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성주 “이데올로기 없이도 세상을 바꿀 수 있다”

박송이 기자

사람들이 진보정당 하면 떠올리는 이미지는 ‘갈등’과 ‘분열’이다. 보호해야 할 사람들이 소외될 때, 진보정치는 안에서 싸우고 있었다. 정의당 당대표 선거에 출마한 조성주 후보의 출마선언문이 화제다. ‘2세대 진보정치’를 내건 그의 등장에 진보지지층이 예상 외의 열띤 반응을 보이고 있다.

꼬박 일주일이 걸렸다. 감동적인 연설로 표심을 얻겠다는 욕심은 없었다. 상대가 누구던가. 정의당의 간판들이다. 노회찬 전 대표, 심상정 전 원내대표, 노항래 전 정책위원장. 정치 이력은 비교가 안 됐다. 그래도 욕심을 내보자면 적어도 이들에게 밀리고 싶지는 않았다. 당대표 선거인 만큼 최대한 공을 들이는 것도 유권자들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했다. 일주일 동안 팀원들과 머리를 맞댔다. 초안을 쓰고 고치고 검토하고 토론하는 작업을 밤낮없이 반복했다. 잠깐 쉬려고 자리에 누워서도 고쳐야 할 문장, 빼야 할 문장, 추가해야 할 내용들이 머리에 떠올랐다. 일주일 만에 최종 출마선언문이 완성됐다. 부끄럽지 않았다.

지난 6월 15일 정의당 당원게시판에 조성주 후보의 출마선언문이 올라왔다. 그는 7월 치러지는 정의당 당대표 선거에 출마했다. 그의 출마선언문은 단박에 화제가 됐다. 조회수는 3만3000건을 넘었다. “근래 5년간 이토록 내공과 영혼이 담긴 연설문을 처음 보았다.” 안병진 경희사이버대 교수는 <경향신문> 칼럼에서 극찬했다. 정작 조 후보 본인은 이렇게 화제가 될 줄 몰랐다. 출마선언문에 열심이었던 건 당장의 선거 때문만은 아니었다. 정치의 본질은 ‘말의 힘’이라고 생각했다. 극단적 분노의 표출, 증오의 표출은 지지층을 양극화시키는 말이다. 이는 말을 제대로 쓰는 것이 아니다. 정치를 시작하면서 적대적인 의사소통이 아닌 다른 말과 글을 고민했고, 출마선언문은 하나의 결실인 셈이다.

정의당 당대표 선거에 출마한 조성주 후보. / 이상훈 선임기자

정의당 당대표 선거에 출마한 조성주 후보. / 이상훈 선임기자

증오의 표출이 아닌 다른 말과 글을 고민

거슬러 올라가면 그의 뿌리는 학생운동이다. 운동권의 정서, 운동권의 말이 그의 20대를 지배했다. 적대감, 분노의 표출이 잦았다. 전선을 긋고 상대 진영을 향해 조롱하고 분노하고 냉소하고 비꼬았다. 열심히 세상을 바꾸기 위해 산다고 생각했지만, 내면은 계속 어두워졌다. “분노를 지속적으로 표출하다 보면 어느 순간 스스로가 망가져 있더라. 굉장히 힘든 시기에 만난 게 사울 알린스키의 책이었고, 그의 책을 읽으며 치유가 됐다.” 조성주 후보는 사울 알린스키의 책 <급진주의자를 위한 규칙>을 읽고 분노의 표출을 넘어 내면의 단단함을 갖게 됐다고 말했다. 알린스키에 대한 그의 생각이다.

“김혜린의 <불의 검>, 아다치 미츠루의 <H2>, 우라사와 나오키의 <마스터 키튼>, 그 다음으로 가장 좋아하는 책이 사울 알린스키의 <급진주의자를 위한 규칙>이다. 1970년대 지역에서 빈민운동을 하시던 분들은 알린스키를 잘 알 것이다. 1980년대 들어와서 한국에서는 잊혀졌는데, 2011년 우연한 기회에 그 책을 읽게 됐다. 읽으면서 행복했다. 내면의 단단함, 자기정체성이 있다면 극단적인 표현이나 말을 하지 않더라도 충분히 이길 수 있다는 것을 배웠다. 악이 더 힘이 세고 가진 자들이 힘이 세면 싸움에서 그들이 승리하는 게 맞다. 세상은 생각만큼 쉽게 바뀌지 않으니까. 그러나 반드시 변화하기는 한다. 원하는 만큼 바뀌지 않는다고 진보는 조급함을 갖는다. 그리고 그 조급함을 분노와 적대감을 표출하는 방식으로 해소한다. 진보의 내면이 단단하지 않기 때문이다.”

