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

소리·恨·사랑 ‘100번 울다’임권택 감독

“난 이 장면 볼 때마다 내 손을 잘라버리고 싶어.”

언젠가 임권택 감독이 대학에 특강을 나가 ‘서편제’의 한 장면을 설명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한국 영화 최초로 100만 관객을 동원한 자신의 영화를 두고 까마득한 영화 후배들 앞에서 말이다. 극 초반 어린 송화와 동호가 아버지에게 소리를 배우는 장면인데, 가진 것 없는 아이들 옷이 왜 저리 깨끗하냐는 것이었다.

[커버스토리]소리·恨·사랑 ‘100번 울다’임권택 감독

▲끝까지 돌아봤던 임권택

영화판에서 임감독은 누구보다 자신에게 엄격한 사람으로 소문나 있다. ‘모든 순간을 의심’하며 관객과 만나기 직전까지 무엇이 최선인지 찾아왔다. 임감독에겐 ‘촬영이 끝날 때가 곧 시나리오가 완성되는 시점’이다. 100번의 크랭크인과 100번의 크랭크업을 외친 지난 45년간 임감독이 한국영화를 지켜온 방식이다.

‘씨받이’에서 ‘서편제’ 무렵 이전까지 한국영화는 세계 주류 영화무대에서 ‘존재감’조차 희미했다. 호기심에 맛보기나 하는 수준의 영화 변방국이었던 것이다. 그러던 서구 영화계가 김기영을 알고 신상옥을 알게 된 것도 임권택 감독이 한국영화의 존재를 알리고 나서부터였다. 그래서 영화인들은 “미국에 알트만, 코폴라가 있다면 우리에겐 임권택이 있다”며 자신있게 그를 한국의 거장으로 내세우는 데 주저함이 없다. 존재감만으로 임감독은 한국영화의 버팀목이 돼왔다. 평생 한자리를 지키며 우리 역사와 우리 정서, 혼을 필름에 담아온 결과다.

▲안성기가 본 임감독

안성기는 임감독이 많이 다르다고 했다. 작업방법도 다르고, 영화를 대하는 태도 역시 누구보다 진지하다.

“기술적인 접근보다 근본적인 연기에 대한 자세를 만드는 데 도움을 주셨죠. 같이 일을 하게 되면 배우로서 긴장하고 집중하게 됩니다. 배우로서 몰랐던 부분까지 하나씩 끌어내게 도와주시는 거죠. 신인들이 감독님하고 일을 하면 부쩍 연기력이 늘어납니다.”

안성기는 임감독이 콘티나 스토리보드조차 없이 진행한다고 했다. 대략적인 이야기만 가지고 현장에서 감독과 배우가 작품을 만들어가는 것이다. 처음에는 힘이 들지만 나중에는 오히려 편하다고 했다. 일정한 틀에 캐릭터를 가두지 않기 때문에 자연스럽고 생생한 ‘날것’ 같은 연기가 나온다고 했다. 그럼 전통과 한 등 한국적인 것을 추구해온 임감독이 요즘 젊은 세대와도 통할 수 있을까.

“감독님의 영화를 보면 너무나 좋아 감동을 받아요. 세대를 막론하고 같은 느낌을 받을 겁니다. 우리 것에 대한 감성을 건드리기 때문이죠. ‘정중동’의 영화라고 할 수 있어요.”

▲제자 김대승 감독이 스승에게 받은 감동

임감독 밑에서 영화를 배운 김대승 감독은 그때 그 순간을 지금도 또렷하게 기억한다. ‘서편제’ 촬영 당시 그는 임감독을 비롯해 정일성 촬영감독, 당시 김홍준 조감독과 주인공 김명곤을 태우고 해남으로 향하고 있었다. 차 안에선 ‘춘향가’가 흘렀다. 휴게실에 멈춘 임감독은 “눈물 나서 더 못듣겠어”라며 탄식을 내뿜고는 녹음테이프를 끄게 했다. 운전대를 붙들고 졸음과 싸우던 김감독 자신도 눈이 번쩍 뜨였다.

[커버스토리]소리·恨·사랑 ‘100번 울다’임권택 감독

임감독은 데뷔작 ‘두만강아 잘있거라’가 흥행에 성공해 제작자가 데려간 술집에서 판소리를 듣고 얼이 빠졌다고 한다. 임감독은 이후 우리의 소리를 종종 작품에 녹여내곤 했다. ‘서편제’의 소리꾼 아버지 유봉에게서나 ‘취화선’의 예술혼 불타는 장승업을 통해 동양적 가치를 추구해왔다. 언뜻 고집과 체면으로 비치지만, 결국 임감독만큼 가슴속 깊숙이 응어리진 한국적인 정서를 절묘하게 꺼내온 사람은 드물었다.

