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상고원’(감독 김응수)에서 K는 사랑하는 여자 E를 찾아 먼 여행을 떠난다. K가 향하는 곳은 3년 전에 E와 함께 머물렀던 히말라야 산맥의 라다크이다. 그런데 일반 관객에게 ‘천상고원’의 결말은 상당히 당혹스러울 수 있다.

[영화 가로지르기]천상고원

K는 여자친구를 만나지 않을 뿐 아니라, 여자친구를 찾으려는 노력도 사실상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그저 라다크 사람들에게 3년 전에 그들과 찍은 사진들을 돌려주는 것에 만족한다. 관객은 여자친구를 찾으러 떠난 여정이 왜 이렇게 마무리되는지 선뜻 이해하기 어렵다. 하지만 이 낯선 결말이야말로 ‘천상고원’이 거둔 명백한 성취이다.

K가 사진을 나눠주는 장면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3년 전에 라다크 사람들의 사진을 찍었을 때, K는 그저 이국적 풍경을 열심히 사진에 담는 평범한 관광객이었을 것이다. 여행지의 사진들은 대개 여행객의 사진첩에만 추억으로 간직될 뿐, 여행지에서 만났던 현지 사람들과 공유되지는 않는다. 그 사진 속의 자연과 사람들은 이국적 정취의 일부로서 사물화될 뿐이다. 따라서 K가 다시 찾아가 그들에게 사진을 직접 나눠주는 장면은 K가 자신이 더 이상 관광객이 아니라고 스스로 선언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이제 K는 현지 사람들을 객체화하는 관광에 머물지 않고, 그들과 진솔하게 교감하기 시작한다.

여행지의 치열한 현실을 단순한 구경거리로 소비한다는 점에서, 어쩌면 여행객은 본질적으로 오만한 존재인지 모른다. 하지만 그들은 오만한 만큼 무력하다. 황량한 산악지대에 남겨진 K도 고산병으로 인한 육체적 고통에 시달린다. 그는 낯선 곳을 여유롭게 관광하는 여행객이면서도, 원주민들의 치열한 생존방식은 정작 알지 못하는 이방인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여행객의 오만함과 이방인의 무력감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 낯선 자연 앞에서 무력한 K의 모습은 그 자신만의 것은 아니다. 그것은 이방인일 수밖에 없는 여행객 모두가 감내해야 하는 숙명인지 모른다.

건설중독증과 개발강박증에 시달리는 우리의 시선으로 보자면, 어쩌면 그곳은 버려진 오지쯤으로 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우리가 오지라고 부르는 곳에 터잡고 사는 ‘천상고원’의 원주민들은 그 위압적 자연 앞에서 태연하다. 또한 그들은 바깥세상에서 찾아온 이방인들 앞에서도 의연하다.

K가 사진을 나눠줄 때, 그들은 따뜻하게 K를 대하지만 그 이상의 환대는 하지 않는다. 오지를 찾아가는 텔레비전 탐사 프로그램에서는 흔히 원주민들이 외부세계의 여행객들을 둘러싸고 환호한다. 그러나 ‘천상고원’의 라다크 사람들은 외지인들에게 의연하고 덤덤하다. 그 의연함은 그들도 우리처럼 치열하게 현실을 영위하는 사람들이라는 것, 즉 그들이 우리와 엄연히 ‘동격’임을 다시 환기시킨다.

‘천상고원’의 라다크를 현실의 피로를 달래기 위해 방문하는 아름다운 별천지로 ‘미화’할 이유는 없다. 동시에 그곳을 개발이 필요한 낙후된 오지로 ‘격하’할 필요 역시 없다. 그 곳은 누군가의 삶이 엄숙하게 펼쳐지는, 냉엄한 생의 터전이기 때문이다. 라다크를 신비한 대자연으로 미화하는 것이나 그곳을 사람이 살 수 없는 미개한 오지로 격하하는 것 모두 그곳에서 치열하게 삶을 영위하는 원주민들의 현실을 외면하는 오만한 행태이다.

[영화 가로지르기]천상고원

옛 애인 E를 찾으러 떠난 여행이지만, 결국 K는 사랑하는 E를 찾지 않는다. 대신 그는 라다크 사람들과 재회하고 그들과 새롭게 소통하기 시작한다. 사랑을 위해 떠난 K의 여행은 낯선 자들과의 덤덤하면서도 진실된 교감에 도달하는 의외의 결말을 맞는다. 즉 영화 ‘천상고원’은 ‘감정의 진화’에 대한 훌륭한 은유다. 이제 K의 여정은 관광에서 타인에 대한 겸허한 관찰로, 관찰에서 삶에 대한 성찰로 나아간다. 연인과의 사랑에서 비롯된 K의 발걸음이 낯선 사람들과의 연대로 이어지는 과정은 그 자체로 감정의 진화이자 인식의 성숙이다.

남성우월적인 마초도 딸을 키우며 여성에 대한 자신의 편견을 스스로 반성할 수 있고, 이주노동자와 사랑에 빠진 사람도 그 사랑을 통해 이주노동자들의 억압적 노동현실에 눈뜰 수 있다. 사랑은 때로 사랑 그 자체를 넘어서는 동기가 되기도 한다. 사랑을 통해 사회와 역사를 만나는 그들은 사랑으로 사랑을 넘어서는 사람들이기도 하다.

K도 이제 좁은 사랑의 영토에서 E를 찾아 헤매지 않는다. 사랑을 찾아 길을 떠난 K는 결국 사랑의 영토를 넘어 드넓은 ‘사회적 연대’의 영토로 진입하는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찾아 떠난 여행에서 K가 정작 만난 사람도 사랑하는 E가 아니라 라다크 사람들이었다.

〈황승현|영화평론가 hinno@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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