진보의 조급함이 적대적 언어로 표출되고 쥐박이, 닭근혜, 색검 등 극단적 언어들만 난무하면서 실제 정치가 보호해야 할 사람들은 점점 더 소외돼 갔다. 극단적 갈등의 언어, 그 바깥을 살피는 것과 그가 ‘2세대 진보정치’의 핵심으로 ‘밖’에 주목해야 한다고 말한 것은 그래서 같은 맥락이다. 그는 출마선언문에서 민주화의 성과에 안주하고 다투는 사이 “민주주의의 광장은 좁아졌고, 우리가 보호해야 할 시민들은 광장 ‘밖’으로 쫓겨났다”고 말했다. 그러므로 “2세대 진보정치는 그 광장 ‘밖’의 사람들의 삶에서 출발해야 한다.”

“내면의 단단함이 극단적 말보다 강하다”

시민들이 광장 ‘밖’으로 쫓겨나고 있을 때, 진보정치는 안에서 다투고 있었다. 1980년대 학생운동권에서 시작해 진보정당의 잇따른 분열을 초래한 PD/NL 논쟁이다. 이데올로기가 진보정치를 분열과 갈등으로 이끌어갔다는 것을 봤기 때문일까. 그는 “이데올로기 없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단언했다. “마르크스주의가 됐든 뭐가 됐든 이데올로기가 나에게 강한 신념을 주고 그 방향으로 가는 게 세상을 바꾸는 것처럼 생각한 적도 있다. 진보정치도 그러한 흐름 속에서 분열되고 제대로 현실에 대응하지 못했다. 그러나 자주파니 평등파니 그게 도대체 사람들의 삶을 바꾸는 것과 무슨 상관이 있는 것일까. 무의미한 내부 논쟁만 반복해 왔다. 우리가 대변해야 할 사회·경제적 약자들에게 얼마나 황당한 모습으로 비춰졌겠나.” 그는 이데올로기와 단절했다. 이데올로기가 없어도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했고, 우선 지금 눈앞에 보이는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먼저라고 생각했다.

2010년 그가 청년유니온을 만든 것은 이 때문이었다. “지금 우리 세대의 문제는 내 손으로 해결하고 싶었다.” 이데올로기 ‘바깥’에 세워진 청년유니온은 새로운 운동으로 적극적인 지지를 받기도 했지만, 분열주의·개량주의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민주노총 안에서 노조를 만들지 않은 것은 분열주의 아니냐, 그게 무슨 노조냐.’ ‘너희들 손에는 기름때도 없는데, 너희가 무슨 노동자냐.’ ‘편의점 아르바이트는 경험이지 그게 무슨 노동이냐’ ‘너희는 취업할 데도 많은데 눈높이가 높아서 그러는 것 아니냐.’ 노동운동과 진보진영에서 나온 비판이다. 그래도 만나서 물어보고 설득하고 버텼다. 청년유니온을 시작으로 민달팽이유니온, 청년연대은행 등 한국 사회에서 경제적 약자인 청년들이 모인 단체들이 뒤이어 만들어졌다.

출마선언문에서도 조성주 후보는 여전히 이 한국 사회 청년의 정체성을 견지하고 있다. 그는 자신의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으로 자신의 개인사를 짧게 소개한다. 유리 만드는 공장의 노동자였던 아버지 회사에 1987년 이후 노조가 생겼다. 노조가 생긴 후 임금이 인상되고 그의 가족의 삶도 조금씩 나아졌다. 민주주의에 대한 헌신과 노동에 대한 헌신으로 가능했던 변화다. 그러나 정작 그 자신의 이야기는 아버지의 세상 밖에서 시작된다. “제가 성인이 되어 마주한 사회는 아버지 세대가 살아냈고 성취했던 그것과는 너무나 달랐습니다. 청년실업자로, 비정규직으로, 가난한 영세자영업자로 살아가는 제 동료와 후배들은 이제 노동조합은커녕 자신들을 위한 조직 하나조차 갖기 힘듭니다. 이들은 선배 세대가 이룬 민주주의 바깥에서 철저히 고립되어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들과 함께 우리의 삶을 바꾸기 위해 지금까지 노력해 왔습니다.” 386의 경험이 독점하고 있던 한국 진보정치에서 조 후보의 출마선언문은 새로운 세대의 경험이 진보정치의 새로운 출발점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정의당 당대표 후보 토론회. 왼쪽부터 심상정, 조성주, 노회찬, 노항래 후보

정의당 당대표 후보 토론회. 왼쪽부터 심상정, 조성주, 노회찬, 노항래 후보

“한번에 되찾지 말고 조금씩 되찾자”