김감독은 “감독님께 하루라도 혼이 나지 않으면 입안에 가시가 돋는 호된 스승인 동시에 배우들에겐 자신도 몰랐던 잠재력을 끌어내는 연기 지도자”라고 했다. 감독과 배우가 대화를 통해 배역과 상황을 납득하고 난 다음에 촬영에 들어갔다. 관객과 통하려면 배우, 조감독, 연출부 등과 먼저 통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철칙이다.

▲100번째 영화 앞에서 쑥스러워하는 노장

임감독의 말투는 어눌하다. 자신의 작품을 이야기할 땐 더 그렇다. 후배 영화인들이 그의 100편째 영화 제작을 기념해 마련한 헌정행사 자리에서도, 개봉에 즈음한 기자들과의 인터뷰에서도 그는 새 영화에 대해 언급할 때마다 쉽게 말을 잇지 못하고 쑥스러워했다. 영화인들은 우리의 한과 혼을 가장 잘 표현해온 노장 감독이 지금도 현장에서 메가폰을 잡고 있는 것을 한국영화계의 축복이라고 말한다. 빨치산의 아들로 태어나 먹고 살기 위해 영화판에 뛰어든 이 영화 청년이 밟고 다진 역사가 한국영화의 ‘오래된 미래’로 지속될 이유이기도 하다.

▲1962년부터 2007년까지 임권택 작품 100편 연보

1. 두만강아 잘있거라(1962)

2. 전쟁과 노인(1962)

3. 남자는 안팔려(1963)

4. 망부석(1963)

5. 신문고(1963)

6. 단골 지각생(1964)

7. 단장록(1964)

8. 십년세도(1964)

9. 십자매 선생(1964)

10. 영화마마(1964)

11. 욕망의 결산(1964)

12. 빗속에 지다(1965)

13. 왕과 상노(1965)

14. 나는 왕이다(1966)

15. 닐니리(1966)

16. 법창을 울린 옥이(1966)

17. 전쟁과 여교사(1966)

18. 망향천리(1967)

19. 청사초롱(1967)

20. 풍운의 검객(1967)

21. 돌아온 왼손잡이(1968)

22. 몽녀(1968)

23. 바람같은 사나이(1968)

24. 요화 장희빈(1968)

25. 뇌검(1969)

26. 비나리는 고모령(1969)

27. 상해탈출(1969)

28. 신세 좀 지자구요(1969)

29. 십오야(1969)

30. 황야의 독수리(1969)

31. 그여자를 쫓아라(1970)

32. 밤차로 온 사나이(1970)

33. 비검(1970)

34. 비나리는 선창가(1970)

35. 속눈썹이 긴 여자(1970)

36. 애꾸눈 박(1970)

37. 월하의 검(1970)

38. 이슬 맞은 백일홍(1970)

39. 나를 더이상 괴롭히지 마라(1971)

40. 둘째 어머니(1971)

41. 명동 삼국지(1971)

42. 30년 만의 대결(1971)

43. 요검(1971)

44. 원한의 거리에 눈이 내린다(1971)

45. 원한의 두 꼽추(1971)

46. 돌아온 자와 떠나야 할 자(1972)

47. 명동 잔혹사(1972)

48. 삼국대협(1972)

49. 대추격(1973)

50. 잡초(1973)

51. 증언(1973)

52. 장안명기 오백화(1973)

53. 아내들의 행진(1974)

54. 연화(1974)

55. 연화2(1974)

56. 울지 않으리(1974)

57. 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1975)

58. 왜 그랬던가(1975)

59. 낙동강은 흐르는가(1976)

60. 아내(1976)

61. 왕십리(1976)

62. 맨발의 눈길(1976)

63. 옥례기(1977)

64. 임진왜란과 계월향(1977)

65. 족보(1978)

66. 가깝고도 먼 길(1978)

67. 상록수(1978)

68. 저 파도 위에 엄마 얼굴이(1978)

69. 깃발 없는 기수(1979)

70. 내일 또 내일(1979)

71. 신궁(1979)

72. 짝코(1980)

73. 복부인(1980)

74. 만다라(1981)

75. 우상의 눈물(1981)

76. 안개마을(1982)

77. 오염된 자식들(1982)

78. 나비 품에서 울었다(1982)

79. 불의 딸(1982)

80. 아벤고 공수군단(1982)

81. 흐르는 강물을 어찌 막으랴(1984)

82. 비구니(1984)

83. 길소뜸(1985)

84. 씨받이(1986)

85. 티켓(1986)

86. 아다다(1987)

87. 연산일기(1987)

88. 아제아제 바라아제(1989)

89. 장군의 아들(1990)

90. 장군의 아들2(1991)

91. 개벽(1991)

92. 장군의 아들3(1992)

93. 서편제(1993)

94. 태백산맥(1994)

95. 축제(1996)

96. 창(1997)

97. 춘향뎐(1999)

98. 취화선(2002)

99. 하류인생(2004)

100. 천년학(2007)

〈송형국·백승찬기자 hanky@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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