자 하늘을 찢는 소리가 사방에 울렸다. 어른인 뱌체슬라우에게도 무섭고 끔찍한 경험이었다.

집이 군 비행장과 너무 가까워 안전하지 않다고 판단한 뱌체슬라우는 딸이 살고 있는 곳이자 호스토멜에서 5㎞ 떨어진 도시 부차로 피난을 갔다. 열흘 간 지하실에서 살았다. 지하 방공호에서도 포탄이 터지고 로켓이 날아다니는 소리가 들렸다. 합판으로 창문을 가려도 소용 없었다. 이불도 없이 옷만 껴입고 잠을 자는데, 전기와 가스마저 끊겼다. 뱌체슬라우는 잠시 외출했을 때 탱크가 거리에서 내달리는 것을 보고 경악했다.

가족은 3월 8일 부차를 떠났다. 라디오를 통해 피란민을 위한 통로가 열렸다는 소식을 접한 것이 행운이었다. 부서진 건물과 나뒹구는 시체들 사이로 6시간 동안 운전해 서부 도시에 도착했다. 11살 블라디슬라우는 이 모든 과정을 함께 겪었다.

한 달가량의 피란생활 끝에 호스토멜의 집에 돌아왔을 때 뱌체슬라우는 신에게 감사 기도를 드렸다. 집이 폭격을 당하지 않고 잘 남아 있었던 것이다. 블라디슬라우가 공들여 모은 조약돌과 조개껍데기, 구슬, 동전도 모두 무사했다.

하지만 아들은 달라져 있었다. 집에 돌아왔지만 안정을 찾지 못했고, 러시아군이 도시에서 물러갔다고 해도 지하 창고에서 나오지 않으려 했다.

11세 소년 블라디슬라우 빈차르스키는 전쟁의 충격과 공포로 공습경보가 끝나도 지하창고에서 나오지 않는 경우가 많다.   호스토멜 | KISH KIM·다큐앤드뉴스코리아

11세 소년 블라디슬라우 빈차르스키는 전쟁의 충격과 공포로 공습경보가 끝나도 지하창고에서 나오지 않는 경우가 많다. 호스토멜 | KISH KIM·다큐앤드뉴스코리아

블라디슬라우가 완전히 괜찮은 상태가 된 것인지는 여전히 알 수가 없다. 다만 그는 포탄 조각을 모으면서 조금씩 안정을 되찾아갔다. 블라디슬라우는 자기 말고도 학교에 포탄 조각을 모으는 친구들이 있다고 했다. 포탄 조각은 도시에서 가장 구하기 쉬운 물건이기도 했다. 집 마당, 놀이터, 학교 운동장 등 동네 어디에나 있었다.

블라디슬라우의 방에는 친척에게 선물받은 장난감 드론이 걸려 있다. 우크라이나에서 영웅이 된 폭발물 탐지견 그림도 직접 그려서 걸어놓았다. 전쟁 전에 조개껍데기와 조약돌 등에 관심을 보였던 아이는 폭발물, 드론, 무기 등을 자신의 일상 세계에 들여놓기 시작했다. 그러나 조개껍데기와 구슬을 모을 때처럼 신나는 목소리로 자랑하지는 않았다.

블라디슬라우는 지난 22일(현지시간)에도 어딘가에서 주워 온 검고 뾰족뾰족한 포탄 조각을 책상 아래 빨간 바구니에 집어넣었다. 아무도 다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또 잘그락 쌓였다.

블라디슬라우 빈차르스키(11)가 자신이 이제까지 수집한 구슬, 조개껍데기, 동전, 포탄 조각을 바닥에 늘어놓고 누워있다.   호스토멜 | KISH KIM·다큐앤드뉴스코리아

블라디슬라우 빈차르스키(11)가 자신이 이제까지 수집한 구슬, 조개껍데기, 동전, 포탄 조각을 바닥에 늘어놓고 누워있다. 호스토멜 | KISH KIM·다큐앤드뉴스코리아

<취재 도움: 다큐앤드뉴스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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