진보정당이 원내에 진출한 지 10년이 지난 지금, 사람들이 진보정당에 대해 떠올리는 이미지는 ‘갈등’과 ‘분열’이다. 대중들이 진보의 과제로 먼저 떠올리는 것은 ‘통합’이라는 것이 그 방증이다. 그러나 ‘2세대 진보정치’는 진보통합이라는 ‘극복’해야 하는 선결과제와는 다른 프레임이다. ‘2세대 진보정치’를 내건 그의 등장에 진보지지층이 예상 외의 열띤 반응을 보이는 것은 통합이라는 강박에 피로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러나 특정 세대의 문제가 한국 정치의 보편적 문제가 될 수 있을까. 정치에서 특정 세대를 부각시키는 것은 세대 분열 또는 조직 갈등으로 이어지지 않을까. 조성주 후보는 ‘2세대 진보정치’는 단순히 특정 세대의 이익을 대변한다거나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물갈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고 강조한다. 486의 직무유기에서부터 다시 진보정치가 시작돼야 한다는 점에서 ‘2세대 진보정치’라는 것이다. “486의 문제는 단순히 차세대를 안 키웠다는 게 아니다. 그들은 다음 세대에 어떤 사회를 만들어줄 것인가에서는 철저하게 실패했다. 한국의 사교육 과잉, 부동산 집값 폭등. 그들은 그저 똑같이 뛰어들었다. 그 결과 오늘날 청년세대가 고시원을 전전하고 노동시장에서 비정규직을 전전하게 되고, 말도 안되는 스펙 경쟁에 내몰리게 된 것이다. 486이 이를 단절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당대표가 된다면 2세대 진보정치를 넘어 그 다음 세대인 10대 20대를 위한 진보정치를 고민할 것이다. 2세대 진보정치의 핵심은 세대간 갈등이 아니다. 진보정치가 어디에 서 있어야 하나 하는 위치의 재조정 문제를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이다.”

정체성과 실리 사이에서 늘 갈등하며 흔들리는 것이 진보정치다. 이데올로기와의 단절을 선언하고 지금 현재의 문제에 천착하겠다는 그는 정체성보다 실리에 무게중심을 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그는 이 갈등에 이미 결론을 내린 것처럼 보인다. 운동권에서 불려지는 <단결투쟁가>에 “우리는 한꺼번에 되찾으리라”라는 구절이 있다. 그러나 그는 지금 당장 조금씩 되찾아야 한다고 말한다. “나는 이게 현실적으로 더 급진주의자라고 생각한다. 말로 급진적인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다. 알린스키는 그걸 구두선식 급진주의자라고 표현했다. 나는 그게 제일 안 좋은 습관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솔직히 2030 논객이라는 이름의 화려한 언변과 글에 좀 회의적이다. 그것보다 현실에서 아르바이트 노동자의 체불임금 받아주고, 파견노동자의 불법파견 문제를 적발하고, 카드수수료의 현실화를 이야기하는 게 훨씬 급진적이라고 생각한다.”

진보의 이념과 시민정치의 조화 고민

정작 정체성과 실리 사이의 그의 갈등은 좀 다른 축에 있다. 서울시에서의 경험이다. 그는 2013년 5월부터 약 1년 반 동안 서울시 노동전문관으로 일하면서 내면적 고민이 많았다. 출마선언문에서도 정당정치 강화를 강조했던 그이지만 2013년 5월 정의당으로 입당하지 않고 행정을 경험하고 싶어 서울시로 향했다. 이번 당대표 출마를 앞두고 당내에서 그의 입당이 너무 늦었다는 비판이 나온 배경이기도 하다. “행정에서 일하니까 내면적 괴로움이 굉장히 있었다. 예컨대 트위터에서 시장에게 보내는 메시지와 시민단체의 농성을 같은 층위의 메시지라고 볼 수 있나. 똑같은 커뮤니케이션인가. 이런 갈등을 어마어마하게 느꼈다. 박원순 시장을 가까이서 보면서 배운 것은 많다. 다들 박원순 시장이 아이디어와 디테일에 강하다고 하지만, 내가 봤을 때는 리더십이 남다르다. 훌륭한 스킨십을 갖고 있다. 사실 정당정치 강화하자는 진보정당의 이념과 시민정치에서 출발한 박원순 시장의 정치행위는 많이 다르다. 이 두 가지가 뭔가 서로 좋은 영향을 줄 수 있고 조화가 될 법도 한데 아직 답을 찾지 못했다. 많이 배우면서 내면적인 갈등도 많았고 여전히 고민 중이다.”

정치를 하겠다고 결심한 것은 2010년이다. 가끔 그 결심이 낯설 때가 있다. 스스로 난 지금 무엇을 해야 하나, 누구를 대변해야 하지, 누구와 싸워야 하지를 끊임없이 묻는 자신과의 싸움이다. “사실 정치는 구름 같은 일이다. 대중과 여론을 모아내는 일인데, 손에 잡히지 않고 굉장히 불투명해서 아침마다 거울 보며 내가 지금 뭐하고 있지라는 물음을 던진다. 좀 고독한 일이라 오래 정치한 사람들이 대단해 보인다. 어제 토론회 마치고 심상정 의원님, 노회찬 전 대표님 앉아 계시는데 저 분들도 나처럼 내면이 고독하실 수 있겠다, 그런 생각이 들더라. 그래도 내가 갖고 있는 소양, 타인의 고통과 교감하고 공감하고 이를 해결해가면서 얻는 기쁨이 크다. 그런 면에서 정치가 나한테 맞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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